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도망친 밤-166화 (166/206)

166화

흉터가 남겠구나.

잠든 베스의 손에 소독약을 바르고, 붕대를 매며 데베르는 생각했다. 그사이 조금 더 능숙해진 그의 손길 아래 매인 매듭이 작은 손안에 마침표처럼 찍혔다.

웨인에서 베스의 손바닥에 생긴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다. 고작 사나흘 치료를 소홀히 했는데도 덧이 난 걸 보면, 유리 조각을 쥐고 울던 그날의 여자는 제법 독한 마음을 가졌나 보다.

“네가 좋아할 만한 선물이 저 밖에 있는데.”

하얀 얼굴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몇 가닥을 거둬내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그토록 거부하는 남자가, 감히 또 제 침대맡에 있는지도 모르고 무방비하게 잠든 모습을 보자 불쑥 욕심이 치밀었다. 저 말간 뺨을 한 번만 더 눌러보고, 가느다란 어깨를 마지막으로 안아볼까, 하는 그런 지질한 욕심.

하지만 참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마지막이 아닐 테니.

“날씨가 지금이라도 변덕을 부렸으면 좋겠어.”

제 저열한 속내는 여전히 이 여자의 주위를 질척거리며 서성이고 있었지만, 당분간만. 마침 날이 좋은 고작 하루 정도만 숨겨볼 생각이었다.

“잘 자, 베스.”

그는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애쓰며 다시 서재의 제 자리로 돌아왔다.

동이 터오고 있었다. 베스가 일어날 것이다. 손에 매인 새 붕대를 보고 잠시 인상을 찌푸릴 수도 있겠지만, 곧 웃겠지. 굳게 잠겨 있던 성문의 잠금쇠는 간밤에 이미 풀려 있었다.

이젠 느긋이 기다릴 때였다.

부지런히 다가오는 먼 하늘의 여명을 지켜보고, 짙은 어둠이 장막 걷히듯 차차 지워지는 그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고 그 속에 등장할 제 사랑스런 여자를.

마침내 새하얀 눈밭 위를 밟는 나풀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보는 순간. 데베르는 시간이 멈춘 듯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이런 제 꼴을 베스가 보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못난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아 움칠거리는 손은 바지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순백의 공간에 오직 베스의 발자국만이 찍혔다.

커다란 정원을 가로질러 성문까지 가는 걸음이 익숙했다. 습관처럼 철문을 쥐고 흔드는 작은 뒤통수가 멈칫하더니 갑자기 뒤를 돌아봤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아귀처럼 틈 없이 맞물려 있던 양쪽 성문 사이에 난 틈이 보였다.

아. 데베르는 제 얕은수가 들킨 것에 대해 실소했다.

잠금쇠는 풀되, 성문은 밀어놓지 않았다.

혹시나 늘 그렇듯. 베스가 그의 예상을 벗어나, 오늘은 저 보기 싫은 철문을 확인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티 없는 얼굴이 창 안의 그를 책망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베스는 성안의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날이 점점 밝아온다.

“가지 마.”

그 속삭임이 들리기라도 한 것처럼 여자는 다시금 성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급히 시선을 떨군 데베르는 집사를 불렀다.

“네, 공작님.”

“오늘 하루, 성문을 출입하는 모든 이들은 전정 우편으로 돌아서 들어오게끔 하세요.”

“그러겠습니다.”

다시 시선을 옮겼을 땐, 발자국의 주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날이 따뜻해 성문을 열었을 뿐이다. 성안의 사람들과 성 밖의 손님들을 위해.

데베르는 그 사실을 되뇌었다.

데베르가 서재를 나선 건 짙은 보랏빛이던 하늘이 감색으로 물들 무렵이었다. 더 지체했다간 사위를 구분하지 못할 만큼 컴컴한 어둠이 올 게 자명했다.

간만에 활짝 열린 클리프 성문을 통해 그동안 밀린 곡물 수레며 수송 차량 같은 것들이 줄기차게 들어왔지만, 집사의 지시 덕에 성의 왼편은 앞서 걸어간 베스 외에는 그 누구의 걸음도 닿지 않았다.

데베르는 간간이 날린 눈발에 얼추 지워진 베스의 발자국을 하나씩 되밟으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참 작은 발이었다. 보폭 또한 크지 않았고. 어떻게 이런 발 모양을 하고 그 먼 길을 내달렸을까 싶어질 정도로 유약하지만, 한편으론 그만큼 고집스러운 발. 그 걸음을 뒤쫓는 건 생각보다 금세 끝났다.

분명 여기까진 베스의 흔적밖에 없었는데.

열린 성문 앞에 서자 두서없이 찍힌 바퀴 자국과 각자 크기가 다른 발자국이 어지럽게 뒤섞여, 그 길을 가장 먼저 밟았을 여자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동화가 끝나는 경계선을 밟은 듯한 그곳에서 데베르는 궁금해졌다.

내가 이 문을 열기까지 고민했던 것처럼, 너도 이 문을 나서는 걸 조금은 망설였을까.

그때, 네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라 독촉이라도 하듯 머리 위로 흩날리던 눈발이 돌연 거세졌다.

이제야. 심상한 소회를 읊조린 그는 갑작스레 퍼붓는 눈발을 잠시 지켜보다 등을 돌렸다.

뒤늦게 성질을 부리는 눈발이 두 사람의 발자국을 남김없이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영영 서로를 찾지 못하게 하리라, 다짐이라도 한 것처럼.

* * *

머릿속이 늘 몽롱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잠은 현실감을 모호하게 만들었고, 지금이 꿈인지 현실인지조차 인지하기 어렵게 했다.

처음엔 너무 많이 울어 자신이 조금 멍청해진 것일 수도 있다 생각했다.

그녀가 울 때마다 나직이 한숨을 쉬거나 표정을 굳히는 데베르를 볼 때면 속상함도 밀려왔다. 하지만 그 감정마저도 어느 순간 무디어졌다. 점점 그 남자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날이 언제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꿈속에서 본 건지. 아니면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본 건지.

묻고 싶을 때도 있었으나 솜이라도 가득 찬 것처럼 갑갑한 목구멍은 언제나 그를 지나칠 때까지 열리지 않았다.

어젯밤도 마찬가지였다.

‘네가 좋아할 만한 선물이 저 밖에 있는데.’

선물. 지나치게 낯간지러운 단어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날씨가 지금이라도 변덕을 부렸으면 좋겠어.’

날씨가 나빠지면 받지 못하는 선물인가.

답답하게 무언가에 매인 손바닥을 움찔거리고 싶었지만 그러면 뒷말을 듣지 못할 것 같았다.

선물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잘 자, 베스.’

이것도 꿈이구나.

약간의 실망감이 울렁거리는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정말 선물을 주는 줄 알았는데.

까마득하게 감긴 새카만 세상을, 애써 눈꺼풀을 들어 올려 벗어나면 희미한 여명이 보였다. 그러면 습관처럼 그 빛을 따라 걸어 나갔다.

열리지 않을 게 분명한 철문을 매일 아침 흔들어보는 것은 하루를 확인받는 나름의 방법이었다.

차갑디차가운 철문을 맨손으로 쥘 때마다. 그리하여 상처 난 손바닥의 패인 흉터를 통해 그 냉기가 전해질 때마다. 또 지난한 하루가 지나가고, 다음날이 밝았음을 깨달았다.

오늘도 똑같았다.

그저 잡고. 약간의 힘을 실어보는.

“….”

별다른 것 없는 날이었는데. 정말 그랬는데.

한없이 견고하던 철문이 스르륵 밀려나는 순간. 삽시간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올라왔다. 도저히 믿기지 않아 딱 한 뼘만큼 벌어진 성문 사이에 손을 집어넣어 봤다. 성 밖의 세상이, 그토록 원하던 클리프를 벗어난 세상이 손에 닿았다.

어째서.

열렸다는 기쁨보다 의문이 먼저 들었다. 늘 매캐한 연기가 가득 찬 것처럼 흐릿하던 머릿속을 헤치고 단 하나의 이름만이 떠올랐다.

데베르.

뒤를 돌아보자, 눈동자는 이미 갈 곳을 알고 있었다는 듯 그가 있을 클리프 성 높은 곳을 향해 서서히 올라갔다.

김이 서린 창 너머에 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남자라면 보고 있을 것 같았다.

한참을 보이는 것 없는 유리창을 올려다보던 베스는 ‘안녕’ 소리 없이 벙긋거리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잘 떼지지 않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클리프 성에서부터 이어지는 숲길은 아무도 밟지 않아 새하얗기만 했다.

그 길을 눈에 담는 순간부터 억지로 울음을 눌러 내리느라 가슴팍이 꼴사납게 들썩였고, 메마른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아마 그 남자가 보았다면 또 인상을 찌푸렸을 것이다.

“흐으… 흑, 흐윽.”

정말 이젠 다 울어서 눈물조차 없는 게 당연한데. 그토록 바란 순간에 왜 이리도 눈물이 나는지.

엄마를 살리기 위해 정신없이 번트를 내달리던 어린 소녀는 지금도 울면서 그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더 이상 쫓아오는 사람도, 지킬 사람도 없으면서 뭐가 그리 서럽다고.

“으흑, 흑….”

그때보다 옷도 훨씬 따뜻하고, 배도 부르고, 키도 컸는데.

베스는 어느새 데베르와 헤어진 일고여덟 살 무렵으로 돌아가 있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만나지 못할 소년을 멋모르고 기다리던 어린 날과 달리 더는 그 애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란 점이었다.

그들 사이엔 너무나 많은 것이 끼어들었다.

돌이켜보면 항상 과거가 더 좋았다.

어린 날의 오두막이 전방으로 향하는 숲길에서의 재회보다 좋았고.

쏟아지는 총알을 비해 서로를 껴안고 언덕을 나뒹굴던 먼지 속이 웨인의 화려한 데뷔탕트 연회장보다 좋았으며.

말도 안 되는 애인 노릇을 운운하며 서로의 곁을 맴돌던 여름날이 원치 않는 비밀을 모두 알게 된 가을보다 좋았다.

아마, 시린 이 겨울도 언젠가 다가올 봄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래. 그럴 것이다.

그 남자의 곁에 머무는 대가로 맞이할 나쁜 미래를 두려워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지겨웠으니까.

거칠게 눈가를 닦아내던 베스는 제 앞에 있는 낯익은 집을 보곤 또다시 눈물을 터뜨렸다.

결국은 이곳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나무 냄새가 오랜 시간 집을 떠난 딸아이를 반겼다. 이미 다 커서 돌아온 딸이 서운하지도 않은지 집은 여전히 그때의 온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감히. 여기는 내 집이 아니라고 했다.

내 집은 이럴 리가 없다며 외면하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했다.

다락방을 엉금거리며 올라가던 베스는 이곳을 잽싸게 오르내리던 기억 속의 아이가 얼마나 자그마했는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때는 한없이 높아 보이던 이곳이 얼마나 낮은지도.

온갖 비밀의 무게를 짊어진 어린 그녀의 어머니도 겁이 났을 것이다. 그 두려움이 못내 와닿아 어깨를 떨던 베스는 가만히 창문 아래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적당한 적막이 지친 딸의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다녀, 왔어요….”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낯선 인사를 밤 인사 삼아 잠이 들었다.

집에 돌아왔으니 모든 게 괜찮을 것 같았다.

잊어도… 이젠 정말 괜찮을 것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