171화
멀찍이서 거대한 폭음이 들려올 때마다, 칠이 벗겨진 창틀이 바르르 떨렸다. 피난처 같지도 않은 낡은 헛간에 삼삼오오 붙어 앉아 파들거리는 이들의 얼굴엔 지울 수 없는 공포가 드리워져 있었다.
“오, 우리를 살피시고….”
누군가의 중얼대는 기도 소리에도 조용히 하라 고함치는 이가 없었다.
그만큼 모두가 절실했고, 모두가 두려웠다.
“저거 브리틴 아니야?”
“브리틴?”
“에이, 그럴 리가. 브리틴은 연합군이잖아.”
사람들은 차마 창가엔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고개만 빼서 기웃거렸다. 그러다가도 저 멀리서 펑, 하고 터지는 소리가 들리면 화들거리며 구석에 틀어박혔다.
베스는 두 손으로 귀를 꽉 틀어막은 채 창가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장갑도, 모자도, 꽃도 모두 잃어버린 그녀가 간직하고 있는 거라곤 재로 엉망이 된 코트뿐이었다.
설마 아직도 성안에 있는 건 아니겠지.
불안감으로 터져 오를 듯한 심장이 못 견디게 숨통을 조여왔다. 약속 따위 안 지켜도 아무래도 괜찮았다. 홀로 도망친 거라 해도 아무렇지 않았다.
제발 이곳에만 없길. 제발.
“어어, 간다…!”
번트 곳곳을 부지런히 들쑤시던 전투기가 마지막 폭탄을 매단 채 클리프 성의 본관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안 돼.
벌떡 일어난 베스가 문가로 달려가려는 순간. 허공을 빠르게 가로지르는 엔진 소리가 헛간의 지붕을 스쳤다. 얇은 판자 지붕이 부르르 진동하며 곧 무너질 듯이 흔들렸다.
“넥서스다!”
얼룩진 창 너머로 제국 문장이 새겨진 전투기 한 대가 속력을 높여 클리프 성으로 날아가는 게 보였다.
“그래, 어서! 한 방에 쏴 버려!”
날렵하게 몸을 튼 넥서스 전투기가 적군의 전투기를 바라보며 우회했다. 이에 폭탄을 조준하다 급하게 선회한 적군 전투기의 몸뚱이가 불안정하게 옆으로 기울었다. 기관총 세례가 연발 들려오는가 싶더니, 클리프 성을 폭파하려던 전투기가 공중에서 붉은 섬광을 터뜨리며 추락했다.
짧은 환호성이 이어졌으나, 어디선가 나타난 한 무리의 전투기에 사람들은 다시 넋을 잃고 창밖만 바라봤다. 마른하늘에 우레같은 굉음을 내며 지나가는 전투기가 이젠 넥서스인지, 적군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그때. 낡은 판자문이 거칠게 열렸다.
훅 끼쳐 들어오는 차가운 냉기와 매캐한 연기에 사람들이 콜록거리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들이닥친 인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누군가를 찾는 듯 컴컴한 헛간을 면밀히 둘러봤다. 그러다 문가에 주저앉은 베스를 보곤 급히 손을 내밀었다.
“클리프 부인을 모시러 왔습니다.”
“켁, 클리프 부인?!”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연신 기침을 하던 샐먼 부인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베스는 잔뜩 경계 어린 시선으로 제 두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데베르 공작님께서 모셔 오라 명령하셨습니다.”
“그분이 지금 번트에 계시나요?”
“공작님은 현재 번트엔 안 계시지만-”
정갈하게 내민 손은 귀족 부인을 에스코트할 때 하는 행동이 맞았다.
그러나 믿을 수 있을까.
끌려가는 건 이골이 났다. 속아 넘어가는 것이라면 더더욱.
“…싫어요. 전 그 사람 아니면 안 가요.”
눈물로 발갛게 짓물러진 눈이 제법 고집스럽게 제 의사를 밝혔다.
남자는 예상했다는 듯이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걸 보여드리면 믿으실 거라고 했습니다.”
목걸이였다. 아득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영롱한 빛을 발하는 백금 줄의 목걸이. 데베르와 저를 이은 약품 창고 열쇠가 달려있던 그 목걸이를 베스가 몰라볼 리 없었다.
이제 그곳엔 피 묻은 열쇠 대신 금빛 브로치가 걸려있었다.
남자의 손에서 하늘거리는 줄이 베스의 손끝으로 부드럽게 흘러들어왔다. 생채기가 난 손안에 들어온 금빛 브로치를 베스는 말없이 그러쥐었다. 이걸 가슴에 달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그녀에게 있어선 한 명뿐이었다.
바깥에선 여전히 소름 끼치는 파열음이 들려왔다.
시간이 없어.
그 사실을 깨달은 베스는 여태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한 샐먼 부인을 다급히 껴안았다.
“감사했어요. 찾아 와 주셔서. 그리고, 기억해주셔서.”
“베스 너 언제부터 말을. 클리프 부인은 또 무슨 소리람….”
베스는 갑작스런 사실을 받아들이느라 여념이 없는 부인을 향해 예쁘게 미소 지었다.
남자를 따라 밖으로 나오자마자 뿌옇게 일어난 흙먼지에 아미를 찌푸리기도 잠시. 클리프 부인을 태운 차는 연기가 솟구치는 성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폭격의 여파를 제대로 맞은 클리프 성은 동관에서부터 타오른 불길로 숨쉬기도 어려웠다. 우수수 떨어지는 건물 잔재가 시야를 가려,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천장을 확인해야만 했다.
“이곳으로 오십시오!”
자연스럽게 본관의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베스를 익숙한 목소리가 막아 세웠다.
“여기, 지하실로 오세요.”
노년의 몸으로 견디기 힘든 것이 분명한데도, 이채가 도는 집사의 눈동자는 누구보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뒤였다. 늘 깔끔하게 넘겨져 있던 백발이 몇 올 흐트러지긴 했지만, 오랜 세월 클리프를 지켜온 집사는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대중없이 흔들리는 계단의 난간을 겨우 짚으며 베스는 집사를 따라, 본 적 없는 성의 지하로 내려갔다. 깊숙이 내려갈수록 몸을 뒤흔들던 진동도 점점 잦아들었다.
“여깁니다.”
마침내 가장 아래에 다다른 순간. 집사는 두꺼운 철문에 매달린 잠금쇠를 잔뜩 힘을 주어 돌렸다. 배의 키를 닮은 커다란 잠금장치가 열리자마자, 베스는 눈 앞에 펼쳐진 장면에 헛숨을 터뜨렸다.
“데베르 공작님께서 언젠가가 될 그날, 클리프 부인을 위해 준비해놓으신 겁니다.”
광활한 성의 크기만큼이나 끝도 없이 이어진 방공호는 클리프가의 위세를 한 번에 보여주는 것이었다. 아늑한 램프 조명이 천장에 매달려 깜빡이는 그곳엔 새것일 게 분명한 반질한 축음기까지 놓여 있었다. 며칠은 물론, 몇 년 남짓을 이곳에만 있어도 문제가 없을 성의 지하는 집착적일 만큼 완벽한 데베르 클리프의 보호를 상징했다.
베스는 작은 테이블 위에 놓인 간호 서적들을 손으로 쓸어봤다. 전부 자신이 제국 병원에 내버리고 온 손때 탄 책들이었다.
“엄중히 명령하고 떠나셨습니다. 베스 양을 이곳에 붙잡아 놓으라고요.”
붙잡아 놓으라니. 참 저다운 말을 뱉고 떠난 남자였다. 베스는 그 말을 했을 남자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떠올라 애꿎은 입술만 뜯어댔다. 당신은 끝까지.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것들이 입술 끄트머리로 새 나왔다.
“늘 베스 양의 안위를 걱정하시는 분이지 않습니까.”
“저를….”
베스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결혼 이전처럼 ‘베스 양’이라 부르는 집사를 가만히 바라봤다. 이 또한 노련한 집사의 배려라는 것을 잘 알았다. 공작이 별다른 말을 않았더라도, 그간의 일들만으로도 어그러진 관계를 충분히 눈치챘을 테니.
바깥의 폭발음은 여기서만큼은 귀를 기울여야 눈치챌 정도로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곳은 안전할 것이다. 모른 척 얌전히 들어앉아 이 전쟁이 끝나길 기다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제가 아직, 클리프 부인인가요…?”
예상 밖의 물음에 눈썹을 크게 들썩인 집사는 이내 푸근히 웃어 보였다.
“제게 베스 양은 항상 클리프 부인이십니다.”
그 따스한 웃음을 마주 보던 베스는 손가락 사이사이에 걸린 목걸이를 조금 더 세게 거머쥐었다.
이번엔 결심을 세우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번트의 사람들을 위해 성의 방공호를 온전히 개방해 주세요. 그리고.”
가녀리지만 심지가 단단한 목소리에 위엄이 실렸다.
상대를 누르고 억압하기 위한 위엄이 아닌, 제 따스함을 나눠주기 위한 다정한 위엄이.
“부디 다치지 마세요. 집사님.”
다시 만나자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은 마음속 깊숙이 눌러 내렸다.
그건 아직 결심하지 못한 부분이었으니까.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일 클리프 부인으로서의 부탁이에요.”
“얼마든지요.”
컴컴한 계단을 뛰어 올라가던 베스는 잠시 스치는 망설임에 걸음을 늦췄지만, 집사는 그녀를 부르지도 잡지도 않았다. 저런 분이었기에 제 가주가 사랑했고, 앞으로도 사랑하리란 것을 잘 알았다.
“곧장 나가시면 웨인으로 향하는 군용차가 대기 중입니다.”
혼잣말 같은 한 마디.
딱 거기까지가 집사가 지켜낸 선이었다.
펼쳐진 전쟁의 포효 속으로 사라지는 베스의 걸음에 더 이상의 주저는 없었다.
* * *
거친 숲길을 달리느라 차체가 울렁이자, 군인 하나가 폭격으로 길을 돌아가느라 늦어진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다들 번트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군복을 입은 사내들이 가득한 군용차에 하얗다 못해 파리하게 질린 여자는 한눈에 봐도 이질적이었다.
“이제 곧 웨인입니다.”
헤드라이트 불빛을 제외하면 한치의 빛도 보이지 않던 숲길 저 너머에서 점멸하는 불빛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웅성거리는 인파의 소음도 함께였다.
늦으면 안 돼.
베스는 초조하게 주머니 속의 목걸이를 매만졌다.
도착한 웨인은 깊어진 밤이 우스울 정도로 사방에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전선이 끊겨 가로등이 없는 곳엔 램프는 물론 기다란 횃불까지 떡하니 마차 옆에 달렸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떠나려는 이들과 가족을 잃어 이성을 잃은 이들이 한데 엉켜 당장 옆 사람의 목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부인께선 여기 잠시, 엇. 부인!”
호리한 체구의 베스는 혼란을 틈타 저와 같이 온 군인들의 눈을 피해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그 와중에도 끝날 기미 없이 울려대는 종소리를 이정표 삼아 쉬지 않고 뛰어갔다. 종탑이 가까워질수록 진동하는 탄내에 절로 기침이 터져 나왔지만, 기어코 저곳까지 올라가야만 했다.
이제 곧 진군행렬이 시작될 것이기에.
“아가씨 거긴 위험-”
누군가 제 어깨를 붙잡아도 못 들은 척 뿌리친 채 종탑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벅차게 차오른 숨에 구역질이 밀려와도 멈출 수는 없었다.
바깥엔 벌써 심상찮은 북소리가 들려오는 중이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헉. 으흑….”
움직이지도 않는 다리를 억지로 떼 기어이 종탑 꼭대기에 오르자마자, 베스는 사면이 뚫린 절벽 같은 그곳에서 간신히 종 줄을 붙잡았다. 거센 겨울바람에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나부꼈고, 힘이 빠진 다리는 금방이라도 아래로 떨어질 것처럼 후들거렸지만, 반드시 여기여야만 했다.
이곳만이 번잡한 웨인 중심가를 한눈에 볼 수 있으니까.
온 감각을 마비시킬 듯이 제 위에서 울려 퍼지는 웅장한 종소리에도, 베스의 눈은 수많은 사람 중 단 한 사람을 찾아냈다.
데베르 클리프.
모든 것이 저 남자 하나를 알아보기 위한 여정이었다.
그는 서두르는 기색 없이 황궁 전용차에서 내리더니 입고 있던 짙은 재색의 가죽 코트를 벗었다. 하지만 소맷단의 커프스를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던지고, 각이 진 군복을 걸치는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부하병인듯한 군인 하나가 다가와 작은 종이를 내밀자, 그는 빠르게 무언가를 휘갈겨 썼다. 아주 잠깐, 고민하듯 펜촉이 멈추었으나 찰나였다. 무감한 얼굴로 탄창을 점검한 뒤 허리춤에 꽂고, 무전기의 수신을 확인해 사인을 주는 그 모든 행동이 능숙했다.
“넥서스! 넥서스!”
“승전하라! 승전하라!”
진군하는 군인들의 우람한 외침과 모여든 인파의 성원이 밀려드는 파도처럼 웨인을 휩쓸기 시작했다.
지붕이 없는 군용차에 올라탄 데베르는 군모를 눌러쓰다 말고 문득 높다란 종탑을 올려다봤다. 베스는 제 모습이 들킬세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날카로운 눈동자는 몇 초 정도 새카만 밤하늘을 울리는 종을 응시하다 고개를 돌렸다.
베스는 멀어져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봤다.
가지각색의 빛깔로 일렁이는 불빛 사이를 지나치는 그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 잔인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영광의 넥서스를 되찾으리!”
“영광의 넥서스를 되찾으리!”
“영광의 넥서스를 되찾으리!”
웨인을 비추는 불도, 사람들의 함성도 마치 영원할 것처럼 멈추지 않았다. 개전을 알리는 종소리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원치 않던 전쟁의 서막이 올라간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