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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69화 (169/206)

169화

“폐하, 확인하고 왔습니다.”

바뀐 아더의 집무실 안으로 느지막한 오후의 노을빛이 들어왔다. 날름대는 붉은빛이 온 사면이 금빛으로 칠해진 화려한 집무실 안을 불그죽죽하게 물들였다. 그 속에 고고히 앉아 만년필을 놀리는 아더의 금빛 머리카락 또한 같은 색으로 덧입혀져 가고 있었다.

“동행은.”

“몰리 공작부인께서 오셨습니다.”

몰리 공작부인이란 말에 거침없이 종이 위를 휘갈기던 펜촉이 멈칫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게 하던 일에 골몰했다.

“…그래.”

그 정도가 아더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수행인이 복도 바깥으로 나가자, 아더는 깊게 팬 미간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그런다고 사라질 잡념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해 보는 의미 없는 짓이었다.

조금 전, 콜린스가 석방됐다.

굳이 재차 법정을 여는 수고로움까지 겪지 않고도 제 선에서 해결한 터였다. 아더 황자는 불가능해도, 아더 황제에겐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석방 사유야 입에 맞는 대로 붙이면 될 터였지만, 그 이후에 쓰게 남을 죄책감은 머릿속을 가득 메운 잡념보다도 지우기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후우….”

답답해진 타이를 느슨하게 만들려던 손이 또다시 주춤거렸다. 언제라도 저 바깥에서 대신들이 알현을 요청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결국 단단히 옥죄인 타이의 매듭을 매만지던 손은 허공으로 툭 떨어졌다.

창밖에서부터 저를 삼킬 듯이 덮쳐오는 노을빛이 아름답기보단 징그럽게 느껴졌다. 그 혈기 오른 하늘빛에 문득 전장을 휘젓던 데베르의 얼굴이 겹쳐 아더는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지독한 데베르 새끼.”

데베르 공작은 잘난 제 별명에 흠집이라도 갈세라, 급히 웨인을 떠나면서도 그들 사이의 해결해야 할 일들을 제대로 마무리 짓고 떠났다. 삼 주 안에 돌아올 테니, 디데이를 잊지 말라는 오만한 경고까지 덧붙이면서.

황제 즉위식의 첩자 사건 이후 아슬아슬한 평화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이 평화의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갑갑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지막….”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댄 아더는 손을 들어 제 눈가를 가렸다. 어둡게 그늘진 눈가에 숨길 수 없는 짙은 근심이 떠올랐지만 찰나였다. 곧 멀끔한 젊은 황제의 얼굴을 한 그는 으레 그렇듯 사교적인 미소를 매단 채 집무실 문을 나섰다.

갑작스런 황제의 방문에 별궁이 소란스러워졌다. 제멋대로 기강이 흐트러진 하녀들이 다급하게 벨을 찾아댔다. 찾아오는 손님도 일절 없는 데다, 아더의 근신령 이후 공주까지 답지 않게 잠잠해진 탓이었다.

졸지에 별궁 로비 입구에서부터 발이 묶인 아더의 눈썹이 탐탁지 않은 감정을 담아 모여들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뭐 하는 짓이지.”

머리를 조아린 벨의 위로 엄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공주님은 몸이 좋지 않으셔서 지금 주무시고 계십니다.”

“몸이 좋지 않아…?”

슬쩍 고개를 기울인 아더는 여전히 숙인 고개를 들지 않는 벨의 전신을 기민하게 뜯어봤다. 유독 라프넬이 끼고 도는 하녀인 줄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물론, 이따금 쓸데없는 짓도 함께 한다는 것은 알면서도 모른 척해주던 부분이었고.

“직접 확인하지.”

한 발을 내딛는 아더의 앞을 다시금 벨의 작은 몸뚱이가 가로막았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공주님께서 그 누구의 출입도 허락지 말라 하셔서요.”

“내가 넥서스에서 허락을 구해야 하는 이가 있었던가.”

하. 기가 찬다는 듯한 탄식이 들려오는 순간, 짐짓 태연하게 굴던 벨의 어깨도 움칠했으나 노련한 그녀는 곧바로 매끄러운 대답을 흘려냈다.

“공주님께서… 월경 중이시라, 거동도 만남도 불편하신 듯합니다.”

“충성스러운 하녀 역할은 그쯤이면 충분한 듯싶군.”

“폐하!”

아더는 가볍게 벨을 지나쳐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아연실색한 벨이 급히 뒤따라갔지만, 아직은 황제의 정체성보다 사령관의 정체성이 더 강한 그를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순식간에 침실 문 앞까지 가, 문고리를 부술 듯이 여는 아더를 막을 만한 여인은 그곳에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들이지 말도록.”

별궁 사람들을 향한 그의 불신을 대변하듯 문이 굳게 잠기는 소리가 이어졌다.

실로 오랜만에 찾은 라프넬의 침실은 그간의 소란이 무색할 만큼 적막하기만 했다.

“라프넬.”

아더는 쓸데없이 웅성거리는 바깥소리는 귓등으로 넘긴 채, 침대 위에 누운 작은 인영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정말 잠이라도 든 건지 그의 부름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푸른 눈동자가 빠르게 침실을 죽 훑어나갔다. 그러다 라프넬과 칼론이 한데 엉켜있던 소파를 발견한 찰나엔 역겨움이라도 밀려온 것처럼 짧은 침음을 삼켜냈다.

별다른 외부인의 흔적이 없다는 걸 확인한 이후에야 그는 굳은 듯이 문가에 머물러 있던 걸음을 뗄 수 있었다.

“안 자는 거 알아.”

유난히 너른 침대의 끄트머리에 앉은 아더는 제 두 손을 맞잡았다. 잔뜩 힘이 들어간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흉하게 올라오는 게 보였지만, 우악스러운 힘은 점점 더 거세게 손마디를 조여와 얼핏 스스로를 고문하는 것처럼 보였다.

“…고비는 다 넘겼어. 이제 정말, 마지막이야.”

차차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침실 안엔 부드러운 아더의 음성만이 맴돌았다.

“우리 둘 다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단 뜻이야.”

허공을 떠도는 말 중 제 진심만큼은 깊이 가라앉길 바라며 아더는 차근히 말을 이어갔다.

“모든 일이 끝나면 네가 어릴 때 늘 가고 싶어 하던 아르젠도 가보자. 동부의 가장 아름다운 소국이란 별명이 진짜인지 항상 궁금해했잖아. 안 그래?”

약간의 웃음기 섞인 그의 물음에도, 침실은 마치 아더 홀로 있는 것처럼 냉랭하기만 했다.

침묵을 지키던 그의 고개가 어깨 아래로 푹 떨구어지자,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가 침실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아무 가치도 없는… 고작 너 따위를 살리기 위한 거라고 말했던 거, 기억나?”

겨우 목구멍 사이로 게워낸 고백이 혓바늘처럼 돋아나 입 안을 까슬거렸다.

“실수였어. 그런 말을 한 건.”

갖가지 대의를 들먹이며 무수히도 들어 올린 날 선 칼과 차가운 총구보다, 라프넬에게 던진 잔인한 말의 모서리가 언젠가부터 그의 가슴 밑바닥을 찔러댔다. 결국 실토하듯 꺼낸 이 말조차 제 죄책감을 덜기 위한 이기적인 짓일지언정, 그래도 한 번쯤은 바로잡고 싶었다.

“후회하지 않아. 널 위해 그런 거니까.”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아더는 자신과 닮은 라프넬의 금빛 머리칼을 꽤 오래 지켜보다 등을 돌렸다.

잠긴 문고리를 열기 전, 다시 한번 전하지 못했던 속엣말을 꺼냈다.

“…아마 앞으로도 난, 그럴 거야.”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자백이었다.

문을 연 아더는 환히 비쳐드는 복도의 조명에 잠시 인상을 찌푸리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단 한 번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잘 자, 라프넬.”

환한 별궁을 등지고 후원을 걸어 나가는 아더의 뒤로 질긴 시선 하나가 따라붙었다. 검은 시선은 아더가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하고 나서야 잽싸게 어딘가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수상쩍은 그림자가 숨어든 곳은 불 꺼진 라프넬의 온실 정원이었다.

점점 더 깊숙한 정원으로 숨어드는 그림자를 막을 이는 그곳에 아무도 없었다.

* * *

어둠이 진 번트의 들판 위로 하얀 눈송이가 무수한 꽃잎처럼 떨어져 내렸다. 짙푸른 로브를 뒤집어쓴 베스가 그 위를 지나갈 때마다, 뽀드득거리는 겨울 소리가 발밑에서부터 들려왔다.

샐먼 부인을 보기 위해 어둠이 스러지는 길을 걸어가면서 얼마나 불안했는지 모른다. 혹시나 그녀가 없으면 그 하릴없는 죄책감을 또 어떻게 감내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랬기에 샐먼 부인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는 걸 보던 그때의 안도는 베스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낯설면서도, 소중한 것이었다.

차마 다가가지도 못한 채 멀찍이 창밖에 서서 샐먼 부부 내외가 저녁 먹는 모습을 바라본 게 전부였지만, 베스는 그걸로도 충분히 작별 인사를 했다고 자신을 다독였다.

다행이야.

베스는 그리 생각했다. 한 치의 감정도 남기지 않은 채 번트를 떠날 수 있어 다행이라고.

“하아….”

온기를 담은 하얀 입김이 새카만 밤하늘 위로 퍼져나갔다. 불현듯 베스는 전장에서 군복을 입은 그 남자가 자주 입에 물던 시가를 떠올렸다. 그 매캐하고 독한 향과 짙은 연기 앞에서 속절없이 절망하던 때도 이젠 돌아가지 못할 과거의 한 자락일 뿐이라 생각하니 목이 따끔거렸다.

어젯밤 이후, 데베르는 더 이상 베스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 이전에도 온 적이 있었는지 베스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이후론 오지 않으리란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 남자였다. 그는.

내일 당장 떠나려면 얼른 짐을 싸야지.

어둑한 길 끝의 희미한 빛을 발견한 베스는 더욱 부지런히 걸음을 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장 집으로 들어서려던 그녀의 걸음은 작은 화단 앞에서 멈추고야 말았다.

새하얗게 덮여 있어야 할 화단이 말끔했다. 분명 짧지 않은 외출을 다녀온 지금쯤이면 소복하게 눈이 쌓여 있어야 할 텐데도.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리며 오가던 베스는 아무도 밟지 않은 뜰이 제 발자국으로 엉망이 될 때에서야 문 앞에 놓인 상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상자 위에 놓인 한 다발의 꽃이 생경했다.

흐드러진 하얀 꽃잎 하나하나마다 보랏빛 잉크를 한입씩 먹여놓은 것 같은 그 자태는 꼭 다가올 봄을 한 줌 미리 꺾어온 것만 같았다.

베스는 그대로 쭈그리고 앉아, 상자를 감싼 푸른 리본을 풀기 시작했다. 보라색 꽃과 푸른 리본. 이미 그것만으로도 다녀간 손님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지만, 그래도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상자를 여는 순간. 결국 그녀는 차갑게 달아오른 손 위로 뜨거워진 눈가를 묻을 수밖에 없었다.

[내일.]

본 적 없는 흰 코트 위에 얌전히 놓인 쪽지는, 한때 그녀가 열심히도 제국 병원에서 제 애인에게 엮어 보낸 편지지와 같은 것이었다.

[유일한 번트의 언덕에서.]

왜 하필 지금.

원망 어린 말이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아 얼굴을 더욱 깊숙이 손바닥에 처박을수록, 무릎 위에 놓인 꽃다발에서 풍기는 달큼한 향이 그녀를 괴롭혔다.

모든 게 너무 지나쳤다.

아득할 만큼 풍겨오는 꽃향기도. 스스로가 우스워질 만큼 저를 흔드는 이 남자도.

[베스 제인스 양에게 보내는 마지막 데이트 신청이야.]

심지어 너무 늦게 온 이 답장마저도.

울퉁불퉁한 외벽에 외로이 매달린 램프 불빛이 겨울바람에 쉴 새 없이 깜빡였다.

베스의 마음도 그와 함께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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