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유난히 하늘이 흐린 넥서스의 초겨울 밤이었다.
눈인지, 비인지 모를 것들이 한데 엉겨 붙어 습윤한 땅을 더욱 질척하게 만드는 나날의 연속이었는데, 오늘도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여전히….”
저택으로 들어서는 젊은 가주를 향해 집사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삼가는 끝말을 알아들은 데베르의 눈썹이 순간 미세하게 일그러지긴 했으나, 노련한 집사조차도 눈치채지 못할 찰나였다. 애초에 베스가 식사며 일체의 활동을 거부한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기에 새삼스러운 얘기도 아니었다.
그와 함께 데베르의 귀가는 조금 더 빨라진 참이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는 공작의 눈가에 난 이질적인 상처는 보는 이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지만, 감히 묻는 자는 없었다.
굳게 닫힌 침실 문을 열기 전, 데베르는 먼저 서재로 향했다.
벽에 난 작은 거울 앞에 서자, 그곳엔 지나치게 말끔한 사내 하나가 들어앉아 있었다. 무표정하게 스스로를 응시하던 데베르는 셔츠 단추 몇 개를 헐겁게 풀고, 말끔하게 넘긴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헤집었다. 이마 위로 흘러내린 짙은 잿빛 머리카락이 그와 닮은 눈동자를 반쯤 가리자, 제법 정신 나간 이 같아 보였다.
마지막으로 데베르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얼추 아물어가는 얼굴의 상처를 확인했다. 거칠한 상처의 겉면을 느릿하게 훑다가 자연스레 테이블 위의 편지칼을 쥐었다. 촉이 날카로운 편지칼의 모서리가 뺨에 난 붉은 길을 예리하게 긁어냈다. 흐르지도 못할 만큼 살짝 삐져나온 핏물을 훔쳐내면 제법 베스가 그에게 상처 냈던 첫날과 비슷한 정도의 상처가 완성되었다. 물론 그조차 어둠을 빌려야 할 만큼 조악한 거짓이긴 했지만.
그제야 침실을 향해 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약간의 즐거움마저 담긴 걸음의 이유는 단연코 견고한 그의 성안에 있기로 결심했을 여자 때문이었다.
“…베스”
멀거니 초점 없는 시선을 허공에 두고 있던 베스의 고개가 소리가 나는 곳으로 돌아갔다. 약간은 놀란 듯한 표정 속엔 어느덧 이 비틀어진 관계에 순응한 안주도 얼핏 비쳤다.
데베르는 비틀거리며 자그마한 여체에게로 가 안겼다. 키도, 덩치도 큰 남자가 그보다 한참은 작은 여자의 품에 매달리다시피 쓰러진 모습은 흡사 커다란 짐승이 먹잇감을 덮친 모습과도 비슷했다.
그의 무게를 못 이겨 시트 위로 넘어진 베스는 제 위로 덮쳐오는 검은 그림자를 말없이 끌어안았다.
“…무서워. 무서워, 난.”
베스는 고통을 속삭이는 이 남자의 목소리가 꼭 독한 위스키 같다고 생각했다. 듣고 있으면 속절없이 취하는 기분이었고, 들을 때마다 속이 타는 듯했으니까.
공연한 다독임을 대신해 그의 목덜미를 쓰다듬던 베스는 더 생각을 이어가는 것보단 눈을 감기로 택했다.
가슴팍에 안긴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몇 번 쓸어내리다 보면 이 남자도, 저도 잠들 것이다.
그게 매일 밤을 버티는 베스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꿈이 너무 길어.”
데베르는 몽유병을 앓는 환자 행세를 기꺼이 해내는 중이었다.
그에게 상처를 내는 순간, 베스의 눈동자에 돌연 일어난 이채는 분명 죄책감이었다. 죄책감은 울며불며 과거 속에서 헤매는 여자를 현실로 데려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런데 망설일 이유가 있을까. 죽을 듯이 그를 밀어내던 여자가 스스로 품을 내주고, 밤이 새도록 상처 난 뺨을 쓸어내려 주는데.
그날 밤 이후, 부러 베스의 앞에서 그녀가 챙겨준 약을 먹는 척했다. 전부 몽유병이란 이 같잖은 연극을 하기 위한 전초전이었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갔을 뿐이야.”
쓰다듬던 여자의 손길이 잦아들 무렵. 잠긴 듯 낮은 목소리가 침실 안을 낮게 울렸다.
“떠나지만 마.”
들려오는 대답이 없어도 홀로 하는 밀어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 꿈이 깨도, 여전히 곁에 있으면 좋겠어.”
데베르가 더욱 틈 없이 몸을 맞춰오자, 바스락거리는 시트 소리가 유독 자극적으로 들려왔다. 하지만 베스는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잠이 든 척 입술을 닫을 뿐이었다. 미온한 온기가 짧게 입술에 부딪혔다 사라졌지만, 눈을 뜨진 않았다.
그는 입 맞출 때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못 본 척해줬다. 대신 잠든 체하며 얌전히 눈을 감은 여자를 오래도록 바라봤다. 이 여자의 모든 게 제 것이어야만 했다. 스쳐 지나가는 시선, 때때로 끓어오르는 감정, 심지어 발치에 드리운 그림자까지.
그런 의미에서 베스가 그의 흉터에 죄책감을 가지는 건 나쁘지 않았다. 그 무거운 마음으로라도 붙잡아 놓고 싶었으니까. 자신이 아는 베스 제인스는 아물지 않는 상처와 해결되지 못한 흉터를 마주하는 한, 클리프를 떠나지 못 하리라 확신했다.
“잘 자.”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데베르도 지친 눈을 감았다.
이 여자의 향에 취한 밤이 또 한 번 지나가고 있었다.
이대로 눈가가 아니라, 심장 한 가운데에 상처가 난다 해도 견딜 수 있을 만큼 중독적인 안온함이 적막한 침실을 채워나갔다.
정오가 돼서야 눈을 뜬 베스는 제 손에 감긴 새 붕대의 매듭을 만지작거렸다. 서투른 매듭의 끄트머리가 베스의 손장난 아래 이리저리 꼬아졌다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그 남자와 밝은 빛 아래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인지, 아니면 기면증이 다른 방향으로 악화한 것인지 한 번 잠들면 오랜 시간을 깨어나지 못했다. 눈을 떴을 때 비어있는 옆자리는 어느덧 당연한 일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베스는 흔한 장식품 하나 없이 비워진 방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침대와 협탁밖에 없는 공간을 보자, 새삼 제가 그간 무슨 짓을 했는지가 절절히 와닿았다. 그리고, 그 이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식사를 준비할까요?”
문을 두드린 시녀가 물었다.
창밖의 하늘은 그간 질리도록 내리던 눈비가 드디어 그쳐 있었다. 희끄무레한 구름을 뚫고 나온 선명한 빛줄기가 새벽 서리에 시들어가는 정원을 비췄다.
“…준비해줘요.”
조금은 위태롭게 침대를 벗어난 베스는 그간 단 한 번도 스스로 열지 않은 침실 문을 열었다.
“식사도, 옷도 준비해줘요.”
“네? 네!”
딱 한 걸음만 떼자.
베스는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억지로라도 메마른 입안에 수프를 집어넣고, 꼴사납게 화려하기만 한 옷을 걸치고, 어울리지도 않는 화장을 하고, 벗어날 수 없는 베스 클리프란 이름의 족쇄를 발에 찬 채 그렇게 딱 한 걸음만.
“차를 대기시킬까요, 부인?”
“네. 제국 병원으로 갈 생각이에요.”
그 남자에게 필요한 약이라도 가져올 생각이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낯선 시녀의 얼굴에 드디어 부인을 보필한다는 기쁨이 떠오르는 게 보였지만, 베스는 그 순수한 얼굴이 외려 버거웠다. 자꾸만 그 위로 루카의 말간 얼굴이 겹쳤으니까. 그 잔상을 지워보려 급히 발걸음을 떼던 베스의 어깨가 움칠했다.
“욱…!”
습관처럼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이러다 보면 또다시 귓가에 형장의 바람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안돼. 더 이상 그 기억은 싫어.
도리질을 치던 베스는 어느새 아무도 없는 복도를 내달리고 있었다. 경험이 부족한 전담 시녀는 부인의 곁을 떠나지 말라는 공작의 명령은 잊어버리고 드레스 룸으로 간 탓에, 정신없이 저택을 헤매는 베스를 잡아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헉, 헉….”
끊임없이 이어지는 방들을 지나치기를 몇 번이나 했을까.
낯익은 마호가니 문이 보일 때에서야 베스는 뜀박질을 멈출 수 있었다. 감옥에 갇힐 때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걷지도 않았던 몸뚱이는 쉴 새 없이 모자란 숨을 헐떡였다.
“부인? 어디 계세요?!”
저를 부르는 소리에 갑자기 문고리를 돌린 건 충동이었다. 어디로든 숨어버리고 싶은 제 내밀한 충동.
달칵. 닫히는 잠금쇠 소리와 함께 바깥에선 부인을 찾는 시녀의 앳된 외침이 들려왔지만 나갈 마음은 들지 않았다.
베스는 곧 나가리라, 애써 고개를 주억이며 떨어뜨린 시선을 그제야 올려 들었다.
서재…?
낯익은 문이라 생각했는데 실상은 낯선 공간이었다.
벽면엔 즐비하게 책이 꽂혀있었지만, 모두 한참의 세월이 지난 고서들이었다. 늘 결벽적으로 깔끔하다시피 한 클리프 저택의 공간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쌓인 책들 위엔 먼지가 소복했다.
방 안을 거닐던 베스는 살며시 손을 올려 그곳의 유일한 테이블을 쓸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한 책장과 달리, 가장 먼저 먼지가 쌓였어야 할 테이블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다.
누군가 주기적으로 이곳을 오갔다는 뜻이었다.
“아.”
반질한 테이블 모서리에 새겨진 서명을 보고서야, 베스는 이곳이 누구의 공간인지를 깨달았다.
카시우스. 이젠 죽어버린 어미의 원치 않는 표적이자, 제 남편인 데베르 공작의 친아비.
흠칫, 본능적으로 물러난 손이 허공을 맴돌았다.
그때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거기 계세요?”
발 빠르게 저택을 한 바퀴 돌아도 부인을 찾지 못한 시녀는 어쩔 수 없이 금단의 영역이나 다름없는 옛 서재 문을 두드리는 중이었다.
이젠 베스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나가서 의도치 않게 골려 먹은 시녀에게 사과할 수밖에. 이곳이 카시우스의 공간임을 안 이상, 더 있을 미련도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베스는 걸음을 뗄 수 없었다.
마치 뭐에 홀린 듯, 테이블에 달린 한 칸짜리 서랍으로 손이 향했다. 손톱만큼 난 틈 사이로 하얀 무언가가 보였기에.
드르륵, 서랍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시녀가 밖에서 뭐라 웅얼거렸지만, 베스의 모든 감각은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익숙한 약통에 꽂혀있었다.
아닐 거야. 정말로 아닐 거야.
되지도 않은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뚜껑을 연 약통 속엔 그 남자를 밤마다 몽유병에 들썩이게 했을 흰 알약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럼, 지금까지….”
앞에서 먹은 약은 뭐지. 내가 모르는 사이 새 약을 가져왔나. 아니면 애초에 이 약이 아니었던가. 몽유병은, 그 부작용은 대체 왜.
두서없이 떠오르는 질문들에 좀 괜찮아졌던 속이 다시금 메스꺼워졌다.
툭 하고 살짝 흔들린 손길에 바닥 위로 약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엉망이 된 발밑을 망연히 바라보던 베스의 눈이 열린 서랍에 남은 마지막 물건에 닿았다.
끝이 날카롭고, 정교한 편지칼.
그리고 그곳에 잉크 대신 묻어 있는 핏자국.
“부인?! 혹시 편찮으세요? 문을 열어도 괜찮으실까요?”
조심스레 들려오던 노크 소리가 쾅쾅 귓전을 때리는 순간. 아, 베스는 탄식인지 깨달음인지 모를 한 마디를 뱉어냈다.
속절없이 달아오르는 눈에 오랜만에 물기가 차올랐다. 일렁이는 시야 사이로 그곳에 있을 리 없는 오만한 잿빛 눈동자가 보였다.
“…당신은, 나를.”
헛된 환영일지언정 아무 상관 없었다.
무엇이 진짜인지는 몰라도,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했으니까.
데베르 클리프. 당신은 지금까지 나를 속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