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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60화 (160/206)

160화

반질하게 윤이 나는 검은 차 하나가 제국 병원 앞에 멈추어 섰다. 그곳에서 내린 베스는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차려입은 외양이며 걸음걸이만 봐도 꽤 명문가의 부인임이 짐작되었다.

병원에 돌아온 자신을 향한 놀라움과 호기심을 읽으며 베스는 조용히 병원장실로 올라갔다.

똑. 똑. 쭈뼛거리며 병원장실 문을 두드리는 제 모습이 꼭 부모를 찾는 어린아이 같아 베스는 쓰게 웃었다.

“들어오세요.”

예의 다정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저를 부를 때는 하마터면 참아온 눈물을 흘릴 뻔도 했다. 하지만 불거지는 눈시울 대신, 그보다 더 붉게 칠한 입술을 끝까지 끌어올렸다.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장식할 순 없잖아. 웃어야지.

“잘 지내셨어요?”

“세상에….”

몰리 부인은 그 어떤 할 말도 찾지 못하고 바싹 마른 베스의 뺨을 쓰다듬었다. 주름진 눈가에 고이는 눈물을 보며, 베스는 다시 한번 웃었다.

“전 잘 지냈어요.”

“네가, 잘 지냈다면. 그래, 나도. 나도 잘 지냈단다.”

황망하게 몸을 비튼 부인은 재빠르게 흘러내린 눈물을 훔쳐냈다. 마차에 숨어 파들거리던 어린 소녀는 이젠 철이 들었다고 하기에도 민망할 만큼 완연한 숙녀가 되어 있건만. 불과 얼마 전의 끔찍한 일들을 잊은 척 미소 짓는 베스를 보자 아려오는 마음을 참을 길이 없었다.

베스는 여전히 얼굴을 보여주지 못하고 등을 돌린 채 있는 부인의 허리를 껴안았다. 한 번도 없던 아이의 어리광에 부인은 싱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베스 네가 어리광이라니. 콜린스가 보면 펄쩍 뛰겠어.”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심상찮은 기운을 감지한 부인이 돌아보려 하자, 베스는 예의 그 지겨운 웃음소리를 또 흘렸다. 안심하라는 뜻을 담은 짧은 웃음이 사그라든 뒤로, 작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얕은 한숨에 실린 무게를 눈치챈 부인은 차마 베스를 재촉하지 못했다.

“…저 이제 제국 병원을 그만두려 해요.”

지친 목소리에 짙은 체념이 묻어났다.

“더는 힘들 것 같아요.”

베스는 병원을 그만둔다는 것을 알면 데베르가 유산 때문이라 자책할지 모르니 아직은 비밀로 해달라, 거듭 당부하고서야 병원장실을 나왔다. 픽, 실소가 나왔다. 그 남자는 그런 마음 따위 전혀 모를 텐데.

한 걸음, 한 걸음. 짧게 지나온 웨인에서의 걸음을 세듯 베스는 추억이 남은 곳을 하나씩 짚어 나가고 있었다.

저 사는데 바쁜 평민들은 길을 지나가는 부인이 소식지 속의 그 공작부인인지 알아보지 못했지만, 간호사 베스 제인스 양을 알던 병원 사람들은 누구든 그녀를 보면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자신을 기억해주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견고하게 세운 마음의 끄트머리가 조금씩 뭉툭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유. 베스. 여긴 어쩐 일이냐.”

반가움과 걱정이 뒤섞인 투박한 숙소 관리인의 목소리마저 그 마음을 무르게 만들었으니까.

속지 마, 베스 제인스.

베스는 더 이상 섣부른 제 감정에 동요되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제 방에 남은 물건을 챙기려고요.”

이곳을 떠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생경하게 느껴지는 나무 골조를 눈여겨보며 계단을 올라갔다. 맨 위층에 자리 잡은 제 방의 문을 열자, 사라진 주인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손때묻은 물건들이 보였다.

미처 가져가지 못한 간호 서적. 잉크가 다 닳았다는 걸 알면서도 버리지 못한 펜. 언젠가 바꿔야지 생각했었으나 이젠 영영 때를 놓친 낡은 커튼.

하나씩 그 풍경을 눈에 담던 베스는 마지막으로 옷장 문을 열었다. 협소하고 낡은 그곳엔 장소를 잘못 찾은 듯한 짙은 감색 드레스 한 벌이 걸려있었다. 가슴팍에 자잘하게 달린 무수한 은빛 보석들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그 후미진 옷장 안에서도 그토록 아름답게.

기다란 드레스 자락을 훑던 손이 옷장 깊숙이 숨겨진 상자에 닿았다. 주먹만 한 상자는 손을 뻗지 않으면 있는지도 모를 만큼 깊숙한 곳에 있었다.

“흣….”

상자를 열자마자 베스는 거세게 입술을 깨물었다.

앙증맞을 만치 작은 손 싸개가 애써 잠재운 마음을 울렁거리게 했다.

어렴풋이 임신을 직감했던 날. 베스는 확인하기보단, 병원을 나뒹구는 낡은 천 하나를 가져와 깨끗이 빨고 널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곤 시간이 날 때마다 그 천을 이리저리 만져대며 만들어낸 게 이 손 싸개였다.

그 남자와 저 사이의 아이는 일말의 희망도, 기대도 되지 못하리란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기에 나온 행동이었다.

자신이 첩자라는 사실에 그가 분노를 숨기지 못할 때라던가. 그 남자의 집무실 불이 밤이 깊도록 꺼지지 않을 때라던가. 혹은 이상한 소문들이 자꾸만 귓가를 거스를 때마다 베스는 터져 오를듯한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바늘을 붙들고 용을 썼다.

“우린 지금 만나기엔 조금 운이 나빴나 봐, 아가야.”

향내가 나는 손 싸개에 건조하게 입 맞춘 베스는 다시 상자를 굳게 닫았다.

한 걸음 물러선 베스는 제 공간이었던 그곳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곤 등을 돌렸다.

모든 것은 이곳에. 그대로.

챙길 것도, 기억할 것도 더는 없었다.

* * *

늘 어둑하게 잠들어 있던 클리프 저택이 오랜만에 창마다 환한 빛을 쏟아냈다. 발길이 닿지 않았던 온실 정원에도 따스한 불빛이 가득했다.

차에서 내린 데베르는 달라진 풍경을 예리하게 둘러봤다. 평소보다 반색하며 가주를 마중 나오는 집사의 표정 또한 그 속에 포함이었다.

“부인께서 건강을 많이 회복하신 것 같습니다. 식사도 곧잘 하셨고, 짧지만 병원으로 외출도 하셨습니다.”

오늘 아침에만 해도 죽은 듯이 늘어져 있던 여자였다. 그런데 갑자기 회복했다고.

“과연.”

집사의 말을 흘려들으며 로비로 발을 디디던 데베르의 말이 일순 끊겼다.

희멀건 슬립 차림이 아닌. 제멋대로 풀어헤친 머리카락이 아닌. 저를 닮은 흰 겨울 원피스를 차려입고,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반으로 묶은 베스가 계단참에 서 있었다.

“지금쯤 올 것 같아서요.”

동그란 귀밑으로 내려온 흑단 같은 머리칼은 조금 전 본 저택 위의 밤하늘과 똑같았다.

다른 이는 몰라도, 적어도 데베르에겐 그랬다.

사랑스럽게 볼을 붉히고 있는 얼굴은 그가 아는 베스가 아니었다.

사용인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저택의 본관엔 오직 두 사람만이 서 있었다.

베스는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데베르는 그 예전의 낡아빠진 전장 숙소처럼 아득하게 높은 곳에 있는 것만 같은 여자를 굳은 얼굴로 바라봤다.

“잡아줘요. 이젠 내 손을 잡을 사람은 당신밖에 없어요.”

당신이 원한대로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은 사라졌으니.

본심을 숨긴 채 하는 달콤한 목소리에 베스의 가슴이 빠르게 요동쳤다.

“얼른.”

베스는 가만히 데베르의 눈을 응시했다.

의심이 섞인 눈빛 속에 망설임이 끼어드는 게 보였다. 이토록 선명하게 보이는 동요를 왜 지금껏 눈치채지 못했을까. 이 남자는 실컷 제 죄책감을 이용하며 약한 체를 했는데.

“계획이 뭐야.”

데베르가 몇 계단을 밟고 올라서자 기울어진 시선의 위치가 전보단 맞춰졌다.

“이렇게 달게 구는 속셈이 뭐냐고 묻는 건가요?”

장난스럽게 기억 속의 대화를 상기시키는 베스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티 없이 미소 짓는 얼굴에 환한 샹들리에 빛이 닿아 부서졌다.

그대로 굳어버린 듯한 남자를 대신해, 베스가 몇 걸음 계단을 내려갔다. 비로소 시선이 같은 위치에서 맞닿는 순간, 작은 손이 데베르의 눈가에 닿았다.

“…이 상처는 참 아물지 않네요. 속상하게.”

벌써 딱지가 앉았어야 할 눈가의 실금은 아직도 붉은 자국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이 영악한 남자의 계획 아래 아물지 못하는 거겠지.

상처에서 손을 뗀 베스는 주저 없이 그의 목덜미에 팔을 감았다. 작은 여체의 무게가 고스란히 그에게로 쏟아졌다.

“그저, 내가 원하는 건….”

베스도 이젠 어렴풋이나마 알아채는 중이었다. 이 남자를 어떻게 하면 흔들 수 있을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무너뜨릴 수 있을지.

이 방법이 틀려도 상관없었다. 어긋나도 괜찮았다.

그 또한 이 남자와의 마무리일 것이기에. 다 괜찮았다.

찰박거리며 넘치는 물소리가 커다란 욕실 안을 쉴새 없이 울렸다. 그 속에 섞인 끊어질 듯 말 듯 한 신음 또한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흐윽….”

품에 안긴 가녀린 등줄기가 바르르 떨리자, 데베르는 하던 허리 짓을 멈추고 제 가슴팍에 이마를 기댄 베스의 얼굴을 살폈다. 베스는 괜찮다며 소리 없이 입술을 벙긋거리며 더욱 힘주어 그의 어깨를 껴안았다.

물기로 미끈거리는 몸이 부딪힐 때마다 저 아래에서부터 깊은 열기가 올라왔다.

데베르는 부드러운 몸 곳곳을 욕심껏 탐하면서도, 시시각각 변하는 여자의 얼굴을 놓치지 않고 눈에 새겼다.

“그만할까.”

발갛게 익은 귓가를 잘근거리며 마음에도 없는 물음을 던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베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령 베스가 또다시 휘청거리는 마음을 가누지 못해 제게 기댄 것이라 해도, 굳이 이 순간을 그르칠 생각은 없었다. 이곳은 오직 그의 공간이었고, 이젠 베스를 놓칠만한 그 어떤 것도 주위에 없었다.

또다시 아이가 생기고, 그 아이가 베스를 닮고, 그 아이의 이름 뒤에 클리프가 붙기만 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베스 제인스는 온전히 제 것이 될 것이다. 아무리 발악해도 떨치지 못하는 클리프 부인이란 족쇄처럼 영원히.

베스는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려 매끈한 벽면에 비친 자신과 공작의 모습을 바라봤다. 어미인 올리비아를 빼닮은 얼굴을 하고서, 그녀를 죽인 가문의 남자와 붙어먹는 그 꼴이란. 올리비아가 하지 못한 저열한 과업을 제가 손수 이어받은 듯한 자괴감에 치가 떨렸다.

그래도, 벗어날 수만 있다면.

베스는 넘쳐흐르는 상념을 지우기 위해 성급하게 남자의 입술을 찾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뒤통수를 감싸는 손길에 다시금 눈을 감았다.

성급하게 얽히는 타액 속에 찝찔한 피 맛이 났다.

아직 아물지 못한 상처는 생각지 못한 순간에 터지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 * *

눈을 감은 베스는 평소보다 뭉그적거리며 침대를 벗어나는 남자의 발걸음에 귀를 기울였다. 공작을 기다리고 있던 차의 엔진 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베스는 몸을 일으켰다.

밤새 시달린 몸의 울긋불긋한 자국과 달리, 새로이 손바닥에 감긴 붕대는 새하얗기만 했다. 그가 매일 아침 제가 자는 사이에 상처를 소독하고 간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베스는 늦지 않기 위해 옷을 챙겨 입었다.

달의 초하루이니 이제 곧 곡물을 실은 짐마차가 올 것이다.

초조하게 방 안을 오가길 얼마 지나지 않아, 고요한 저택의 아침을 깨우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어이구, 오랜만입니다!”

“이쪽 창고에 놔 주세요. 엇, 그곳은 아니에요!”

“집사님! 장부를 찾으십니다.”

사용인들이 저택 안을 오가고, 인부들이 창고를 들락거리는 약간의 소란이 일어났다.

지금이야.

베스는 주저 없이 문고리를 붙잡고 쓰러졌다.

“아, 악…! 아, 아!”

“부, 부인!”

문 너머의 비명에 화들짝 놀라 들어온 시녀가 허둥지둥 부인을 살폈다.

배를 끌어안은 베스는 쥐어짜는 듯한 비명을 토해냈다.

“의, 의사를… 몰리 부인…!”

“어?! 네, 네! 제가 집사님께 알리겠습니다!”

갑작스런 상황에 정신을 못 차린 시녀가 황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가자마자, 베스는 벌떡 일어나 그 반대 방향으로 달음질쳤다.

이 찰나를 놓쳐선 안 돼.

휙, 휙.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주어진 시간은 짧았지만, 비틀거리는 몸은 다행히도 저택의 모든 길을 이미 아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 남자의 품에 안겨 밤새 흔들리는 내내 수백 번, 수천 번 상상한 순간이었으니까.

“허, 헉.”

마침내 샛문을 벗어난 베스는 관상용 덤불 뒤에 몸을 구겨 넣었다.

그새 일을 마친 인부들이 다시 마차에 올라타고 있었고, 사용인들 또한 저택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식당 문으로 들어서는 집사를 파리한 안색으로 붙잡는 시녀가 보였다. 곧 시녀만큼이나 허옇게 얼굴이 질린 집사가 저택 안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모두가 방심하고 있는 지금.

속력을 높이기 시작한 마차의 짐칸으로 작은 인영 하나가 탁, 뛰어올랐다.

사라진 부인을 찾기 위해 온 저택을 뒤지기 시작한 사용인들도, 영문을 모르고 재차 짐칸을 검사받게 될 인부들도 감히 상상치 못했다.

설마 허름한 짐칸의 곡식더미 속에 공작부인이 숨어 있을 리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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