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베스.”
기어코 다시 들려오고야 마는 제 이름에 베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창백한 피부와 대비되는 새카만 속눈썹이 꼭 겨울바람이라도 맞은 듯 애처롭게 떨리기 시작했다.
저건 바람 소리야. 바람 소리일 뿐이야. 의미 없는 다짐을 읊조리는 입술도 속눈썹만큼이나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베스.”
제발 내 이름 부르지 마.
전하지도 못할 말이 베스의 가슴 속에 응어리졌다. 엉킬 대로 엉킨 마음속에선 그 어떤 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베스는 그저 문밖의 남자가 떠나 주기를, 아니면 겨울바람이 더 매섭게 내리쳐서 저 남자의 목소리를 감춰주기를, 그조차 안된다면 차라리 귀라도 먹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저 남자 앞에서 그녀의 바람이 이루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는데도. 정말 어리석게도.
“베스, 나 다쳤어.”
오랫동안 사람 손이 닿지 않은 판자문의 군데군데 해진 상처 틈 사이로 남자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당신은 결국 원하는 걸 얻는 사람이지.
베스는 새삼스레 남자에 대한 정의를 새로이 했다. 이런 남자와 고작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뻗대다니. 마른 입술 사이로 탄식 같은 헛웃음이 나왔다.
영원히 그 자리에 굳어 있을 것만 같던 베스의 다리가 뻣뻣하게 문으로 향했다.
다정하게 ‘베스’라고 부르는 나직한 목소리를 향해서. 아주 느릿하게.
차마 열지는 못하겠는지, 문고리만 잡은 채 작은 머리통을 문에 기댔다. 조금 전, 남자의 목소리를 흘렸던 판자의 상처에선 윙윙대는 겨울 소리만 났다. 어쩌면 겨울 소리를 목소리라 착각한 건 아닐까. 항상 겨울과 닮아있던 남자였으니까.
베스는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잡은 문고리를 다시금 고쳐잡았다.
끼익하는 음산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 곳엔 베스가 단 한 번도 잊은 적도, 잊을 수도 없는 남자가 서 있었다.
데베르 클리프.
정말 당신이구나.
짙은 잿빛 머리와 그와 닮은 눈동자. 사나운 듯 우울한 눈매. 굳게 다물린 입술. 선이 뚜렷한 얼굴까지. 마지막으로 본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조금 더 야윈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베스는 자신이 떠난 뒤로 이 남자가 어떤 나날을 보냈는지, 그리고 시간이 남자를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따위는 전혀 알고 싶지 않았다.
보면, 무너질 거다. 또다시. 예전처럼.
집요하게 바라보는 데베르의 시선에 눈을 떨군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정말로 아파.”
내리깐 시선의 끄트머리로 붉은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남자의 손이 들어왔다. 보고 싶지 않은데. 갖은 흉터와 흘러내리는 피로 얼룩진 손이 베스의 손을 잡았다.
말갛다 못해 파리하다 느껴지는 여린 손이 남자의 피로 함께 얼룩져가는데도 베스는 미동이 없었다.
여자는 보고 있되 보고 있지 않았고, 듣고 있되 듣고 있지 않았다.
“베스, 제발.”
그게 더 데베르를 미치게 했다.
데베르의 무릎이 무너지듯 낡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베스의 허리를 안은 그의 팔은 우악스러울 만치 고집스러웠지만, 그 사이로 내뱉는 숨은 사랑을 갈구하는 어린아이처럼 애타게 떨리고 있었다.
불규칙하게 떨어지는 핏방울은 남자를 대신해 울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낡은 마룻바닥의 여린 틈을 놓치지 않고 스며드는 영악한 모습을 베스는 지켜봤다.
이제 평생토록 핏자국을 가지고 살아가겠지. 저 불쌍한 바닥은.
베스는 천천히 제 허리께에 얼굴을 묻은 남자의 머리칼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찬 기운을 머금은 머리카락이 가느다란 손가락에 감겼다 흩어지는 것을 반복할수록, 떨리던 남자의 어깨도 점차 잠잠해져 갔다.
아주 잠깐. 그의 흉터를 지나치지 못했던 처음부터, 그들 사이의 숱한 죽음을 보고도 못 본 척, 모르는 척하고 싶어 하던 제 이기적인 마음까지를 떠올렸다. 하지만 다 지나간 일일 뿐이었다.
말해야 해.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베스의 손길이 멈췄다.
그 순간, 힘이 풀어졌던 데베르의 팔이 다시금 여자의 허리를 세게 휘감았다.
덜 닫힌 문 사이로 다시 한번 매서운 바람이 들이닥치자, 바람을 머금은 베스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이혼해줘요.”
해야 할 말이 있으니까.
“제발.”
당신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자신을 보는 남자와 눈 마주칠 자신이 없어, 베스는 눈꺼풀을 꾹 내리감았다.
“…눈 맞춰줘.”
낮은 울림이 가슴을 타고 올라왔지만, 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화가 난 얼굴을 하고 있을지, 답답하단 얼굴을 하고 있을지. 아니면… 본 적 없는 상처 받은 얼굴을 하고 있을지.
“마음이, 다 닳았어?”
하지만 단 한 번도 떠올려보지 않은 낯선 물음이 결국은 그를 바라보게 했다.
데베르는 그제야 눈을 마주치는 여자를 질기게 올려다봤다. 애정을 받아먹는 짐승처럼 악착스럽게도 시선의 끝을 좇았다.
잔뜩 충혈된 잿빛 눈은 슬퍼하지도, 분노하지도 않았다. 그저, 딱 그의 눈동자 색깔처럼 짙은 잿빛을 띠고만 있었다. 그게 어떤 마음인지 베스로선 알 수 없었다.
“더는, 남겨놓은 마음이 없어?”
잠시 말을 멈추는 사이, 데베르의 목울대가 짧게 울렁였다.
어렴풋이 알고 있던 사실을 확인받기란 생각보다 훨씬 잔인한 일이었다.
베스가 떠난 이후. 여자가 어디로 떠나든 언제든 찾아내리라 확신했다. 그게 일 년이 걸리건, 십 년이 걸리건 기필코, 또다시. 지겹게도 이 여자를 되찾아 괴롭히리라 다짐했다. 그가 없는 곳에서 마음껏 숨 쉰 만큼, 남은 숨통은 제가 차지하리라 되뇌었다. 그 생각을 하며 잠들지 못하는 밤을 버텨냈는데….
그러나 다시금 눈이 쌓여 모든 흔적이 지워진 숲길을 걸어 내려가던 그때, 깨달았다.
나는 지금 두렵구나. 네가 멀리 갔을까 봐. 어쩌면 그곳이 영영 닿지 못하는 곳일까 봐.
그래서 따뜻한 빛이 쏟아져 나오는 그 집을 보는 순간 안도했다. 적어도 내게 남겨놓은 마음이 한 자락쯤은 있겠구나, 하는 그런 미친 듯한 안도였다.
날이 밝으면 언제나 베스를 만나러 갔다. 한 번쯤은 눈이 마주칠 수도 있으리라, 헛된 마음도 품어가며. 그러나 여자는 마치 여기에 그토록 증오하는 가문의 남자가 서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없는 곳에서 미소 짓는 얼굴이 반짝일 때마다 그는 비참해졌지만, 때론 따라 웃은 적도 있었다. 엉성한 손길로 부지런히 화단을 파내는 걸 보던 날엔, 꼭 그는 알지 못할 소녀 시절의 베스를 본 것만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제 곁에 있을 땐 흘러내리는 눈물방울만큼 말라가는 것 같던 여자의 얼굴에 생기가 돌고, 파리하던 뺨이 발그레해지고, 별 이유 없이도 웃는 날이 많아지는 걸 보며 데베르는 비로소 자신이 실패했음을 절감했다.
“한 방울쯤은 있을 수 있잖아.”
베스 제인스는 데베르 클리프의 사랑스러운 실패였다.
“적선하듯, 한 방울쯤은 떨어뜨려 줄 수도 있는 거잖아.”
베스는 그답지 않은 말을 하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간절한 애원이라기엔 지나치게 담담한 목소리였고, 무감한 마음이라기엔 그가 내쉬는 숨이 너무도 뜨거웠다.
당신은 이러면 안 되는데. 늘 그렇듯 오만한 얼굴을 하며 나를 기만해야 하는데.
까만 눈망울에 매달린 눈물이 떨어질 듯 말 듯 위태롭게 일렁이자, 데베르는 허탈감 섞인 긴 숨을 뱉어냈다.
화가 난다.
오직 그만이 알아야 할 보잘것없는 속내가 불현듯 터질 듯이 목구멍을 꽉 메어 왔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 널 사랑하는 것들이 너무도 많은 게 매번 화가 난다. 내게 와야 하는 널, 자꾸만 뒤돌아보게 하는 것들이 그런 것들이겠지 싶어져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답도 없이 저열해지는 마음을 누르고. 또 누르고. 그럼에도 숨기지 못하고 튀어나오는 것들에 겁먹은 너를 볼 때면 어쩔 수 없이 또 화가 나고. 차라리 이럴 바엔. 널 사랑하는 수많은 것 중 하나밖에 되지 못할 바엔….
더 닿을 곳도 없을 만큼 강하게 베스를 끌어안자, 작게 달싹이는 그의 입술이 마른 뱃가죽에 닿았다 사라졌다.
“…이 세상에서 널 미워하는 유일한 사람이 될까.”
하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란 걸 잘 알았다.
증오한다 생각하던 순간에도 그는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설령 정말 베스가 껍데기만 지닌 채 그를 찾아와 죽이려 한 첩자일지라도. 아둔하게도. 눈이 멀어서는.
“….”
데베르는 덫처럼 작은 몸을 옭아매고 있던 제 팔을 풀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토록 오랜 시간 욕망한 얼굴이 마음만 먹으면 닿을 곳에서 보이는데도, 정작 여자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겁먹은 눈을 하고 있으려나.
여전히 핏물이 흘러내리는 손을 힘껏 움켜쥐자, 이젠 하얗게 돋아난 뼈마디를 타고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더는 이런 영악이 통하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했다. 너는 매일같이 진흙 따위 모르는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나지만, 아직 우리는 여전한 진창 속에 있다고 믿고 싶어서.
그 생각이 스치자 참지 못한 조소가 픽, 새 나왔다.
저는 미친 게 분명하리라. 낙원에 데려갈 수 없어 진창에 머물자면서도 죄책감 한 번 느끼지 않는 마음이니.
“그래. 네 뜻은 알았어.”
데베르는 바닥에 널브러진 불 꺼진 장작개비를 일별했다. 이를 꽉 깨문 채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시자, 판판하던 셔츠의 가슴팍이 감추려는 감정의 크기만큼 팽팽하게 벌어졌다.
“아직은 넌, 클리프 부인이야. 내겐 아내를 보호해야 할 넥서스 귀족의 의무와 책임이 있어. 또다시 저런 짓을 하면. 그리고 그런 짓을 하면.”
‘저런 짓’에 그의 눈동자가 비틀어진 장작개비를 향했고, ‘그런 짓’에 붕대가 매인 베스의 손을 향했다. 마지막 보고를 올리는 군인처럼, 그는 멈추지 않고 피가 새 나오는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난 막아. 그게 내 품위를 지키는 길이니까.”
흐트러진 재를 쓸어 담듯 저 자신을 가다듬는 남자를, 베스는 하릴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봤다.
오두막을 나서는 널찍한 등 뒤로 사납게 눈보라가 쳤다.
그는 매일 밤 베스가 소년을 기다리던 어두운 숲길 너머로 작아져 갔다.
긴 꿈이 드디어 끝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긴긴 겨울이 짙어지는 그런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