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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70화 (170/206)

170화

그토록 길던 밤이 이토록 짧다니.

언덕 너머로 밝아오는 여명을 지켜보던 베스는 밀려오는 허무함에 눈을 깜빡였다. 밤새 타오르던 벽난로도 어느덧 작은 불씨만 타닥거리며 사그라들고 있었지만, 굳이 장작을 더 넣진 않았다. 이젠 다시 오래도록 잠들어야 할 집이었다.

마지막.

그 지겨운 단어를 재차 곱씹으며 베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눈에 담을 만큼 담은 풍경이었지만, 혹시나 흘러가는 시간 속에 잊어버릴세라 다시 한번 눈동자에 담아냈다.

어릴 적 자신이 깨 먹은 탓에 짝이 맞지 않는 찬장 속의 접시라던가. 일곱 살짜리 딸아이가 발견하지 못하게끔 높은 선반에 놓인 우표 상자라던가. 혹은 아마도 영영 보지 못할 번트의 봄이 담긴 눈 덮인 화단 같은. 그 아무것도 아닌. 그러나 그게 전부인 모든 것들이 베스 제인스가 이곳에 살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느지막하게 떠오른 겨울 해가 번트를 내리비추고, 갖은 모양의 구름이 한데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번트의 시린 풍경을 베스는 한참 동안 지켜봤다. 마침내 그 남자와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질 때까지.

크지 않은 가방에 싸놓은 소박한 짐이 문가에 놓였다. 여별의 옷 몇 벌이 전부인 짐이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싶었다. 짐이 늘어날수록 가져가고 싶은 기억이 많아질 것이고, 그럴수록 떠나는 발걸음은 무거울 게 분명하니까.

그러고 싶진 않아.

베스는 물러지려는 마음을 단단히 고쳐잡으며 거울 앞에 섰다. 열린 상자 속에 얌전히 놓여 있는 흰 코트를 드는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맞춘 듯이 몸에 꼭 맞는 코트의 단추를 하나씩 잠그며 베스는 입꼬리에 힘을 줘봤다.

웃어야지. 마지막인데.

연신 삐죽거리는 입매가 너무도 미워 보여 베스는 조금 울상이 되었다.

언젠가 새빨개진 제 손끝을 보기라도 한 건지, 상자 밑바닥에 함께 놓인 가죽 장갑도 손에 끼워 넣었다. 외투와 같은 색깔의 부들부들한 털모자까지 머리에 씌우자, 온통 허연 거울 속의 여자에게 비치는 색채라곤 멋없이 새카만 머리카락과 눈동자뿐이었다.

“더는 못나게 굴지 마.”

스스로 매정한 명령을 하며, 굳어진 표정을 애써 이리저리 비틀었다. 하지만 결국 집을 나서는 순간의 베스는 웃음도 울음도 아닌 애매한 미소만을 걸친 채였다.

언덕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갈 때마다 손에 들린 꽃줄기가 바람에 흐늘거렸다.

오늘은 며칠 밤을 끝도 없이 내리던 눈조차 그친 날이었다. 부시도록 새파란 하늘이 유독 적막한 번트의 오후를 더욱 쓸쓸하게 만들었다.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해요.’

‘진심이에요.’

철없이 뱉은 여름날의 진심이 겨울이 올 때쯤엔 이리 아프게 심장을 찔러올 줄 알았다면, 하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예쁜 언덕 보면서 전장은 떠올리지 말라는 뜻이에요.’

그런 건방진 말을 조금만 아꼈더라면, 지금 그 남자를 떠나는 게 이만큼 죄스럽진 않을 텐데.

그녀의 손아귀 아래에서 바들거리는 보랏빛 꽃잎이 주인을 대신해 떨고 있었다. 설렘인지 두려움인지조차 구별되지 않는 감정을 삼켜내는 가슴이 들썩였다.

언덕에 올라선 베스의 양 뺨이 밭은 숨으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약간은 파리하던 입술에도 혈색이 돌아 갸름한 얼굴이 탐스럽게 익은 열매처럼 반짝였다.

아직 오지 않은 데베르를 기다리며, 베스는 발아래 한눈에 보이는 번트를 지켜봤다.

드디어 오늘 번트를 떠난다. 오늘에서야.

당신을 닮은 계절에, 당신을 담은 이곳을 떠나려고.

“…웃어.”

저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한 희미한 엔진 소리에 베스는 최선을 다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울며 소리치던 모습을 그의 기억 속 마지막으로 남겨놓고 싶지 않았다. 한때는 나도 그의 애인이자, 부인이었으니 잠깐이라도 예쁘게 기억되길. 불쑥 치민 무의미한 소망이 베스를 웃게 했다.

티 없이. 해사하게.

“기다렸-”

그러나 그 미소는 베스가 등을 돌리기가 무섭게 덮쳐오는 굉음에 지워졌다.

다가온 건 데베르가 아니었다.

시퍼런 하늘을 뿌연 연기로 뒤덮으며 날아오는 전투기 한 대가 순식간에 베스의 머리 위까지 닥쳐왔다. 고막을 터뜨릴듯한 엔진소리에 베스는 본능적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아…!”

미처 손 뻗을 새도 없이 쓰고 있던 모자가 전투기가 일으킨 돌풍을 이기지 못하고 발아래의 풍경 속으로 떨어졌다. 서 있던 자리에서 그대로 주저앉은 베스는 점점 멀어져가는 전투기의 자취를 눈으로 좇았다.

넥서스군이 아니야.

군인은 아닐지언정 전장을 생생히 겪은 그녀가 제국 전투기를 몰라볼 리 없었다.

누구의 편인지 모를 전투기가 불길한 휘파람 소리를 내며 번트의 들판 위에서 머리를 우편으로 틀었다. 그곳엔 클리프 성이 있는데.

“데베르….”

목표물을 정한 듯 속도를 최대한으로 높인 전투기가 클리프 성으로 거침없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몇 초 지나지도 않아 쾅,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거만하게 솟아오른 클리프 성의 동관 지붕이 푹 꺼져 내렸다. 상황을 판단할 틈도 없이 어디선가 나타난 또 다른 전투기 한 대가 재차 같은 곳에 폭탄을 떨구었다.

콰앙. 쾅. 콰쾅.

검붉은 외벽이 피를 쏟듯 흘러내리는 광경을 베스는 멀거니 입을 벌린 채 지켜봤다. 전투기는 이젠 민가를 향해 짐승 같은 아귀를 펼치며 날아가고 있었다. 곧이어 으레 비슷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데베르, 데베르….”

베스는 그 이름만을 중얼거리며 미친 듯이 언덕을 뛰어 내려갔다. 그마저도 폭탄의 진동에 못 이겨 반쯤은 굴러떨어지는 것이었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흰 코트가 탄재로 거뭇해지고, 매운 화약 냄새에 눈물이 왈칵 치밀어도 한번 내달리기 시작한 다리는 멈추는 법을 잊은 것 같았다.

사위가 희뿌옇게 가려져 앞이 보이지 않았다.

“흐윽. 흡.”

저 멀리 아직 건재한 클리프 성의 본관을 향해 베스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달려나갔다. 쏟아져 나온 번트 사람들에게 어깨가 치이고, 거칠한 흙바닥에 몇 번이나 엎어질지언정 향해야 할 곳은 오직 한 곳이었다.

데베르 클리프. 약속 시간에 늦은 그 못된 남자에게.

소란스럽게 이리저리 도망치는 인파 사이로 청량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데엥. 뎅. 그 순간 모두가 걸음을 멈춘 채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한 번 울리기 시작한 종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 의미를 아는 사람들의 얼굴이 퍼런 하늘만큼이나 싸늘하게 질려갔다.

“…전쟁이야!”

누군가의 비명이 시발점이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제각기 고함을 질러대며 숨을 곳을 찾아 뛰어가기 시작했다. 사람들과 반대 방향으로 뛰어가려는 베스의 손을 돌연 거센 힘이 잡아챘다.

“베스!”

목에 붕대를 감은 샐먼 부인이 베스를 힘껏 잡아끌었다. 안된다고 울먹이며 고개를 내젓던 베스의 몸도 결국 쫓아오는 폭격을 피하는 인파에 쓸려 어딘가로 내몰렸다.

아직은. 아직은 무사하겠지.

그 남자의 오만한 콧대를 닮은 클리프 성의 마지막 남은 본관을 마치 그의 얼굴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꾸만 뒤돌아봤다.

만나자고 약속했으면서….

아이 같은 서러움이 터져 나와도 들어줄 이는 없었다.

* * *

쾅. 이어지는 굉음에 휘청이는 아더의 몸이 집무실의 한구석으로 밀려났다.

“대피! 전부 대피해!”

“폭발이다!”

아비규환이 된 집무실을 귀족 대신들이 앞다투어 뛰쳐나갔다. 젠장.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아더는 작게 욕설을 짓씹었다.

갑작스런 폭발이었다.

미처 대비할 틈도 없이 벌어진 폭파에 본궁이 잘게 떨리긴 했으나, 별다른 이상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 진원지가 본궁은 아니란 말인데.

“어디야!”

아더의 고성에 수행인들이 잽싸게 뛰어왔다. 벌써 모두 전투 태세를 갖춘 채였다.

“공주님의 온실 정원입니다!”

“뭐라고…?”

서랍에서 꺼낸 총을 익숙하게 허리춤에 끼우던 아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따라와. 그 한마디만 남긴 채 별궁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곳에 시커먼 연기가 솟아오르는 온실 정원이 보였다. 너른 야외 정원을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사람들로 인해 아더의 걸음이 몇 번이나 막혔다.

“제기랄!”

아더는 황제의 체통 따윈 잊어버린 채 별궁의 계단을 몇 계단씩 뛰어넘으며 올라갔다. 이미 그곳도 도망치는 사용인들로 혼잡하긴 매한가지였다. 그토록 공주의 안위를 운운하며 그의 앞을 막아서던 하녀조차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라프넬! 거기 있는 거야?!”

바깥의 난리가 무색하게 꼭대기 층의 조용한 복도에선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복도의 열린 창을 타고 매캐한 연기가 스멀스멀 들이닥쳤다.

“크읍. 라프넬…!”

벌컥 침실 문을 연 아더는 어제와 똑같은 자세로 잠들어 있는 라프넬에게로 급히 다가갔다. 아파서 움직이지 못하는 거라면 당장이라도 안아 들 생각이었다.

“얼른. 라프-”

그러나 이불을 젖힌 그의 얼굴에선 그나마 남아 있던 핏기마저 싹 사라졌다.

라프넬은 없었다.

대신, 공주와 똑 닮은 부드러운 금발의 가발이 씌워진 목제 인형이 그곳에 누워있을 뿐이었다. 꼭 아더 메이너를 속이겠다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아.”

아더는 불현듯 침대맡의 보석함을 열었다. 어릴 적부터 라프넬은 제게 소중한 것은 보석함에 숨겨놓곤 했다.

더러운 예감이 스친 건 직감이었다.

화려하게 제 존재를 뽐내는 목걸이며 귀걸이를 건성으로 제치곤, 투박한 모양새를 한 종이 반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보고 싶어, 라프넬.]

얇게 말린 반지는 역시나, 밀서였다. 그의 눈과 귀를 피한 저열한 밀서.

아더는 활짝 열린 창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창밖에선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칭송받던 공주의 온실 정원이 맹렬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폐하, 브리틴 연합군의 반란입니다!”

굵직한 외침이 잠시 멈춰있던 아더의 이성을 일깨웠다.

곧 창턱을 사납게 그러쥐는 손아귀 아래에서 얄팍한 밀서가 맥없이 찢어졌다.

“…전군 출정 준비하라.”

찬란한 영광의 넥서스가 때 이른 어둠에 스러지는 중이었다.

누군가가 틈을 내줬기 때문에.

“아군 제외 전원 몰살토록.”

그걸 두고 볼 리 없는 젊은 황제의 눈동자가 살기로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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