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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61화 (161/206)

161화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죠.”

흔치 않은 공작의 아량에 이사회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화색이 돌았다. 온갖 추문에 휩싸여 재판을 오가던 순간에도 자신의 역할을 잊지 않던 그는 클리프였다. 그런 그에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유롭게 등받이에 기댄 채 서류를 읽는 눈빛에서 다른 꿍꿍이를 읽을 순 없었다. 심지어 연신 공작의 눈치를 살피는 이사들의 인사에 미미할지언정 미소마저 지었으니까.

데베르 홀로 남은 집무실엔 어딘지 나른한 분위기가 흘렀다. 손가락을 스치는 종이의 팔락거리는 소리와 다소 날카롭게 그 위를 스치는 펜촉의 마찰음이 고저 없는 선율처럼 그 안을 채워나갔다.

그러나 곧 집중을 잃은 손은 가만히 테이블 위에 놓였다. 느릿하게 툭, 툭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데베르의 시선은 창밖의 제국 병원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주 가끔이긴 했지만, 저 창 너머로 베스의 얼굴이 보일 때도 있었다. 늘상 품에 서류철 아니면 약품이 든 트레이를 들고선 부지런히 오가는 얼굴은 미묘하게 그가 아는 것과 달라 심사가 뒤틀리곤 했다. 하지만 제 친구에게만 지어주는 미소라던가, 지쳤는지 가만히 벽에 기댄 무표정한 얼굴을 볼 때면 속절없이 그 뒤틀린 마음마저도 누그러졌다.

같잖은 짓이었지만 때론 회의가 끝났는데도 굳이 그 자리에 앉아있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물론 행운이 늘 따라주진 않았다. 행여 방해꾼들이 들어와도 심상한 그의 눈동자를 보고서 설마 연인을 남몰래 바라본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숨기는 게 익숙했다. 그게 흉터든. 제 마음에 피어나는 한 줌의 애정이든.

그러나 짓쳐들어오는 베스의 존재는 늘 저를 한 치의 여지도 없이 풋내기 소년으로 전락시켰다. 어제만 해도 그랬다. 네가 또 내게 왜 이러는 걸까, 피어오르는 의심을 사뿐히 밟아버리며 안겨 오는 여자는 그에게만큼은 잔인한 폭도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데베르의 애정은, 딱 데베르 저 혼자 알 만큼만 키워나가야 했다.

어느새 턱을 괸 그는 고개를 까딱 기울여 불청객만이 보이는 창을 지루한 연극 감상하듯 지켜봤다. 허나 이번 감상은 짧았다.

데베르는 병원으로 가기 위해, 정확히는 아무것도 모르고 오랜만의 병원 일에 정신이 쏙 빠져 있을 제 아내를 되찾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발 물러서 준 만큼 한발 다가와 주길 바랄 테지.

자신이 아는 베스는 그럴 것이었다.

피식거리는 웃음을 매단 채 슈트 단추를 잠그는 그를 붙잡은 건, 갑자기 걸려 온 한 통의 전화였다.

제국 병원의 의료진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공작과 그 수행인들의 등장에 아연한 얼굴로 몰리 부인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분명 소식지 속의 달콤한 얘기를 똑똑히 읽었는데. 심상찮은 기운을 풍기며 부인을 대면하고 있는 공작의 얼굴은 꼭 저승에서 건너온 것만 같았다.

저런 남자와 그 하얀 베스 선생이? 의료진들을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리에서 떨어진 몰리 부인은 참지 못하고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아아, 데베르. 그래서 그 아이가 지금 어디 있다고?”

“저도 전해 들은 얘기가 전부입니다.”

집무실에 걸려 온 전화의 내용은 간단했다. 클리프 부인이 사라졌다고. 그것도 완벽하게. 떨리는 집사의 목소리에서 데베르는 베스가 사라진 저택의 풍경을 손쉽게 떠올렸다.

“어제 제국 병원을 방문했다는 얘기를 들어 오늘부터는 제자리로 돌아갔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오판을 정정하는 목소리는 생각보다 무던했다.

“그건.”

무감한 데베르의 말투에 몰리 부인은 더 정신이 아득해져 가슴을 들썩였다. 비밀을 신신당부하며 떠난 베스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달리 어쩔 수 없었다. 어쨌건 아이의 남편이자 남은 유일한 가족은 지금으로선 데베르 아닌가.

“베스가 어제 온 건 병원을 그만두겠다고 말하기 위함이란다.”

하, 데베르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뱉었다.

병원을 그만둔다고? 그 베스 제인스가? 온갖 상처받은 것들을 돌아보지 못해 안달을 내는 그 여자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그럴 리가-”

“혹시나 자네가 유산 때문이라 괴로워할까 봐 당분간만 비밀을 지켜달라고 했어.”

유산. 또 그 빌어먹을 단어가 데베르의 입술을 틀어막았다.

차갑게 식은 그의 표정을 읽지 못한 몰리 부인은 되지도 않은 첨언을 덧붙였다.

“데베르, 자네는 그 아이의 심성을 알잖나. 마음이 괴로워 잠시 외곽으로 외출한 거일 수도 있으니-”

“허락해 주십시오.”

“무슨…?”

대번에 부인의 말을 끊어먹은 데베르는 열이 뻗치는 손아귀를 공연히 그러잡았다. 잡히는 건 덧없는 허공뿐인데도.

잡히지 않는 허상들을 떠올릴 때면 그 여자의 얼굴도 함께 떠오른다는 게 우스운 노릇이었다.

“베스가 다녀간 곳을 모두 확인해야겠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발정 난 개처럼 그 뒤를 샅샅이 뒤져 쫓아갈 거란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 적어도 아직은.

“찾아.”

낮은 명령 한 마디에 문가에 서 있던 한 무리의 장정들이 일사불란하게 병원 곳곳으로 흩어졌다. 데베르는 고고히 로비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곧 그의 발치에 베스의 흔적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아직 세탁비누 향이 빠지지도 않은 빳빳한 간호복이며 낡은 서적 따위가 즐비하게 쌓여갔지만, 정작 그곳에 베스는 없었다.

어제 부인을 보필했다는 운전사의 말에 따라 그다음 목적지는 자연히 간호 숙소가 되었다.

“어, 어… 마저 짐을 챙기겠다고 오기는 했는데….”

어버버 거리는 관리인을 뒤로하고, 데베르는 이번엔 직접 베스의 방이었던 곳으로 향했다. 여전히 삐걱대는 나무계단 소리를 듣자 관성처럼 미간이 찌푸려졌다.

클리프 부인의 방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작고 후미진 베스 제인스의 방을 보며 데베르는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고작 이딴 걸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성마른 손길이 책상 한편에 놓인 책들이며 필기구 따위를 엉망으로 헤집었다. 서랍을 열어도 별다른 건 보이지 않았다. 거친 손길은 곧장 옷장으로 향했다.

“이런.”

데베르는 숫제 미친놈처럼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제가 여자에게 선물했던 드레스를 침대 위로 던졌다. 낡아빠진 계단만큼이나 스프링이 삐끗거리는 침대는 한때 베스를 그의 아래에 누인 채 울렸던 곳이었다.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사납게 쓸어올리는 데베르의 눈에 작은 상자 하나가 걸렸다. 마치 일부러 숨겨놓은 듯이 가장 옷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모양새였다.

약간 숙였던 고개를 더욱 깊숙이 아래로 처박았다.

나른하게 손을 뻗는 모든 순간이 느리게 재생되었다.

아, 맞아. 넌 이런 여자였지.

상자를 열자마자 튀어나온 감상이었다.

어설프게 무명으로 짠 손 싸개는 분명 저와 베스 사이의 아이를 위한 것이었다. 작은 손으로, 그보다 작은 천 하나를 붙들고 씨름했을 비쩍 마른 등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래 놓고, 넌 지금.”

우악스런 손아귀 힘에 부드러운 천이 뭉개졌다.

베스 제인스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보란 듯이 제 자취를 모두 남긴 채, 딱 저 홀로 사라졌다.

저택은 어제와 똑같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 빛은 안주인의 존재를 밝히는 따스한 기운이 없었다.

“수고가 많으시군요.”

“아무래도 저택에는 계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토록 안달하던 부인이 사라졌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데베르의 태도에 되레 당황한 건 집사였다. 처음 전장에서 베스를 잃어버리고 온 이후, 젊은 가주의 일 년 남짓이 어땠는지를 노년의 집사는 낱낱이 기억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데베르는 고요히 복도를 걸어갔다. 일말의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그는 창고용 샛방부터 좀처럼 출입하는 일도 없는 다이닝룸과 드레스룸까지 찬찬히 확인했다.

그 집착적인 한 걸음, 한 걸음이라니. 널찍한 등 너머로 흘러나오는 냉기에 사용인들은 서로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마침내 마지막으로 남은 부인용 침실 문 앞에 선 데베르는 뻐근해진 목덜미를 몇 번 주물렀다. 이 하잘것없는 짓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에 절로 실소가 흘러나올 뿐이었다.

부드럽게 돌아간 문고리와 함께, 그 어떤 것도 손대지 말라는 공작의 명령에 따라 아침의 풍경이 그대로 남은 침실이 눈에 들어왔다.

구겨진 시트 한구석이 동그랬다. 저곳에서 잔뜩 웅크린 베스는 잠들어 있었다.

어쩌면 잠든 체한 것이려나.

데베르는 예사롭게 제 생각을 정정했다.

휑한 침실 한편엔 유난히 추위에 떠는 베스를 위한 벽난로가 여전히 타닥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데베르는 그 앞에 덩그러니 버려진 붕대를 들어 올렸다.

끄트머리가 불에 그을린 붕대는 오늘 아침 베스의 손에 매어준 것이었다. 얌전히 여자의 손을 감싸고 있어야 할 붕대가 벽난로 앞에 던져진 걸로 봐선 태우려 한 게 분명했다.

성급히 달아나느라 실패한 것 같긴 했지만.

“아프다고 했다고요.”

“네, 시녀의 말론 비명을 지르셨다고 했습니다.”

“비명….”

마치 대단한 단서라도 되는 듯 ‘비명’을 중얼거리던 데베르의 안색이 갑자기 돌변했다.

성큼성큼 부인 침실 너머의 공작 전용 침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매서웠다. 올가미 같은 청혼서에 얽매일 무렵, 간호사 베스 제인스는 소굴 같은 그의 어둠을 몇 번이나 오가곤 했다.

그리고 그곳엔….

구석에 걸려있는 제복을 멱살 쥐듯 잡아챈 데베르는 번뜩이는 눈동자를 굴려 이름이 새겨진 가슴팍을 노려봤다. 그 밑에 매달린 브로치의 모서리가 희미한 달빛을 반사해 예리하게 빛났다.

지루한 술래잡기를 또 한다 생각했다.

보란 듯이 여자가 남겨놓은 흔적들을 핥으며 뒤를 쫓으면서도 별다른 것 없으리라 착각했다. 오히려 겪어봤으니 더 빨리 찾겠지, 자신하기까지 했다. 몰리 부인의 말대로 제 아내는 지금 마음이 괴롭지 않은가.

형장에서 사라진 베스는 과거 전장에서와 달리 바깥이 아닌, 더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었다. 그랬기에 이번에도 똑같으리라 판단했다. 몇 번 삼엄한 창살에 부딪힌 짐승들은 결국 우리 안을 맴돌기 마련이었으니까.

하지만 데베르는 인정해야만 했다.

아직도 자신은 베스를 제대로 모른다.

“지금, 당장.”

차가운 분노가 실린 목소리가 방 안의 공기를 얼어붙게 했다.

거칠한 엄지가 뾰족한 브로치의 모서리를 거세게 짓눌렀다. 톡, 한 방울 터져 나온 선혈이 기어코 찬란한 제국의 금빛을 더럽히게끔. 아주 집요하게.

“웨인을 나가는 길목뿐 아니라, 도시 사이를 잇는 검문소 전부에 전화를 넣으세요.”

남겨놓은 브로치를 통해 그 여자는 선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잠시 잊었다. 베스 제인스는 말을 못 해도, 제 뜻 하나 전하는 데는 도가 튼 여자란걸.

“쥐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선 안 됩니다.”

나는 당신을 영영 떠날 거야, 데베르 클리프.

“검은 머리를 한 건 짐승 새끼라도 붙잡아 놓으세요.”

예상외로, 제대로 된 도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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