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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62화 (162/206)

162화

“거, 바쁜 사람 붙잡고 뭐 하는 거요?”

“어쩔 수 없소. 웨인에서 내려온 명령이니. 얼른 통행증부터 보이시오.”

깜빡 잠이 들었던 베스는 어깨를 화드득 떨며 눈을 깜빡거렸다.

초하루이니만큼 곡식을 가득 실은 짐마차는 웨인 곳곳을 부지런히도 돌았다.

인부들이 마차를 멈추고, 짐칸 입구의 포대를 내릴 때마다 베스는 행여 들킬세라 몸을 움찔대며 숨을 죽였다. 하지만 무식하리만치 커다란 포대 더미 속, 그것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여자를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애초에 거기에 사람이 들어앉아 있으리란 생각조차 못 하는 덕도 컸다.

마침내 왁자지껄한 웨인의 소음이 잦아들고, 다붓한 새 지저귐만이 들려올 때에서야 베스는 참았던 숨이라도 길게 내쉴 수 있었다. 그러다 설핏 선잠이 들었고, 깨보니 이 난리인 것이다.

툭. 기다란 곤봉이 짐칸의 지붕 역할을 하는 천막을 불규칙적으로 찍어댔다. 혹시나 그 안에 있을지 모르는 사람의 비명을 기대하는 것이었다.

베스는 잘게 떨리는 제 양손을 들어 입술을 틀어막았다. 심장께가 아찔했다.

“우리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뭐 공작이 누굴 찾는다 하지 않소.”

“공작? 누구, 클리프?”

“예, 뭐. 그 데베르 클리프 공작 말이요.”

데베르 클리프. 잠시 잊었다 생각한 그 이름 하나가 들려왔을 뿐인데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새 웨인을 벗어나는 길목을 막기 시작했다면, 어쩌면 어느 검문소에선 이미 그 남자가 기다리고 있는 것 아닐까. 여러모로 끔찍한 짐작이긴 했지만.

베스는 제 손까지 전해지는 심장의 떨림을 무시하려 애썼다. 그 사이 인부들의 통행증 검사가 끝났는지, 경관들 몇 명이 각각의 마차를 향해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있는지만 확인할 테니 잠깐 기다리시오.”

다가오는 목소리와 함께 발소리도 가까워졌다. “여자 같은 소리 하네.” 저 멀리서 귀가가 늦어진 것에 대해 씨근덕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러나 지나치게 예민해진 베스의 귓가엔 그 모든 소리가 제 귓바퀴에 입술을 갖다 대고 지껄이는 것만 같았다.

흡. 한껏 숨을 참은 채 끌어안은 무릎을 더 바짝 당겼다. 일렁일렁. 경관이 들이민 램프 불빛이 발끝을 잡아챌 듯 말 듯 간지럽히는 걸 두 눈으로 지켜보기란 형언할 수 없는 공포였다. 티끌만큼이라도 그 빛에 발이 물렸다간 속절없이 제 존재를 들키게 될 것이다.

“어휴, 무슨 놈의 마차가 깊기도 하네.”

허공을 어슬렁거리던 노란 등불이 휙, 옆으로 기울어져 위태로이 흔들렸다. 경관이 더 자세히 짐을 확인하기 위해 짐칸에 오르려 한 탓이었다.

제발. 제발.

턱. 짐칸에 올라선 구둣발 소리가 심판 봉처럼 바닥을 두드리는 순간.

“부, 불! 불이야!”

외마디 비명이 베스가 들어앉은 짐칸 바로 옆에서 울려 퍼졌다.

“뭐야?!”

다시금 돌아간 램프의 빛길을 따라, 베스의 주위엔 처음처럼 칠흑 같은 어둠만이 남겨졌다.

“에이씨, 내 그럴 줄 알았지. 태워 먹을 짚단이랑 곡물이 그득한데 램프 들고 지랄하는 경관이 어딨어!”

“물! 물 가져와!”

“제기랄! 저게 다 돈이 얼만데!”

운반용 짐마차가 으레 그렇듯 바닥엔 짚단이며 건조한 풀 찌꺼기들이 많은데, 하필 램프 불이 옮겨붙은 모양이었다. 고작 포대 몇 개를 사이에 두고 베스와 대치 중이던 경관도 급히 뛰어 내려갔다.

고개를 내밀 엄두도 내지 못한 베스는 가만히 눈동자만 굴려 천막 지붕에 난 구멍을 바라봤다. 어느덧 새카맣게 칠해진 하늘이 딱 손톱만큼만 보였다.

다행히 불길은 금방 멎었지만, 짐마차 몇 대에 생계가 달린 인부들의 맹렬한 분노는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배상하라’라는 한 마디에 수그리는 건 경관들 쪽이었다.

“어유, 당장 보내드릴게. 거, 사람 참. 실수 좀 한 거 가지고.”

“열 안 뻗치게 생겼어? 뭔 여잔지 뭔지를 짐마차에서 찾겠다고 그 난리 떨다가 이렇게 된 건데? 상식이 좀 있어보슈. 공작부인이 여기에 타 있겠는가.”

“어, 얼른 가시오. 태워 먹은 건 정말 미안하고.”

경관은 뒤이어 오는 차량을 향해 뛰어가며 손쉽게 작별을 고했다.

얇은 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부들끼리 떠드는 소리가 선명하게 전해졌다.

“어차피 더 가봐야 또 검문소에서 걸릴 테니,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여기서 묵어야겠어.”

“젠장할.”

말 머리가 히힝 거리며 길을 틀었다.

얼마쯤 간다 싶던 마차는 베스가 안도하기가 무섭게 또다시 멈추어 섰다.

“잠시. 물 한 번만 빼고.”

“어어, 하는 김에 나도.”

키들거리는 소리가 희미해지고 나서야, 베스는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주위를 살폈다.

이곳이 어딘지는 몰라도 빽빽하고 시커먼 한밤의 갈대밭은 사람 하나 숨기에 제격이었다.

눈치를 살피던 베스는 조심스럽게 짐칸을 기어나갔다. 달빛에 드리워진 그림자만을 밟으며 땅으로 내려오는 베스를 눈여겨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멀리서 뻐끔거리는 연기로 봐선, 다들 담배나 한 대 태우고 돌아올 모양이었다.

미끄러지듯 갈대밭 아래에 엎드린 베스는 팔꿈치를 세워 엉금거리며 짐마차에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제 가자고!”

“어이.”

대장 격인 남자의 걸걸한 목소리가 바로 지척에서 들려왔을 땐 숨이 멎을 뻔도 했다. 인부들이 마부석에 올라타고, 몇 마디 농을 더 주고받는 동안 베스는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처럼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 지옥 같은 찰나가 지나가고, 사위에 들려오는 거라곤 풀 벌레가 찌르르 우는 소리만이 전부인 그때. 벌떡 일어선 베스는 뒤돌아볼 것도 없이 갈대 사이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멈추기라도 하면 공작이 제 뒷머리라도 잡아챌 것처럼 내달렸다. 인부의 말마따나 어차피 다음 검문소에서도 그 남자의 명령을 받든 경관들이 서 있을 것이고, 방금 같은 요행을 또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보다는 여관에 도착한 인부들이 짐칸을 확인할 때 들켜서 경관에게 끌려가는 편이 더 가능성 있게 와닿았다.

그렇다면 먼저 도망칠 수밖에.

힘없는 자의 살아남는 방식은 늘 이 모양이었다.

“헉, 헉… 흑, 헉.”

이상스런 희망을 꾸역꾸역 삼켜내며 지난한 나날을 버티던 한때. 도망치지 않고도 무언가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대단한 착각이었는지는 저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증명했다.

아무도 없는 갈대밭 한가운데에서 멈추어 선 베스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부는 밤바람에 풀어헤친 머리가 흩날렸다.

이제야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드디어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베스는 모든 게 뜻대로였던 영겁 같던 하루를 떠올렸다.

속지 않을 것 같던 남자는 속았고,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 같던 클리프란 족쇄 또한 제 손으로 끊어냈다. 마차로 뛰어오르는 다리를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베스는 제 의지대로 행동했다.

그러나 섣부른 판단은 오판일 확률이 높았고, 잠깐의 자유를 맛본 자에게 거부할 수 없는 구속은 더 쓸 뿐이란 걸 알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럴, 리가.”

갈대밭을 헤쳐나오던 베스는 믿기지 않는 눈앞의 광경에 눈을 재차 비볐다.

왜 저 오두막이 여기 있는 거지.

그럴 리가 없다. 설마. 또 꿈이겠지, 혹은 환영이거나.

정상이 아닌 제 꼴을 자조하며 거세게 뺨을 내리치자, 멋 모르는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그렇게 도망쳤는데. 그토록 발버둥 쳤는데.

“…싫어. 싫다고.”

꼭 눈앞에 기억 속의 오두막이 아니라, 그 오만한 잿빛 눈동자가 있는 것처럼 베스는 도리질을 치며 주춤주춤 뒤를 돌아봤다.

눈물에 일그러지는 시야 사이로 미처 보지 못한 등 뒤의 풍경이 들어왔다.

“흐, 흡.”

높고, 거대한.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가문의 상징.

“정말 싫다고….”

거기엔 어둠에 잠든 클리프 성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넌 죽어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듯이.

“내가, 얼마나. 흑, 얼마나….”

이곳은 번트였다.

그렇게까지 발악해 벗어났다고 생각한 그 남자의 손 아래였다.

* * *

베스는 웨인 어디에도 없었다. 보호구역은 물론, 베스를 숨겨줄 만한 몰리 부인이며 아이네스, 딕시의 저택까지 이 잡듯이 뒤져대도 나풀거리는 머리카락 한 올 찾아내지 못했다.

결국엔. 기어코 웨인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럼에도 데베르는 아직 웨인에 있었다. 정확히는 주인을 잃은, 불쌍한 간호 숙소 방 한 칸에.

낡은 침대 곁에 꼿꼿이 서 있는 그의 손엔 구겨진 손 싸개 하나가 들려 있었다. 말랑한 손 싸개와 죽일 듯이 문가만 노려보는 남자, 그 와중에 예쁘게도 비쳐드는 달빛까지. 어느 것 하나 어울리는 것 없는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데베르는 지금 고집을 부리는 중이었다. 제가 베스 제인스를 모를 리 없다는 그런 고집.

그래. 백번 양보해 저를 버렸다 치더라도, 남겨놓은 아기의 흔적이 마음에 걸려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리 냉정 떠는 부류는 아니니까.

스스로 덫이 된 데베르는 다가올 베스의 발목만을 떠올리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때를 기다리는 건 익숙하고 쉬운 일이었다.

얼마나 속으로 그 말간 얼굴을 곱씹었을까. 고요한 복도를 살며시 지르밟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는 새벽 미명이 하늘을 덮을 무렵이었다. 삐거덕, 삐걱. 몰래 움직이는지 한 발, 한 발에 주저함이 묻어났다.

어서 돌아와, 베스.

밤새 굳어 있던 데베르의 입가가 짧게 경련했다. 살짝 열린 문틈 새로 검은 머리카락이 보이자마자 심연 같던 동공이 일순 커졌다. 어둠에서부터 잽싸게 덮쳐드는 커다란 인영은 새카만 자취를 우악스럽게 붙들었다.

“….”

“흐으윽, 누, 누구. 헉! 공작….”

그건 베스가 아니었다.

“고, 공. 히끅. 저, 저는.”

대신에 연신 파들거리는 퀭한 안색의 여자 하나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치렁대는 검은 가발을 누군가의 머리통처럼 들고 서 있던 데베르는 결국 어깨를 떨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었다. 우습기 짝이 없는 꼴이지 않은가. 실제로 우습기도 하고.

한참을 소리 없이 끅끅거리던 어깨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꼭 수면 위로 머리를 내민 짐승처럼 그는 가만히 숨을 들이마셨다.

“감히. 누구 앞에서, 누구 흉내를 냈던 거야.”

그 어디에도 베스의 향은 느껴지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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