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흐읍….”
돌아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베스는 입술 사이로 허옇게 피어오르는 입김이라도 막아보려, 불규칙하게 튀어나오는 날숨을 막았다. 숨을 꾹 참은 채 쌓인 눈 사이에 파묻힌 발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채 한 발을 떼기도 전에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은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
안 돼.
그때부터 베스는 뒤에 늑대라도 쫓아오는 것처럼 미친 듯이 눈 덮인 산을 헤집으며 뛰어가기 시작했다. 따라오는 걸음은 그녀보다 훨씬 느긋했고, 느렸다.
갑자기 들리지 않는 발소리에 뒤를 돌아본 베스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전략적으로 약간 더 높은 사선 방향으로 올라간 시커먼 인영 하나가 이젠 그녀를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베스는 생각할 새도 없이 몸을 홱 돌려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내리는 눈발에 부딪힌 얼굴이 얼얼했고, 퉁퉁 부은 발은 감각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멈출 순 없었다.
“헉, 헉. 흐윽….”
데베르는 어둠 위에 하얗게 그려지는 베스의 입김만 보고도 이 막막한 새벽을 헤쳐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자신이 향하는 곳이 도망쳐온 클리프 성이란 것도 모르고 달려대는 여자의 새벽은 그로 인해 영원히 어두운 듯했지만.
그 비참함도 잠시. 발아래의 클리프 성을 그제야 알아본 여자의 걸음이 느려졌다.
“베스.”
마침내 데베르는 참아온 이름을 불러볼 수 있었다.
하지만 베스가 돌아보는 순간. 아주 잠시 그 선택을 후회했다. 부르지 말걸. 그냥 못 본 척 안아 들고 그대로 성으로 돌아갈걸. 그러나 온갖 희망은 다 죽어버린 듯이 원망 어린 시선 또한 그의 몫이었다.
다가온 남자가 자연스레 허리를 감고 안아 들 자세를 취하자, 베스는 그의 손을 힘없이 쳐냈다.
“…내 발로 가요.”
묘한 동행이었다.
헐벗은 거나 다름없는 베스의 몸 위로 데베르의 코트가 덮였다. 순간 베스는 갑작스런 온기에, 정확히는 끼쳐 드는 데베르의 온기에 멈칫했지만 구태여 코트를 집어 던지는 짓은 하지 않았다.
전부 의미 없는 짓일 뿐인데.
성안으로 들어오자 아까 전 음식이 가득 찬 테이블을 다시 마주했을 때처럼, 한 치도 달라진 것 없는 침실의 풍경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중없이 쏟아지는 졸음에 탈력감 어린 몸이 쓰러지듯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의 발치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싫어요.”
시뻘겋게 퉁퉁 부은 발을 남자의 뜨거운 손이 움켜잡았다. 참 쓸데없이 큰 손이었다. 아, 그는 군인이니 쓸모없진 않으려나.
베스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제 손의 온기로 언 발을 녹이는 데베르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다시 보니 그의 속눈썹도 내린 눈발에 흠뻑 젖어 있었다.
“싫어.”
그는 귀라도 먹은 것처럼 얼어붙은 발만 주물러댔다.
“싫, 다고.”
베스는 올라오는 울음기가 티 날세라 내뱉는 한 음절, 한 음절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래도 그가 요지부동이자 붙잡힌 발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남자의 손아귀 힘에 막혀, 허벅지만 달싹거리는 게 전부였다.
“참아.”
돌아온 대답은 그게 전부였다.
뜨거운 물을 가져와 베스의 발을 담그고 나서야 데베르는 시선을 올렸다. 날카로운 잔가지와 덤불에 잔뜩 할퀴어진 허벅지, 쥐면 부러질 것 같은 허리, 희미하게 오르내리는 가슴팍을 지나면. 이젠 저를 향한 원망을 온전히 받아낼 시간이었다.
새카만 눈동자가 그를 심판했다.
“포로처럼 굴면 잡힌다고 했잖아.”
뚝뚝 소리 없이 울고 있는 베스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냈다.
조금만 강하게 밀어붙이면 두렵다고 움츠러들고, 약간만 무르게 굴면 호시탐탐 틈만 노리다 달아나고. 분명 여자는 그에게 흔들린다 생각하겠지만 정작 답 없이 휘청이는 건, 이 자그마한 여자만 바라보는 데베르였다.
대체 내가 널 어떻게 대해야 할까.
“울지 말라고 해도 울 테지. 넌 내 말은 죽어도 듣지 않으니까.”
저 작은 몸 어디에 그리도 많은 눈물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그의 앞에서만 그러는 것인지. 끝도 없이 우는 베스를 보며 데베르는 한숨을 쉬었다.
“그럼 울어. 계속. 질리도록.”
늘 청개구리처럼 구니까. 넌 항상 내 예상을 벗어나려 안달 난 듯이 구니까.
차라리 울라고 하면 울지 않을까 싶어 한 말이지만, 그 말에 여린 여자는 더 눈물을 쏟아냈다. 소리 내지 않는 게 마지막 반항이기라도 한 것처럼 입술을 꾹 깨문 채.
“너한테 아기가 특별하다는 걸 알아. 나도 슬퍼. 우리 사이의 증명이잖아.”
아기라는 말에 베스는 결국 참지 못한 울음소리를 흘렸다.
서럽게도 히끅거리는 어깨를 쓰다듬으며 데베르는 말을 이어갔다.
“모든 건 끝났어. 네가 돌아보지만 않으면 될 문제야. 우린 젊고, 널 닮은 아이는 앞으로 몇 명이든 더 태어날 수 있어. 내가 죽일 듯이 미워 싫다면, 날 닮은 아이는 결코 태어나지 않게 해달라 빌기라도 할게. 물론, 네가 원한다면 단 한 명의 클리프도 더 생겨나지 않을 거야.”
또 다른 클리프라니. 베스는 허탈감 섞인 헛숨을 터트렸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란 걸 안다. 무책임할지언정 올리비아의 딸인 제 잘못도, 카시우스의 아들인 그의 잘못도 아닐 테니.
하지만 우리 사이에 일어난 숱한 죽음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
베스는 그럴 수 없다 결론지었다.
“저는….”
단 한 번도 그녀의 애원을 들어주지 않는 남자에게 더 매달릴 힘도 없었다.
언제나 제 몸뚱이 하나 건져 올릴 만큼의 팔 힘도 없었기에 일을 그르쳐 온 세월 아닌가. 어머니를 방치하고, 할멈을 잃고, 루카를 잊으려 애쓰다 결국은 찾아온 작은 생명마저 놓쳐버린 그런 보잘것없는 삶.
무고한 피들을 밟고 선 채로 이 남자를 보며 사랑을 속삭일 수는 없었다.
“무서워….”
그가 상처 입은 척, 제 목줄을 잡기 위해 읊조린 잔인한 말을 베스도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진심이었다.
다가올 또 다른 죽음이 두려웠다. 서로의 곁에 있으면 계속해서 나쁜 일이 생겼으니까.
그리고 이젠. 정말로.
“당신 곁에 있는 게 무서워요….”
서로가 서로에게 살아있는 불운일 뿐이다.
“나는, 살고 싶어요.”
이기적인 진심은 분명 당신을 찌르겠지. 그래도 말해야 한다.
“한 번만 더 살려줘요….”
그때 총탄이 쏟아지는 전장에서 나를 살려줬듯이. 또다시 내가 살아갈 수 있도록.
가녀린 팔이 데베르의 목을 감싸자, 떨리는 숨이 여과 없이 그에게도 와닿았다.
굳게 다물린 데베르의 턱 근육이 선명하게 솟아올랐다. 이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베스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보다, 그걸 듣고 있는 제 귀가 더 의심스러웠다.
저를 안은 팔을 풀어낸 데베르는 눈물로 축축한 베스의 양 뺨을 다정히 쓰다듬었다.
“…약속을 지켜.”
핏발이 선 잿빛 눈동자가 울고 있는 여자를 집요히도 응시했다.
기어코 그의 눈에서 사라지는 게, 닿지도 못할 머나먼 곳으로 떠나는 게 자신이 살아남는 길이라고 고백하는 건방진 입술을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었다.
“나와 함께 진창을 뒹굴기로 했잖아.”
먼동이 트고 있었다.
그들의 새벽은 아직인데도.
* * *
“그, 워낙 약한 몸에 유산까지 겹친 터라. 이리 식사를 거르시면, 아마도….”
데베르는 의사의 뻔한 지껄임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넥서스 지방 어딘가에서 의사 노릇을 하던 그는 갑작스런 고위 귀족의 부름에 얼떨떨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아이는 또 가질 수 있는 건가.”
“아마… 그건….”
의사는 부정적인 소견밖에 말할 것이 없는 이 상황이 곤욕스러웠다.
“올해는 어렵겠지만 부인께서 건강을 많이 회복하신다면-”
베스는 그날 이후, 그를 마주칠 때마다 반사적으로 몸서리를 쳤고, 식사는커녕 물 한 모금도 제대로 삼키지 못했다. 어떻게 탈진해 쓰러진 틈을 타, 입술 새로 물이라도 흘려주는 게 유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잠에서 깬 베스와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시, 싫어요.’
밤중에 침대로 찾아온 공작의 뜻을 곡해한 겁먹은 눈동자에, 데베르는 그때부터 베스가 정신을 차리고 있는 동안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때를 기다리는 건 익숙하고 쉬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그 ‘때’가 영영 오지 않는다면?
“늘어놓는 말이 긴 것 보니 힘든가 보군.”
데베르의 시선이 저 멀리 창밖의 하얀 설원 위를 걸어가는 베스의 뒤를 쫓았다. 어느덧 굳어진 여자의 일과나 다름없었다. 견고히 닫힌 철문을 굳이 흔들어보는 것은.
폭. 폭. 귀엽게도 내딛는 걸음이 다시 그에게로 돌아오는 게 보였다.
오늘은 처음으로 베스가 울지 않은 아침이었다.
집사는 가만히 창밖만 바라보는 그의 젊은 주인을 무거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번트로 와달라는 공작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노년의 집사는 짐을 챙겨 클리프 성으로 왔다.
그 부름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올리버는 데베르가 말할 때까진 침묵을 지켰다.
“베스가 울지 않아요.”
물이 언 분수대 옆에 베스가 앉아있었다. 마치 그림처럼 미동도 없이 벌써 수십 분째였다.
“부인께서 울지 않으시길 원하신 것 아닙니까.”
“그러게요. 그랬는데.”
싱거운 웃음을 흘리는 데베르의 옆선은 웨인에 있을 때보다 더 날카로워져 있었다. 베스를 더 선명히 보기 위해 김이 서린 창을 손바닥으로 닦아냈다.
“식사는 좀 하던가요.”
“네. 수프를 약간 드시긴 하셨습니다.”
“말은요.”
“딱히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한결 편해 보이던가요.”
집사의 존재는 그의 삶에 몇 안 되는, 어쩌면 유일할 무딘 부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봐, 베스.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이 널 괴롭히지는 않아. 그 말을 대신하고 싶었다.
베스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조차 싫어할 테니.
“답이 없으신 걸 보니 저와 있을 때보단 편해 보였나 보네요.”
집사는 데베르를 잘 알았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카시우스를 닮았는지도 잘 알았다. 그렇기에 제 손으론 절대 저 여자를 놓지 않을 남자란 것 또한.
“공작님, 오늘은 날씨가 제법 따뜻하군요.”
데베르는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시선을 잠시 옮겨 희끄무레한 하늘을 쳐다봤다. 날씨라. 번트에 도착한 이후 단 한 번도 궁금치 않았던 것이었다. 제 시선은 늘 베스의 뒤통수에 붙어 있었으니까.
“한동안 성문을 열지 않으셔서 샛문으로 들어오느라 고생을 좀 했습니다.”
“수고가 많으셨네요.”
미미한 미소가 데베르의 얼굴에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간혹 변덕스런 넥서스의 겨울 날씨는 유독 따뜻하게 굴 때가 있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인 모양이었다.
“눈 녹은 물이 다시 얼면, 꽤 오랫동안 성의 출입문을 열기 어려울 겁니다.”
데베르는 꼭 그 말이 저 여자의 눈물이 얼어붙으면, 다시는 제게 마음을 열지 않을 것이란 말로 들렸다.
잔뜩 풀이 죽은 검은 점이 성안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까무룩 이른 잠이 들곤, 날이 밝자마자 저 철문부터 흔들어볼 것이다.
“데베르 공작님, 오늘은 날씨가 유난히 좋고. 그래서 그저, 성문을 열 뿐입니다. 그뿐이에요.”
그뿐이다. 그뿐….
데베르가 슬며시 눈을 감자, 집사는 제 젊은 가주의 고요를 지켜주었다.
하지만 감은 눈 너머로 느껴지는 잔인한 햇살이 자꾸만 그의 선택을 재촉했다. 그래서 슬쩍 한쪽 눈만 떠보았다. 여전히 새하얗고, 쓸쓸한. 베스가 없는 그의 세상을 볼 수 있게끔.
이젠 정말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유난히 햇살이 좋은 겨울날,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을.
“성문을 여세요.”
아직 난 널 놓친 게 아니야. 앞으로도 놓치지 않을 거고. 알잖아. 네 절망을 쫓아 짐승처럼 따라붙을 거란 걸.
그럼에도 내가 이리 구는 건….
“베스가 좋아하겠네요.”
이미 떠나버렸을 네 마음 한 자락이라도 붙잡기 위한, 내 마지막 발악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