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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57화 (157/206)

157화

데베르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베스의 몸 위로 덮쳐들었다. 더 재빠르고, 잔악한 적군들을 숨 쉬듯 대면했던 그에게 고작 몇 걸음 물러서 있는 여자의 손에서 유리 조각을 뺏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죄 없는 입 안을 쑤시려던 유리 조각이 챙,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그들의 발치엔 모가지가 꺾인 꽃들과 조각 난 화병이 꼴사납게 짓밟히고 있었다.

“미쳤어?!”

“읏…! 비, 켜!”

양손이 붙잡힌 베스는 사력을 다해 몸부림쳤다.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다. 이 남자의 손길이든, 끈질긴 눈빛이든, 서늘한 향이든. 그 무엇으로든 상관없이.

널브러진 유리 파편들을 일별한 데베르는 제 가슴에 꽂히는 주먹질과 마구잡이로 차대는 발길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버둥 치는 베스의 몸을 안아 침대 위로 옮겼다. 그러나 그런 수고가 무색하게 바르작거리는 몸뚱이는 시트에 닿기가 무섭게 튕겨 올랐다.

“피가 나잖아, 베스.”

다소 신경질적인 손길이 침대를 벗어나려는 베스를 붙잡았다.

베스는 덫 같은 그의 손아귀 힘을 떨쳐내려 발악을 했다.

당기면, 벗어나고. 또다시 당기면 벗어나는. 지루한 싸움이 몇 번인가 반복되다, 결국 데베르는 제 품으로 여자를 끌어당겼다.

“싫, 어…! 싫-”

데베르는 제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하지만 한 손으론 피가 흘러내리는 여자의 손목을 감싸고, 나머지 손으론 여린 몸을 제 안으로 욱여넣는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다쳐. 가만히 있어.”

눈에 띄게 뚜렷한 목울대가 느릿하게 울렁였다.

“헉, 헉… 싫….”

한참을 그의 어깨를 내리치던 베스의 몸이 늘어졌다. 더 이상 대거리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싫단 말이야. 점점 맥이 빠지는 중얼거림이 입안을 맴돌았지만, 새 나오는 건 미미하게 할딱이는 숨뿐이었다.

데베르는 그제야 고개를 숙여 눈물로 가닥 진 여자의 속눈썹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 밑으로 유리 조각에 끄트머리가 베인 입술도 보였다.

짧은 후회가 밀려왔다. 조금만 더 빨랐다면, 부질없는 고민을 잠시라도 멈췄다면. 그랬다면 적어도 지금 보이는 이 상처만큼은 생기지 않게 했을 텐데.

“…혀라도 잘라내려 한 건가?”

굵은 손가락이 핏물이 맺힌 입술을 파고들었다. 혹시나 입 안에 상처가 났는지를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저항 없이 벌어지는 입 안의 열기가 그의 손가락을 감싸 안았다.

데베르는 축축한 손가락으로 붉은 입술을 몇 번이고 쓸어냈다. 거칠한 제 손끝에 보기 싫은 선혈이 모두 묻어날 때까지. 그리고 탈력감에 젖은 작은 몸이 온전히 제게 기대올 때까지.

“왜, 아직도….”

희미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 데베르는 더욱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 편이 더 나았으리란 것은 곧 알 수 있었다.

“날, 왜 아직도 죽이지 않았나요….”

잔인한 물음과 함께 그를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무심할 만큼 새카맸다. 물기 어린 눈동자는 열린 창밖의 하늘을 담아 놓은 것 같았다. 그 아득함이란. 데베르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대체 왜….”

다시금 벌어진 입가의 상처를 타고 또다시 징글맞은 피가 기어 나오는 게 보였다.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그 상처를 매만지던 데베르는 겨우 입술을 뗐다.

“넌 죽을 수 없어.”

고작 그뿐인 말을 하기 위해 몇 번이고 가슴을 들썩였단 사실이 우스웠다.

“넌, 내 곁에 살아있을 거야. 언제든, 언제고.”

고집스런 다짐을 아로새기기라도 할 것처럼, 데베르는 베스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줬다. 하지만 이상했다. 분명 부드러운 여체가 손에 닿는데, 그 미온한 숨결이 제게도 전해지는데 정작 그걸 끌어안은 품은 텅 빈 것 같다니.

베스는 더는 울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지 않아도 온몸이 이미 축축했다. 울지 않는 대신, 온통 물기에 젖은 저와는 달리 버석한 소리가 날 만큼 건조한 남자의 눈을 바라봤다.

“…그게 마지막 벌이구나.”

“…벌?”

벌. 그 한마디에 어떤 순간에도 동요치 않던 잿빛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데베르는 짧게 조소했다.

벌이라니. 제 곁에 살아 있는 게 벌이라니. 그때까지만 해도 어렴풋하던 막막함이 몸집을 불려 덮쳐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당신은 카시우스를 닮았어….”

잘 벼린 말은 칼보다 예리했고, 총보다 빨랐다.

“카시우스 공작이 내 어머니를 죽이지 않은 이유가… 아마, 당신이 나를 죽이지 않으려는 이유겠지?”

흔들리는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원망이 묻어났다.

“…하지만 틀렸어.”

“말해줘. 뭐가 틀렸는데.”

“내겐 당신을 즐겁게 할 고통이 더는 없으니까.”

내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베스는 그리 말하는 중이었다.

“클리프가 싫어.”

상처 입은 입술의 부지런한 움직임과 달리, 훅 끼쳐오는 한기에 떠는 몸은 본능적으로 그의 품을 파고들고 있었다.

“증오해. 클리프를.”

제 곁을 떠나간 얼굴들이, 이젠 기억조차 희미해진 그 얼굴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아버지, 할멈, 루카, 어머니, 그리고….

“당신을 미워한다는 뜻이야.”

데베르 클리프. 한때는 감히 제 것이라 생각했던 남자.

데베르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베스를 끌어안은 팔을 당기고 처박듯이 고개를 숙이자, 이제는 고른 숨을 내쉬는 여자의 가슴팍이 그의 귓가에 온전히 닿았다.

“정말… 싫어.”

그 대가로 여린 몸통을 울리는 잔인한 고백이 더없이 선명하게 들려오긴 했지만.

싫어. 싫다고. 같은 말을 중얼거리던 베스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원치 않는 수마가 저를 덮쳐오는 순간에도, 남자는 끌어안은 손을 풀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보다 먼저 잠이 든 것 같기도 했다.

데베르는 핏자국을 모두 지운 새 시트 위에 품 안의 베스를 눕혔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여체에겐 푹신한 매트리스마저도 위험스러워 보여 그를 안달 나게 했다.

“안달이라….”

저도 모르게 정의한 그 감정의 이름을 데베르는 몇 번 되뇌었다.

그래, 안달이구나. 그는 순순히 인정했다. 클리프가 싫다고, 싫다 못해 증오한다고 고백하던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조급해진 마음은 분명 안달이었기에.

침대맡에 걸터앉아 가져온 약품 상자를 열었다. 각종 연고며, 붕대, 소독약. 그의 공간에서는 있어 본 적 없는 그것들은 모두 이 여자가 바리바리 품에 싸 들고 들어온 것이었다.

“네가 잠들어 있으니 아무것도 모르겠어.”

소독약과 붕대를 든 손이 어설프게 움직였다.

상처 입는 데는 익숙하지만, 그 상처를 동여매는 데는 서툴렀다. 그 아둔한 어리석음을 알지 못할 여자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붕대의 끄트머리를 매듭짓고 나자 갈 길을 잃은 손이 불현듯 밋밋한 베스의 뱃가죽으로 향했다.

유산. 그 이질적인 단어는 어긋난 관계의 간극을 가장 거대하게 메운 것이었다.

“하.”

문득 헛웃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제 안에 멋모를 허탈감이 밀려왔기에.

클리프의 성을 가진 아이 따위 원해본 적도 없으면서. 심지어 경멸하기까지 했으면서.

그저 베스와의 끊지 못할 유일한 고리가 될 수도 있었던 존재의 상실에 대한 아쉬움일 뿐이었다.

영악한 속내는 어떻게든 이 여자를 붙들 궁리만 하고 있었으니까.

“…넌 무슨 생각을 했어.”

증오하는 클리프이니 원하던 결말이려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그곳을 달래듯 어루만지던 그가 낮게 속삭였다.

“그래도 너무 후련해하지는 마.”

염치를 모르는 욕심이 끝없이 피어났다.

* * *

침실 문을 연 베스는 이내 그 문을 다시 닫았다. 복도에는 자신을 공작부인의 전담 시녀라 소개하는 이 하나가 서 있었다. 어디든 가실 곳이 있으시면 동행하겠다는 시녀의 말은 보필을 빙자한 공작의 감시를 의미했다.

방 안을 둘러보던 베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젯밤의 난리를 잊은 침실은 더할 나위 없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비단 핏자국과 유리 조각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것은 그 어떤 것이든 자취를 감춘 모양새였다.

물론, 그 어떤 것보다 저를 날카롭게 찌르던 남자의 존재가 사라진 게 가장 컸다.

뭐든 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 그 존재가 바로 지금의 베스 클리프였다.

“베스! 들려?! 나야!”

베스가 비감에 빠지려는 찰나, 우렁찬 클랙슨 소리와 함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딕시…?”

창문을 열었을 땐 이미 차의 주인은 저택의 계단을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왈칵, 문이 열림과 동시에 안겨 온 딕시에게서 푸근한 그녀만의 온기가 느껴졌다.

“베스, 네가 걱정돼 미치는 줄 알았어. 보스넬 수감이라니! 그래도 정말 다행이야. 이젠 완벽히 누명을 벗었잖아. 하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했어. 네가 첩자라니.”

딕시는 으레 그렇듯 못다 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워드 백작도 진짜 천치 아니야?! 뭐, 그래도 넌 이미 클리프 부인이니, 완벽한 귀족이나 다름없어. 아니. 가장 완벽한 귀족이지. 클리프 부인인데. 사람들 얘기 너무 신경 쓰지 마.”

“잠시, 잠시만….”

눈앞의 딕시의 얼굴이 물에 빠진 것처럼 일그러졌다. 낭랑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멀어지고, 왱왱거리는 음산한 소리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보스넬 구치소를 나오던 날, 처형장에서 저를 속절없이 떨게 만들던 그 바람 소리였다.

아냐, 이건 진짜가 아니야.

베스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환영처럼 아른거리던 단두대 곁의 흰 깃발이 푹 꺾였다.

“루카 그 꼬맹이가 첩자라곤 정말 상상하지도 못했어. 순진하게 너를 앞세워 일을 도모한 것 좀 봐. 뒤통수를 쳐도 유분수가 있지.”

번쩍 정신이 들자마자 들려온 루카라는 이름에, 베스는 기어이 울음을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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