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막아 놓은 둑이 터지듯, 한 번 나오기로 작정한 눈물은 기어코 베스 안의 모든 것들을 뽑아낼 것처럼 끝없이 흘러나왔다. 서러운 들썩임이 한참을 이어졌다.
베스는 그 와중에도 얘기를 계속해달라 부탁했다. 잠시간 당황하던 딕시도 연신 베스의 등줄기를 토닥이며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아니, 나는 네가 아무것도 모를 줄은 모르고…. 그러니까 네가 보스넬에 수감된 첫날…”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얘기의 종지부를 마침내 들었을 때, 베스는 얕게 헐떡이고만 있었다.
결론은 간단했다.
시체처럼 들것에 실려 즉위식에 등장한 여체는 하워드의 사촌이자 브리틴의 첩자가 맞았고, 그 뒤를 이은 첩자는 예상외로 클리프 부인이 아니라 그녀의 전담 시녀였던 루카라는 계집애라고. 영악한 소녀는 호시탐탐 클리프 공작을 해할 기회만 엿보며 시녀 노릇을 했으며, 들킬 위기에 처하자 거금을 훔쳐 들고 항구로 가다가 사고로 즉사했다고.
애꿎은 수감 노릇을 한 클리프 부인의 앞으로 떨어진 배상금의 액수까지 들을 수 있었다.
“그럼 나는….”
“하워드 작자는 좀 찾으려면 제대로 찾을 것이지, 왜 애먼 너를 데려다가 조카딸이라고 오해했대?!”
벌컥 화를 내는 딕시를 바라보던 베스는 소식지로 눈길을 떨구었다.
이젠 그녀의 말보다, 소식지에 적힌 기사 내지는 밀담이 남은 것을 설명해 줄 차례였다.
우스운 얘기들이 즐비하게 적혀 있었다.
한미한 간호사와 군대장의 첫 만남, 실패한 청혼, 헤어진 연인을 미친 듯이 찾던 공작과 백작가의 잃어버린 조카딸로 착각 받아 하루아침에 영애가 된 그녀의 재회, 하지만 알고 보니 그저 보호구역 출신의 고아에 불과한 불쌍한 아가씨, 그런 그녀를 여전히 사랑하는 공작.
그 속에서 베스는 그저 사랑스럽고 애타는 데베르만의 클리프 부인이었다.
“재판 때 깜짝 놀랐잖아. 데베르 공작님이 그런 분이신 줄은 정말 몰랐어.”
하, 베스는 작게 실소했다.
턱 끝에 마지막으로 매달려있던 눈물 한 방울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공작님이 정말 너를 사랑하시더라.”
“…그러게.”
나를 정말 사랑하시나 봐.
이젠 자신도 그렇게 거짓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남자가 소식지를 통해 그랬듯이.
* * *
조금 이르게 저택으로 돌아온 데베르는 그가 도착하자마자 집사가 전해 준 소식에 미간을 찌푸렸다. 음식은커녕 물 한 모금조차 입에 대지 않는다는 부인에 관한 얘기는 여러모로 그의 신경을 끊어먹기에 충분했다.
‘딕시 양이 오신 이후, 더 힘들어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베스의 기분이나 전환하라고 불러놨더니, 분명 그 새털같이 가벼운 입을 놀려 무슨 얘긴가를 한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란 걸 그는 잘 알았다.
“베스.”
아름답고 안온한 그의 감옥을 열고 들어간 데베르는 대번에 베스를 찾아냈다. 불빛 한 점, 온기 하나 없는 공간이었지만 데베르는 그 어느 때에도 베스를 찾아낼 수 있었다. 베스를 향한 집요함이 그득한 이상, 모든 건 당연한 일이었다.
창턱에 그림처럼 앉아있는 베스의 모습은 물기로 흠뻑 젖어 있던 어제와 달리, 만지면 바스러질 것처럼 건조하게 굳어 있었다.
시선을 옮긴 데베르는 커다란 침실 한 편에 놓인 협탁으로 다가가 차근히 손목시계를 풀었다. 모서리가 날카롭게 빚어진 커프스를 빼는 것은 물론, 셔츠 소맷단을 걷어 단추조차 보이지 않게 했다. 행여 저 여자의 몸 어딘가에 또다시 상처라도 낼까 봐.
어제의 기억 탓에 약간은 염려 섞인 채비였다.
베스는 고요히 정제된 그의 행동을 응시했다. 제 할 일을 마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죄책감도, 심지어 두려움조차 없어 보이는 여유롭기만 한 걸음이 베스의 가슴 어딘가를 콱 틀어막았다.
“마셔.”
입술께로 가까워지는 물잔에 베스는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 미약한 반항이 오래가지 못하리란 건 잘 알았다.
베스는 틀어진 시선을 여전히 허공에 고정한 채 손만 들어 올렸다. 으음, 그가 낮은 목소리로 그 손길을 거절했다. 단단히 쥔 잔은 여전히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제야 베스는 데베르와 눈을 마주쳤다.
집요한 남자란 건 알았다. 온갖 날카로운 것을 치운다던 공작은 심지어 벽에 걸린 액자마저 치워버렸으니까. 액자 속의 얇은 유리마저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남자였다.
지금 들고 있는 크리스털 물잔도 그가 침실을 들어오면서 따로 들고 들어온 것이었다.
“한 모금만.”
모든 통제권을 쥔 건 자신이면서, 권력을 양도하는 것처럼 구는 태도조차 여전했다.
베스의 목구멍이 작게 꼴깍이며 물을 삼키는 걸 보고서야 데베르는 멀찍이 떨어진 협탁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손은. 많이 아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제 손을 들어 올리는 남자를 노려보던 베스는 헐겁게 그 손길을 내쳤다. 붕대 아래의 상처가 아릿했지만, 그 정도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데베르는 예의 무감한 얼굴로 침대에 널브러진 약통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몰리 부인이 처방한 약인데. 왜, 뭘 못 믿어서.”
한 알도 줄지 않은 약통을 확인한 데베르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서늘한 말투에서 서서히 묻어나는 그의 화를 베스는 알고 있었다.
밋밋한 베스의 목울대가 몇 번 울렁거렸다. 정말 질리도록 울어서 다신 울고 싶지 않은데. 거짓말에 서툰 눈은 제일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은 저 지독한 남자 앞에서 또다시 뚝뚝, 눈물을 떨구어 냈다.
“…이제, 무슨, 소용이 있길래.”
끅끅거리는 목구멍에서 듣기 싫게 토막 난 단마디가 꺼내졌다.
약이니 치료니. 저를 죽이고 싶어 안달이던 남자가 어째서 지금은 살리지 못해 안달인지도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할 수 있는 게 없어 베스는 고개를 숙였다. 깊이. 더 깊이. 저 남자가 제 표정 따위 볼 수 없도록.
풍성한 머리카락이 앞으로 쏟아지자 얇은 슬립 아래의 멀건 날갯죽지가 훤히 드러났다. 그 연약한 등을 어루만지며 데베르는 잠시 고민했다.
기민하게 날 선 눈동자가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창밖을 응시했다. 사람들은 유난히 겨울이 빨리 돌아오는 넥서스를 보며, 다른 계절은 겨울과 겨울 사이를 잇는 잠깐의 바람에 불과하다고 말하곤 했다. 만약 여자와 저 사이의 아이가 살아 있었다면, 그 아이는 넥서스의 짧은 바람 같은 여름에 태어났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또 가질 수 있어, 베스.”
지극히 다정한 목소리로 데베르는 일렀다.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런 목소리로, 이런 말을 해야지만 베스 제인스는 그를 돌아볼 테니까.
“아이는 또 가지면 돼. 네가 원한다면.”
“….”
하지만 그건 흔치 않은 데베르의 실수였다.
발갛게 물든 눈이 그를 망연히 올려다봤다. 기다란 속눈썹에 방울처럼 매달려있던 눈물도 투둑, 뺨을 타고 미끄러져 내리는 게 보였다. 제기랄. 데베르는 잇새로 기어 나오는 욕을 겨우 눌러 내렸다.
불현듯 벌떡 일어선 베스가 문을 향해 달려갔다. 얼마간 그 휘청거리는 달음질을 지켜보던 데베르는 그녀가 문고리를 돌리기 직전에 허리를 낚아챘다.
“놔…! 읏, 놓으라고!”
울며불며 버둥거리는 베스는 이성을 잃은 채 소리 질렀다. 애초에 딕시의 말을 듣던 순간부터, 아니. 그 이전 황제 즉위식에서 올리비아를 본 순간부터 베스 안의 어떤 끈은 끊어진 지 오래였다.
“싫어, 싫다고! 당신 닮은 아이도 싫고, 클리프 성도 싫어. 싫단 말이야…!”
툭 튀어나온 거짓말에 베스는 안도했다. 다행이었다. 적어도 이 냉정한 남자 앞에서 사실 나는 어린 데베르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는 꼴사나운 진심을 말하진 않았으니.
아… 아니구나. 베스는 스스로를 일깨웠다. 그건 지나간 진심이었다.
“넌 지금 아파, 베스…!”
“허, 흐흑. 헉….”
그의 말마따나 잔뜩 상기된 얼굴의 베스는 입술 새로 연신 더운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겹친 몸을 통해 전해지는 뜨거운 체온에 데베르 또한 열기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열나잖아.”
식은땀에 젖은 베스의 이마를 닦아주려 데베르가 한 손을 푸는 그때. 결박이 풀린 흰 손이 성마르게 위로 튀어 올랐다. 아, 그의 품을 벗어나려 발악하던 베스의 몸부림이 데베르의 짧은 신음에 뚝 멈췄다.
“…공작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손톱 끄트머리가 타인의 살점을 뜯는 느낌이 선연했기에.
초점을 잃고 헤매던 베스의 눈빛이 문득 이지를 되찾았다. 말끔한 남자의 눈 아래에 길게 난 손톱자국이 보였다. 그 가느다란 실금 사이로 새빨간 피가 차오르는 것도. 베스는 조금 전까지의 미열은 온데간데없이, 혈관에 얼음을 때려 붓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차게 식는 걸 느꼈다.
“아….”
데베르는 부러 의미 없는 신음성을 조금 더 길게 뱉어봤다. 전장을 개처럼 굴러먹던 그에게 고작 이런 손톱자국 따위가 아플 리 없었다. 하지만 이 여자가 이런 표정을 짓는다면….
투박한 손으로 얼굴을 더듬자, 작은 손이 그 위로 겹쳤다.
“공작님… 아, 아픈 건.”
걱정으로 울먹거리는 새카만 눈동자를 보는 순간, 데베르는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이 여자가 잠 못 드는 그를 돌아보고, 흉터를 어루만지며, 때론 고개를 기울여 눈을 마주쳐오던 그 예전으로.
“…이거구나.”
이거였어. 어쭙잖게 떨어대는 다정보다 더 나은 것.
데베르는 눈을 내리떴다. 그가 시선을 피하자 더 안절부절못하는 여자가 느껴졌다. 그 순해 빠진 머릿속이 훤히 보이는 것만 같았다.
죄책감을 느끼겠지. 특히나 아끼고 사랑하던 이들은 모두 죽었으니 전부 제 탓이라 자책하면서.
그러니 고작 실금 같은 상처 하나 입히고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는 거겠지.
“괜찮아.”
데베르는 그 허물어진 틈을 놓치지 않고, 베스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자신이 또 누군가를 다치게 했다는 죄스러움에 벌벌 떠는 여린 등을 달래듯이 쓰다듬으며, 그는 오랜만에 되찾은 품에 기꺼이 무너져내렸다. 입술을 뻐끔거릴 때마다 들이마셔지는 체향이 아찔할 만큼 달큼했다.
“그냥 자자, 나랑.”
그래서 나온 나직한 애원이었다. 마음이 터질 듯이 조여왔기에.
베스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데베르는 고개를 약간 비틀어 물기 어린 턱에 입 맞췄다. 미미한 짠 기운이 남은 입술을 그는 느릿하게 감싸 물었다.
“제발.”
잿빛 시선이 끈질기게 베스를 좇았다.
“….”
소식지 속의 연인이 어둠 속에서 가만히 눈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