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그래, 데베르.”
콜린스란 환영을 벗은 남자가 다정히도 자신을 소개했다.
“기다렸어. 알아봐 주길.”
“아, 아니야.”
성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베스의 몸짓에 테이블 끄트머리에 걸쳐져 있던 바구니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농익은 과육들이 잔뜩 물크러지며, 코를 찌르는 달큰한 냄새가 방 안을 서서히 채웠다.
베스는 질척이는 과즙을 제멋대로 짓밟으며 테이블에서 뒷걸음질 쳤다.
붉은 벽등을 등진 베스의 발치로 그녀의 불안을 대변하듯 검은 그림자가 흔들렸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베스를 마주 보는 데베르의 발치에도 그녀를 닮은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흐늘거렸다. 그러나 결코 닿지 못하는 두 그림자는 두 사람의 관계를 흉내 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려운 일은 아니더군.”
어울리지 않는 달콤함과 따뜻함으로 가득 찬 방 안에서, 데베르의 냉정한 목소리가 흐릿한 정신을 일깨웠다. 베스는 온통 비현실적인 것투성이인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현실감을 갖고 움직이는 그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생각보다는.”
데베르는 베스의 입가를 닦아주느라 단물이 묻어난 제 손을 손수건에 가볍게 닦아냈다.
여자가 돌아오지 않으리란 걸 제복에 매달린 브로치로 확인받은 그 순간부터 데베르는 마치 작전을 수행하는 군인의 태도로 일관했다. 도시를 넘어가는 검문소마다 봉쇄령을 내리고, 웨인에서부터 가장 빠르게 도망쳤을 때 닿을 수 있는 모든 곳을 지도 위에 붉게 동그라미 쳤다.
운이 좋지 않아 수송 차량 따위를 타고 도망쳤을 때를 생각하면 예상보다 범위가 넓긴 했지만, 뒤지지 못할 만큼도 아니었다. 삼 주. 데베르가 판단한 베스를 찾기까지의 최대 기한이었다.
‘도망쳐서 짐마차에 뛰어오를 정도면 그 출생이 알만하다 생각했어.’
언젠가 콜린스가 한 말이 떠오른 건 기막힌 우연이었다. 한껏 경계심을 곤두세운 채 그를 노려보는 여자에겐 끔찍한 일이겠지만.
“만약 사용인들이 이용하는 샛문을 통해 웨인 야산으로 도망쳤다면 일이 조금 꼬였을 거야. 다행히도 너는 그날 유일한 저택의 방문객인 장사꾼들의 짐마차를 타고 도망쳤어, 그렇지?”
답 없이 떨기만 하는 새카만 눈동자에선 선명하게 단 하나의 감정만이 묻어났다.
절망감.
데베르는 아주 잠시 눈을 내리떴다. 그사이에도 닿지 못하는 그의 그림자는 여자의 주위를 어른거리고 있었다.
난 널 찾아 정말, 못내 기뻤는데. 네겐 절망일 뿐이구나.
그다지 놀랍지 않은 소회에 쓴물이 올라왔다.
“그 오두막 옆이 어린 시절 네가 살던 남작가잖아.”
베스는 밀려드는 허망함을 어쩌지 못하고 얼룩진 치맛자락만 붙잡았다. 정말 모든 걸 다 알고 있구나. 그 생각에 기댈 곳 없는 마음이 속절없이 휘청였다.
“분명, 경관이 몇 번이나… 다녀갔는데.”
혼잣말 같은 그녀의 중얼거림에 다소 피곤함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스.”
나직한 부름은 추라도 달린 것처럼 무겁게 베스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포로처럼 굴면 잡혀.”
데베르는 담담히 답했다.
차라리 조금만 더 클리프 부인답게 굴었다면. 오만한 얼굴을 하고, 고고하게 호텔 따위에 들어가 있었다면 여자를 찾는 건 조금 더 어려워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기어이 그를 참담하게 만들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베스는 겁에 질린 모양새로 내뺐다. 그가 얼마나 겁에 질린 것들의 뒷덜미를 잡아채는데 이골이 난 줄도 모르고.
경관들 무리에 섞여 있던 데베르는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어디선가 잔뜩 움츠린 베스가 그의 목소리를 알아채고 도망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오두막에 들어선 멋모르는 경관들은 장작더미나 쳐대다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지만, 데베르는 달랐다. 한 걸음. 딱 그 한 걸음에서 군홧발을 타고 숨은 존재의 무게감이 올라왔다. 그는 말없이 제 발아래를 오래도록 쳐다보았었다. 별다른 것 없는 낡아빠진 마룻바닥 아래, 숨을 죽이고 있을 제 여자를.
“바닥이건, 벽이건 함부로 뚫고 숨어봤자 두드리면 소리가 달라. 그러면 들키는 거고.”
“소리….”
그 징그러운 단어가 또다시 베스의 발목을 붙잡았다. 할 수만 있다면 온 세상을 침묵으로 물들이고 싶었다.
“집이잖아.”
데베르는 조금이라도 베스를 달래기 위해 다정한 목소리를 연기했다. 달게 구슬려 볼 작정이었다. 그리하여 부디, 이 쓸모없는 소모전을 그만하고 그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집에 온 걸 환영해.”
“…여긴 내 집이 아니야.”
베스는 집이란 소리에 황망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데베르는 치밀어오르는 탄식을 겨우 주워 삼킨 채, 솟구치는 울대를 꾹꾹 눌러 내렸다.
“여긴 번트고, 여기가 바로 네 집이야.”
“아냐! 아니라고!”
우욱.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던 베스가 왈칵 몸을 수그렸다.
거긴 내 집이 아니야. 내 집은 그런 시체처럼 죽은 곳이 아니야. 내 집은, 내 집이었던 그곳은 웃음소리가 들리고, 애쓰지 않아도 따스하고….
작은 몸이 연신 들썩이며 구역질했다.
죄스러웠다. 모든 것이.
제 앞으로 다가온 남자를 감히 콜린스 교수라 착각했다. 가장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의 얼굴로 스스로를 기만하고 그의 품에 안겨 이곳까지 왔다. 지금까지 저 하나가 살아남기 위해 치러진 수많은 죽음을 알면서도 기어코 또 살고 싶어서.
“헉, 우욱…!”
얼마나 급하게 삼켜댔는지 덩어리진 과일이며 빵조각들이 형체 그대로 목구멍을 타고 튀어나왔다. 데베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베스가 마지막으로 먹은 과일 한 점마저 게워낼 때까지 함께 무릎을 꿇고 벌게진 등을 두드려주었다.
바닥에 늘어지는 여체를 안아 들고 욕실로 가 엉망이 된 옷을 벗기고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갔다. 그간 얼마나 고생했는지 넝마나 다름없는 원피스가 걸레짝처럼 버려졌다.
“괜찮아.”
괜찮다고. 베스는 자신을 씻기는 그의 손에 맥없이 몸을 맡기면서도, 그가 뱉는 중독 같은 위로를 되뇌었다. 얼굴을 타고 눈물인지, 그저 욕조의 물기인지 모를 것들이 흘러내렸다.
“괜찮아, 베스. 이대로 다 잊으면 돼.”
일렁이는 시야 속으로 물에 젖은 그의 셔츠가 들어왔다. 남자는 옷차림 그대로 욕조에 들어온 건 문제도 되지 않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마치 어떤 성스러운 행위라도 하듯 눈앞의 여자를 깨끗하게 씻기는 데만 골몰한 얼굴이었다.
짧은 목욕을 끝낸 후 부드러운 가운으로 몸을 꽁꽁 감싼 베스를 데베르는 살며시 침대 위에 올려놨다. 베스는 그 와중에도 다시금 코끝을 스치는 단내에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아까 전의 풍경을 재현하기라도 한 것처럼 물기 어린 과일과 김이 나는 빵, 수프 따위가 티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침대 곁에 바짝 붙여진 테이블이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지는 너무도 뻔했다.
“먹어.”
발치에서 들려오는 적막하고 고압적인 목소리를 향해 주춤대며 고개를 돌렸다.
“먹어야지, 베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축축하게 물기로 젖은 남자가 그녀를 올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실린 기이한 열기에 베스는 엉덩이를 뒤로 물렸다. 그래봤자 침대 위일 뿐인데도.
척척한 물 자국을 남기며 다가온 그는 베스의 손에 기어이 스푼을 들렸다.
“살아야지.”
베스는 습기로 달아오른 입술을 깨물며 남자의 뒤편에 있는 문을 쳐다봤다.
잠깐의 숨 막히는 대치가 이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진 않지만 모른 척할 테니 먹어.”
허여멀건 손으로 쓰러지듯 오두막 문을 열고 나오는 베스를 보는 순간. 데베르는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정말 저 여자를 잃을 수도 있었음을 절감했다. 멍청하게도. 눈앞에 뻔히 두고서.
그 아찔함을 또 겪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떻게든 이 여자를 먹이고, 재우고, 숨 쉬게 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마지막이야. 먹어. 베스 제인스.”
잘게 떨리는 스푼이 먹음직스럽게도 모락거리는 수프에 푹 담겼다. 하지만, 채 입술에 닿기도 전에 베스는 발작하듯 헛구역질을 해댔다. 억지로 한 두 스푼을 먹으려 해봐도 결국 목구멍에 닿지도 못하고 가운 위로 떨어졌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린 지금. 베스는 도저히 제 손으로 음식을 삼켜낼 수가 없었다.
오로지 제게 의지했을 배 속의 아기는 지켜내지도 못한 주제에.
텅 빈 배 속을 꾸역꾸역 채워내는 짓은 아까 전 한 번으로 족했다.
“으읍, 싫, 어…!”
엎치락뒤치락하는 두 사람의 손이며 발에 치인 접시들이 두서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개중 몇 개에선 깨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 누구도 침실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무용한 짓의 반복이었다. 여자는 죽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삼키는 음식마다 족족 토해내고, 남자는 살리기로 혈안이 된 사람처럼 스프 다음은 과일, 그다음은 빵을 질리도록 들이대는.
그 짓을 얼마나 반복했을까.
베스는 열린 문 너머 복도의 어슴푸레한 빛을 보고 누인 몸을 바르작거렸다. 제법 시간이 지난 것 같았지만, 창밖은 여전히 어두웠다. 잠깐 잠든 사이 또 그가 갈아입힌 것인지 가운 아래의 슬립은 말끔했고, 미치도록 그녀를 괴롭히던 음식들도 모두 치워져 있었다. 침구에서 풍기는 향긋한 냄새가 이리 오라 손짓하는 듯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빛을 따라 걸어가자, 침실 너머 방 하나에 불이 켜진 게 보였다. 닫힌 문틈으로 새 나오는 데베르의 존재를 얼마간 상기하던 베스는 조심스럽게 등을 돌렸다.
가볍디가벼운 몸은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더듬거리며 시커먼 계단 난간을 짚는 손이 불현듯 떨렸다.
“….”
아주 잠깐. 이 고요한 성안에 홀로 남겨질 그의 뒷모습을 떠올린 탓이었다.
정말 아주 잠깐.
헉, 헉. 터질 듯이 팽창한 심장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뛰어대고 있었고, 자잘한 나뭇가지에 쓸린 팔이며 다리엔 얇은 생채기가 났다.
항간에서 늑대 숲이라 불리는 번트의 숲을 이 새벽에 올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목숨이 두 개 내지는 세 개지 않은 이상.
차라리 늑대에게 물려 죽을지언정, 그 남자의 곁은 안 된다.
그게 이 끝없이 침잠하는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어내는 길이었다.
“윽….”
발을 헛디딘 베스의 몸이 나무 등치로 처박혔다. 거친 나뭇결에 도리 없이 찢어진 슬립 사이로 아릿한 통증과 한기가 동시에 끼쳐 들었지만, 헐레벌떡 몸을 추슬러 걸음을 내디뎠다.
아…! 발목을 찌르는 듯한 통증에 걸음을 멈추는 것도 잠시였다.
가야 해.
절뚝거리는 몸이 쉴 새 없이 기우뚱거리며 산허리를 헤쳐갈 그때였다.
숲을 울리는 바람 소리가 음산했다.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낮고 음울한 진동이 무슨 전갈이라도 전하듯 얇은 슬립 자락을 나부끼고 지나갔다. 베스는 그 불길한 예감을 애써 무시한 채, 얼어붙은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그리고 그 순간.
탕. 귓전을 때리는 발포 소리가 보기 좋게 베스의 바람을 무너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