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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56화 (156/206)

156화

“갑자기 강한 햇빛을 보시면 눈에 무리가 가실 수 있어서요.”

햇빛? 맥없이 팔이 붙잡힌 그녀가 휘청거리며 일어섰다. 한 발, 한 발. 걸음을 뗄수록 습한 죽음의 냄새가 아닌, 청량한 넥서스의 겨울 향이 맡아졌다.

결국 이곳을 나가는구나. 결국엔.

“저는, 형장으로 가나요…?”

울컥, 솟아나는 눈물을 애써 참은 채 입술을 뗐다.

그러나 들려온 건 생뚱맞은 대답이었다.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부인께선 방금 무죄 판결받으셨고, 지금은 데베르 공작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형장으로 가는 건 그 첩자 한 명뿐이죠.”

앞이 안 보이는 베스는 본능적으로 제 곁에 선 보초병의 소매를 붙잡았다.

불현듯 턱 막히는 숨통에 단말마 같은 쉰 소리가 뚝, 뚝 턱 끝을 타고 떨어졌다.

“그, 첩자는, 지금-”

“자네, 형장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그러나 어디선가 날아온 걸걸한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끊어 먹었다.

“얼른 가봐! 부인은 내가 모실 테니.”

“저요? 거긴 제 담당이 아닐 텐데….”

“뭘 꾸물거리고 있는 거야!”

“아, 진짜 아닌데.”

기세등등한 호통에 붙잡고 있던 소매가 떨어져 나가더니, 타닥거리는 걸음 소리가 바쁘게 멀어졌다.

갑작스레 찾아온 적막에 베스는 더듬더듬 손을 뻗었다. 조급한 마음에 작은 가슴팍이 들썩였다.

“저, 절 좀 도와주시겠어요…?”

도움을 청하는 부름에도 들려오는 건 스산한 바람 소리밖에 없었다.

“….”

그때, 휘몰아치는 바람결에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란이 어렴풋이 섞여들었다.

“읏….”

벌벌 떨리는 손을 올려 안대를 풀어내자, 까만 점들이 환한 빛 사이로 점멸했다. 타는듯한 눈부심에 얼굴을 감싸고 신음하기도 잠시. 마지막으로 신중히 귀를 기울인 베스는 곧 걸어온 길의 반대편으로 비틀거리며 몸을 돌렸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위태롭던 걸음이 정신 나간 달음질이 되는 건 순간이었다.

저 멀리, 까마득한 곳에 서 있는 단두대가 가까워질수록 피비린내도 가까워졌다. 딱 그만큼, 뜀박질하는 베스의 심장도 거세졌다. 종내엔 귓가에 들리는 게 제 고동 소리인지, 바깥의 소음인지도 구별되지 않았다.

“헉, 헉… 흡.”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무리에 몸을 부딪쳤지만, 여린 몸을 끼워줄 틈은 어디도 존재치 않았다.

여기에 모여든 사람들은 대체 뭘 보기 위해, 무엇을 기대하며 서 있는 것이길래.

속이 메스꺼웠다. 아니. 메스껍다 못해 제 안의 어딘가가 썩어 문드러지는 것만 같았다. 입술을 한번 떼 보기도 전에 기어코 차오른 눈물이 앞을 가려 당최 뭘 할 수가 없었다. 잔뜩 떨어대는 손은 얼굴 언저리를 성기게 헛돌 뿐이었다.

“저기 온다!”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

무리의 가장 뒤에 선 베스는 헐레벌떡 근처에 쌓인 목재들을 밟고 올라섰다. 거친 나뭇결에 종아리가 쓸려도 아픈지를 몰랐다. 고작 이런 거로 엄살 피우기엔 그녀의 시야 속에 있는 한 여인이 더 아플 것이니까.

“아, 안돼…. 흑, 제발. 제발요.”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를 헐떡이는 애원을 들어줄 사람은 그곳에 아무도 없었다. 꼭 말을 못 하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아득한 막막함에 비명 같은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할 수 있는 게 없어 미친 듯이 제 가슴팍의 옷을 쥐어뜯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심장이 탈 것만 같았다.

“엄….”

죄책감에 제대로 뱉어보지도 못한 그 한마디는 지금도 응어리진 채 끝맺지 못하고 있었다.

“첩자는 넥서스에 필요 없다! 당장 죽여라!”

“우우, 마녀다! 마녀!”

사람들의 야유 속에 들것에 실린 바짝 마른 여체 하나가 단두대 위에 눕혀졌다. 건장한 간수가 다가와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 밑으로 올리비아의 머리를 집어넣었다. 의식 없는 몸뚱이는 제 몸에 무슨 짓을 해도 눈썹 한 올 깜빡하지 못할 것이었다.

베스는 휘청거리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제 곁에 사형대처럼 솟아오른 목재 하나를 꽉 움켜쥐었다.

“헉, 흐흑… 끕.”

가빠지던 숨이 불규칙적으로 끊겼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벌건 눈물로 어룽진 시선 끝에 무식하리만치 커다란 단두대 날이 보였다.

“대기!”

단두대 끝에 서 있던 간수가 흰 깃발을 들어 올렸다.

안돼. 안돼.

“그, 그…!”

높이 들린 깃발이 훅 떨어지는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이 멈추었다. 구경꾼들의 조롱 섞인 야유, 단두대의 줄을 잡아당기는 간수의 손짓, 심지어 폭주하듯 날뛰던 제 심장까지도.

이상스런 안락이 온몸을 덮쳐왔다.

어머니의 마지막을 배웅해야 하는데 어째서 허여멀건 눈이 쏟아지는 하늘이 보이는 걸까.

“여기 사람이 쓰러졌어요!”

“어머, 피, 피…!”

다리 사이로 미지근한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게 어렴풋이 느껴졌다.

아닌가. 피가 아니라 눈물이려나.

“베스!!!”

누군가 덥석 저를 껴안았다.

그게 베스가 기억하는 그날의 마지막이었다.

* * *

새하얀 침대 위에 그보다 더 하얗게 질린 여자가 누워있었다.

몰리 부인이 베스를 진찰하는 내내, 데베르는 굳은 듯이 침대 발치에 서 있었다.

클리프가의 차가 보스넬 구치소 앞에 도착했을 때, 분명 간수와 함께 그 앞에 서 있어야 할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데베르는 당장 전화통을 붙들고 웨인을 나가는 길목을 모두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게 실수였다. 이 여자는 도망치는 게 아니라 더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었으니까.

형장에서 쓰러진 여자를 발견했을 땐, 이미 멀건 다리 사이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손끝에 닿았던 뜨거운 선혈의 감촉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데베르 공작.”

부인의 안색은 더없이 어두웠다. 그녀는 잠시 잠든 베스를 돌아보더니, 그를 침실 밖으로 이끌었다.

“데베르….”

비통에 찬 음성에 데베르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말씀하십시오.”

“유산이야.”

상상치도 못한 단어에 그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유산이라니. 베스와 저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니.

“언제부터….”

그답지 않게 끝을 흐리는 물음에 부인은 부러 단단한 소리를 냈다.

“자네 탓이 아니야, 데베르.”

웃긴 소리였다.

데베르는 제 낯을 쓸어내렸다.

“베스는 유달리 몸이 약하고, 이런 말이 전혀 위로되진 않겠지만, 임신 초기에 유산은 꽤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라네. 나조차도 대여섯 번의 유산을 경험했으니까. 그리고….”

몇 번 말을 망설이던 몰리 부인은 고요히 무너지고 있는 데베르를 발견하곤 결국 그녀가 아는 진실을 말해주었다.

“이번에 친자 검사를 새로 하며 뒤늦게 알게 된 건데… 베스에게서 약물 반응이 나왔어. 것도 제법 만성적으로 중독이 된.”

“베스… 제인스가 말입니까.”

텅 빈 눈동자가 같은 사실을 되물었다.

믿기지 않았다. 베스가, 저를 구렁텅이에서 구해낸 그 베스 제인스가 어떻게 약물 중독일 수 있단 거지.

“경위는 몰라도, 오랜 기간 중독성 있는 수면제 내지는 각성제를 복용한 것만은 분명해. 수치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 베스가 그 약들을 구분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왜 그랬을까. 그런 몸으론 어쩌면 유산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지. 그것도 모르고 난 그 애에게 또 수면제를 주었으니….”

몰리 부인은 자신의 무지를 탓하며 고개를 저었다. 잔뜩 찡그린 콧잔등의 주름이 깊어졌다.

“베스가.”

무언가 말을 하려던 데베르는 우악스럽게 제 아래턱을 틀어쥐었다.

닫힌 문 너머를 바라보는 시선이 한없이 무거웠다.

“감옥에서 본 베스의 몸이 유독 쇠약해 보여, 부러 다른 검사를 따로 한 거였는데…. 그때 임신 사실까지 알았더라면.”

때 지난 후회를 만회할 수 있는 건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거대한 저택의 복도엔 위안받을 자격 없는 죄책감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 * *

베스는 깊은 밤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베스.”

데베르는 창가에 선 여자를 불렀다.

그녀는 하늘거리는 얇은 슬립 하나만을 걸치고도 추위가 느껴지지 않는지, 창문을 활짝 열고 있었다.

“베스.”

가까이 온 데베르가 어깨를 쥘 때에서야 겨우 눈길을 주었다. 그조차도 남자를 쳐다보는 것이 아닌, 그의 셔츠 자락 어딘가에 시선을 던진 것뿐이었다.

“누워. 쉬어야 해.”

베스는 저를 침대로 이끄는 손을 뿌리쳤다. 미미한 힘이었지만 남자는 알아서 물러나 주었다. 멍하니 그의 가슴팍을 응시하던 새카만 눈동자가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데베르는 그 앞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짓씹었는지 울긋불긋 찢어진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는 게 보였다.

“달라지지 않았겠지…. 설령 내가 당신의 아이를 배고 있었다 해도.”

“이미, 알고 있었어…?”

“….”

긴 침묵 끝에 그녀는 불이 꺼진 정원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알고 있었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당신이 데베르 클리프라는 건 변치 않는데.”

차가운 다정함이 담긴 목소리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태연하게 창턱을 붙잡고 있던 베스의 손등 위로 푸른 힘줄이 점점 불거졌다. 감정을 억누르는 가녀린 어깨가 거칠게 오르내렸다.

“우선 안정을-”

“손대지 마!”

다시 한번 데베르의 손을 거세게 뿌리쳤다. 그러더니 몸을 팩 돌려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어냈다. 있는 힘껏 몸을 부딪쳐 저보다 한참은 큰 남자를 제게서 떨어뜨리려 발버둥 쳤다.

“그만…!”

요령 없이 휘젓던 베스의 팔이 결국 스스로를 할퀴는 것을 보자, 데베르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어깨를 결박하듯 붙잡았다. 그러자 새된 비명이 적막한 공기를 찢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손대지 말라고! 흑, 제발 손대지 마….”

가쁜 숨 사이로 하릴없이 묻어나는 울음기가 데베르의 가슴 어딘가를 짓눌렀다. 잔뜩 허물어진 목소리로 손대지 말라는 말만 반복하는 여자의 모습에, 결국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헉, 헉… 흐, 흡.”

속박이 풀린 그녀는 몇 번 숨을 고르더니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동자가 남자를 노려보았다. 단 한 번도 베스는 데베르를 그런 시선으로 쳐다본 적이 없었다. 단연코 단 한 번도.

“…어디서부터 엉망이 된 건지 계속 생각했어.”

비록 분노일지언정 이채가 돌던 눈빛이 돌연 혼탁해졌다. 허연 손이 말릴 틈도 없이 협탁 위에 놓인 화병을 집었다.

“베스!”

쨍그랑. 침대 헤드에 부딪힌 화병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그가 미처 한 걸음 다가오기도 전이었다. 부들거리는 손이 날카로운 유리 조각 하나를 주워 들자, 파리한 손바닥을 타고 검붉은 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벳…!”

끓어오르는 고함을 힘겹게 눌러낸 데베르는 최대한 조심스레 제 손을 내밀었다.

“…베스. 그거 놓고 이리 와.”

베스는 흉터 가득한 남자의 손을 바라만 봤다. 그사이에도 여린 손바닥을 파고든 유리 조각은 진득한 피를 흘려내고 있었다.

죽음 같은 공백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묘한 긴장감이 그사이를 채우는 순간. 초침처럼 바닥에 떨어지는 제 핏방울을 발견한 베스가 나직이 속삭였다.

“역시. 내 목소리가 모든 악연의 시작이었던 거야.”

인연인 줄 알았던 악연.

예리한 조각의 끝이 그녀의 입술을 겨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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