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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63화 (163/206)

163화

“자, 잘못했어요. 공작님. 용서하세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어느새 거칠한 바닥에 무릎을 꿇은 소피아는 사색이 되어 발발 떨고 있었다.

“무엇을 잘못했다는 거지.”

“그, 그건….”

겁에 질린 다갈색 눈동자가 답을 찾기 위해 쉴새 없이 흔들렸지만, 공포로 굳어버린 이성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사실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알지 못했다. 자신은 그저 가발을 버리려던 것뿐인데. 흉흉한 공작의 기세가 무서워 상황을 모면코자 지껄인 말이 되레 올무가 되었다.

“말해야죠, 소피아 양. 무엇을 잘못했다는 거죠?”

똑같이 고압적인 명령에 존칭이 붙었다.

때론 감정이 실린 고성보다 예우를 갖춘 정갈한 목소리가 더 상대의 불안을 자극한다는 것을 군대장인 그는 잘 알았다.

“소피아 양이 굳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런걸’ 들고 나갈 만한 사정이 있나요.”

‘이런걸’을 말하며 데베르는 발치에 떨어뜨린 가발을 가볍게 구두코로 건드렸다.

소피아는 데베르 공작이 전장에서 잠깐 마주친 제 존재를 안다는 사실에 더 큰 공포가 밀려왔다. 황자와의 비밀이고 나발이고. 있었던 일을 이 귀신같은 남자에게 낱낱이 고백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하리란 건, 어쩌면 당연한 직감이었다.

“그, 그게. 제 것이 아니라….”

제법 자비로운 표정의 데베르는 고개를 까딱여 계속하란 뜻을 전했다. 하지만 압박감에 짓눌린 소피아에게 보이는 거라곤 푸르스름한 새벽빛을 등진 공작의 그림자뿐이었다.

“아더 황자님이 일전에 부탁을 하나 하셨는데…”

범람하는 두려움이 무색하게 고작 두세 문장이면 족한 자백이었다. 아더, 피 검사, 가발을 쓴 밀회. 그 정도면 약간의 비틀어진 오해를 정정하기엔 충분했다.

“공작님께서 갑자기 검은 머리라면 죄다 찾으신다는 얘기에 겁이 나서 그랬어요. 저는 시키신 대로 황자님의 명을 따랐을 뿐입니다. 정말 다른 뜻은 없어요!”

다른 뜻은 없다. 요즘 따라 그 말을 얼마나 자주 들었는지. 데베르는 헛웃음을 지으며 엄지손가락으로 제 눈썹을 문질렀다. 비추어 드는 여명을 따라 고개를 돌린 곳엔 여전히 베스의 흔적이 남은 방이 있었다.

베스와의 나날은 낙원과 진창을 번갈아 뒹구는 전쟁이었다. 그 여자를 향한 비정상적인 애정과 집착에서 기인하는 불안은 언제든 그를 신사로도, 저열한 시정잡배로도 만들 수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저 방에서 믿어주지 않는 그를 향한 서운함에 홀로 훌쩍였을 흰 얼굴을 상상하면. 그토록 증오하는 클리프와 붙어먹은 대가로 생긴 아기를 떠올리며 바느질했을 가느다란 손가락을 떠올리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입 맞추고 끌어안아 그의 담장 안에 영영 가두고 싶었다.

“…버리세요. 보기 좋진 않군요.”

그래. 데베르는 인정했다.

나는 베스 제인스를 잘 모른다.

어쩌면 그 여자에겐 모든 나날이 진창이었을지도.

* * *

천장까지 높이 쌓인 장작더미 뒤에서 작은 인영이 바르작거렸다. 인영의 주인은 베스였다. 눈을 뜰 힘조차 없어 가만히 잠든 얼굴을 한 그녀는 밭은 숨을 고르다가도 움칠, 몸을 떨었다.

내쉬는 숨결조차 폭력이 되는 추위였다.

불이라도 피운다면 좋겠지만, 사람의 발길이 끊긴 외딴 오두막의 불빛을 보고 찾아올 이들을 생각하면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잔뜩 몸을 웅크리고 누운 베스는 본능적으로 제 배를 감싸려다 손을 멈칫했다.

이제 지킬 게 없구나.

공연히 허공을 그러쥐는 손가락 사이사이를 타고 허무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열기에 잠식된 뜨끈한 머리는 밀려드는 상념마저도 곧 태워냈다.

오두막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날이 밝자마자 곧장 산을 넘어 검문소를 피해 갈 작정이었다. 메르딘이라는 나름의 목적지도 정했고, 거기서 가정교사 노릇을 하면 머리 누일 곳도 찾을 수 있으리라, 근거 없는 자신감도 들었다.

하지만 모든 건 속절없이 밀려드는 몽마와 열기에 잠식되고 말았다. 잔인할 만치 옛 기억을 끈질기게 붙든 몸이 이곳을 돌아온 집이라 착각한 탓이었다. 섣부르게 풀린 긴장은 곧 열병이 되어 베스를 찾아왔다.

한두 번 경관들이 오두막 문을 열긴 했지만, 베스는 그때마다 어릴 적 비밀 통로처럼 바닥에 파 놓은 구덩이에 들어가 먼지 쌓인 천을 머리 위로 둘렀다. 그러면 바짝 마른 몸은 오두막과 한 몸처럼 스며들어 이곳을 제대로 모르는 불청객들은 그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해봤자 장작더미나 툭툭 치다가 가는 것이다.

“며칠 전에 왔다 간 거 아니었수? 그 검은 머리카락은 아직 못 찾았는가?”

“예, 뭐. 지시가 있어서 번트에 더 머물 예정입니다. 일단 젊은 여자가 번트에서 보이기만 하면 저희한테 말씀해 주세요.”

“쯧. 번트에 젊은 여자가 있을 리가 있겠어. 옛날이면 몰라도.”

베스는 어지러운 머리를 겨우 벽에 붙여 멀어지는 경관의 발소리를 셌다. 들려온 목소리는 하나였지만, 멀어지는 발자국은 여러 명의 것이었다. 그 집요한 남자가 기어코 번트에 사람을 더 푼 것이리라.

오늘 밤만 지나면 가야지. 딱 오늘 밤만.

베스는 또다시 같은 기도를 읊조리며 잠이 들었다.

바깥엔 퍼붓는듯한 눈이 내리고 있었고, 번트에 온 지도 벌써 사흘째였다.

타는 듯한 목마름에 눈을 뜬 건, 깊은 밤 속 어느 언저리였다.

“무…물.”

들어줄 이가 없는 줄 알면서도 의미 없는 부탁을 중얼거릴 만큼 사흘 내내 열에 들떠있던 몸은 이미 녹초나 다름없었다. 잡힐지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당장 목구멍을 옥죄는 갈증이 더 급해질 때에서야 고집스런 몸은 들어올 때 잡았던 문고리를 다시금 손에 쥐었다.

갈라진 문틈 새에 귀를 가져다 대봐도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은 기척을 내지 않았다.

죽을 것 같아.

온몸의 힘을 실어, 숫제 문고리에 매달리다시피 한 몰골로 베스는 문을 열었다. 끼이익. 가까스로 벽을 짚고 일어선 베스는 눈 앞에 펼쳐진 새하얀 설원에 넋을 잃었다. 뽀드득거리는 청량한 음을 새겨들으며 걸음을 떼던 여린 몸이 맥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헉, 흐으….”

손에 잡히는 부드럽고 차가운 눈 뭉치를 되는대로 입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뜨거운 입 안은 갑작스런 냉기를 인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얼얼한 게 더 타오르는 것 같아 베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눈을 퍼넣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쉼 없이 꿀떡거리며 눈을 삼킬수록 위를 비트는듯한 허기짐은 더욱 생생해졌다.

이러다 죽으면 어떡하지.

불현듯 왈칵 치민 공포에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살려-”

그때, 베스의 겨드랑이 사이로 커다란 손이 비집고 들어왔다. 오두막으로 돌아갈 힘조차 없어 가만히 눈밭에 엎드려있던 몸이 순식간에 쑥 일으켜 세워졌다. 갈비뼈 사이사이를 탄탄하게 지탱한 손에서 눈을 퍼먹을 때처럼 뜨거움이 전해진다면 착각일까.

“…콜린스 아저씨?”

베스는 믿기지 않는 듯이 콧잔등을 찌푸렸다.

삐뚤어진 금테 안경, 그 안에 담긴 따스한 눈동자, 얼핏 몰리 부인과도 닮은 얼굴. 그는 분명 콜린스인데. 평소라면 푸근히 웃어줬을 중년의 신사는 다소 굳은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아, 금방 감옥에서 나오셨나 보다. 그래서 피곤하신 거였어.

그러나 희미해진 판단력은 아무런 저항 없이 이 이상한 상황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부르튼 입술을 달싹여 “다행이에요, 아저씨.”를 속삭이기도 했다.

“여기일 줄 알았어.”

평소보다 무뚝뚝한 말투도 자신을 걱정하기 때문이겠지.

“…가자.”

저를 안아 들려는 콜린스를 가까스로 말리느라 베스의 몸이 또다시 휘청거렸다. 하지만 이번엔 허리를 지탱한 단단한 손 덕분에 고꾸라짐은 면했다.

“저, 저는 안 돼요. 그 남자가 찾아올 거예요. 안 돼요. 찾으면, 또 그러면….”

횡설수설하는 베스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허리를 붙든 손만 아니었으면 벌써 몇 번이나 쌓인 눈 위로 처박혔을 것이다.

콜린스는 두서없이 펼쳐놓는 베스의 핑계를 참을성 있게 들어주었다. 그러곤 한참을 쳐다보다가 억지로 입을 뗐다.

“데베르는 여기 없어. 모두 철수하고 떠나는 걸 내 눈으로 확인했으니 이만 가자, 베스.”

“정말요?”

진위를 확인하는 동그란 눈이 상황에 맞지 않게 사랑스러웠다.

“…그래.”

그제야 안심한 여체가 콜린스의 품에 쓰러져 내렸다.

“저 배고파요, 아저씨.”

콜린스는 몸이며 마음이며 바짝 언 채 마차에서 내린 소녀에게 제일 먼저 이름을 묻고, 그다음엔 저택으로 데려가 김이 솟아나는 수프를 먹였었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그때의 온기가 지금의 베스에게도 절실했다.

어느새 달랑 몸이 들린 베스는 코끝에 끼쳐 드는 익숙한 향에 슬며시 눈을 감았다.

내가 이 향을 어디서 맡아봤더라….

“베스.”

얼마 지나지 않아 베스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더 이상 춥지 않았다. 주위엔 몸을 녹일만한 온기가 충분히 감돌고 있었고, 테이블 위엔 김이 모락거리는 수프뿐만 아니라, 겨울철에 보기 힘든 붉은 과일이며 갓 구운 빵까지 가득했다.

여기가 어딘지 생각할 새도 없이 베스는 덥석 손을 뻗어 잘 익은 과일 하나를 베어 물었다. 달큼한 과육이 턱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지만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한 입. 또 한 입.

허기를 채우는 달콤함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맞은 편에 앉은 콜린스는 비단 굶주린 게 속만이 아닌 것처럼 허겁지겁 스스로를 달래는 베스의 모습을 지켜봤다.

정신없이 과일 하나를 해치운 베스는 이번엔 빵을 뜯었다. 작은 입 안을 가득 채운 채 연신 우물거렸지만, 결국 욕심만큼 해내지 못하는 몸이 마른기침을 토해내자 그는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곁에 앉았다.

어깨 위로 흘러내린 베스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고. 미지근한 물을 먹이고. 등을 두드리는. 그 모든 손길이 능숙했다. 이상해. 저를 보살피는 손길이 낯설면서도 익숙해 베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잇따라 우물거리던 볼의 움직임이 점차 잦아들었다. 달그락거리는 커트러리 소리가 멎고, 부지런히 타오르던 벽난로에서 틱틱거리는 잔불 소리만 들려오자 방 안은 노곤한 고요 속에 젖어갔다.

그 속에서 쏟아지는 졸음과 사투를 벌이는 베스의 손등을 콜린스의 손이 덮었다. 설핏 눈을 내리뜬 베스는 붙잡힌 손을 멀거니 바라봤다.

머리가 몽롱했다.

반지는 어디로 간 거지.

항상 콜린스 공작의 약지에 자리 잡고 있던 금반지가 보이지 않았다.

결혼반지라 수술이 아니면 늘 끼고 다니시는데 왜 오늘은….

“교수-”

끝맺지 못한 부름이 난데없는 체기가 되어 숨통을 틀어막았다.

아마도 콜린스일. 아니, 콜린스였어야 할 남자의 엄지가 느릿하게 제 손목뼈를 문질렀다.

콜린스 교수님이 이러실 리가 없어.

그 생각이 스치자마자 베스의 새카만 속눈썹이 빠르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그럴 수는. 분명 콜린스 교수님이었는데. 확실히 그랬는데.

“데베….”

아무리 그럴 리가 없다 자위해도 전해지는 향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이 무겁고 서늘한 겨울 향을 지닌 남자는 그녀의 세상에 오직 한 명뿐이었으니까.

“그래, 데베르.”

콜린스란 환영을 벗은 남자가 다정히도 자신을 소개했다.

“기다렸어. 알아봐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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