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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53화 (153/206)

153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서재 문을 닫으며 아더는 욕설처럼 혼잣말을 툭 뱉어냈다. 단단히 잠긴 문 너머론 그의 명령에 따라 시종 하나 세워져 있지 않았다.

“제기랄. 그 병자가 정말 베스의 모친이라고?”

갑자기 등장한 첩자의 등장으로 즉위식의 분위기는 다른 의미로 고조됐었다. 클리프 부인이 끌려간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급히 피로연을 열었지만, 이미 추문에 혈안이 된 치들의 관심을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아더는 빌어먹을 즉위식을 마무리하자마자 데베르와 함께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래.”

데베르는 가만히 서재 테이블 위에 올려진 잔을 매만지고 있었다. 거친 손은 술잔 입구를 느릿하게 쓸며, 아직 남아 있는 습기를 섬세한 손길로 훔쳐냈다.

“너무나도 닮지 않았지만.”

그는 아내가 감옥에 처넣어지는 과정을 본 이 치곤 지나치겐 느긋했다. 꼭 이런 일을 미리 예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너, 정말 하워드가 이따위로 선수 칠 줄 몰랐던 거 맞아?!”

아더의 미간이 좁혀졌다. 평소보다 말끔하게 넘긴 머리카락 탓에 반듯한 이목구비가 더욱 선명히 보이는 그는, 선황제 호이든과는 그 생김새가 판이하였다. 그러나 반쪽짜리 피라도 나눠 가진 탓일까. 타고난 의심은 어쩌지 못했는지, 데베르와 손을 맞잡은 이 순간에도 아더는 그를 온전히 믿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터져대는 상식 밖의 상황은 젊은 황제를 계속해서 옹송그리게 했으니까.

“하워드가 원하는 거야.”

“…무슨 소리야.”

둥그런 잔의 표면을 쓸던 기다란 손끝이 불안으로 점철된 새 황제를 향했다.

“그 의심. 혼란. 그로 인한 머뭇거림. 지체되는 시간.”

데베르는 매끄럽게 대꾸했다.

“하워드는 그걸 원하는 거야.”

스스로를 좀먹는 의심. 베스 제인스가 베스 하워드가 되어 웨인에 나타난 순간부터 그의 정신머리를 갉아 먹던 것이었다.

의심이란 것은 으레 그렇듯, 한번 불씨를 댕기면 부지런히도 피어올랐다. 바로 지금처럼.

“눈치챈 거지.”

데베르는 가벼운 말로 상황을 일단락했다.

말 그대로였다. 하워드는 눈치챘다. 하긴. 여태 그 눈칫밥 하나로 첩자 노릇을 하며 살아온 인간이 상대의 변심을 몰라볼 리 없었다. 구태여 데베르가 치밀하게 숨기지 않은 탓도 있었다.

어차피 어렴풋이 예상했던 일이었다. 베스와 공작 사이의 어떠한 균열을 위해 그녀가 아낀 루카를 클리프가 선박에 끼여 죽게 한 것처럼, 마지막 보루인 올리비아 또한 죽일 것이라고.

“고맙게도.”

제 손을 타지 않고 올리비아를 죽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베스를 온전히 살려내는 데 그 여자는 도움이 되지 않아. 혈연인 게 밝혀지면 쥐새끼 같은 놈들이 코펠이며 번트를 들쑤실 거고, 그렇게 되면 하워드가 세 치 혀를 놀리는 지금. 카시우스와의 관계가 들키는 건 시간문제니까.”

아더는 잠자코 창턱에 걸터앉은 채 초조하게 발을 까딱였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퍼뜩 고개를 쳐들었다.

“데베르, 사면권…!”

“알고 있을 줄은 몰랐군.”

“아무리 네가 군대장이고, 내가 일개 사령관이었다지만 적당히 미련한 놈 취급해.”

데베르는 그의 말에 픽, 마른 웃음을 흘렸다.

데베르 클리프의 군대장 직급은 선황제 호이든이 아닌, 그 윗대인 메리어트 황제가 통치 중일 때 죽은 카시우스에게서 넘겨받았다. 그때 생긴 한 번의 사면권은 코바흐전에서 아더의 구금령을 해제하는 데 사용해버렸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사임 이후, 호이든의 황권 아래에서 다시금 군대장이 되었으니까.

사면권 한 장이 또다시 데베르의 손에 들려 있단 뜻이었다.

“보스넬이 어떤 곳인지 알잖아. 그 모친이란 여자는 어쩔 수 없더라도 베스라도 먼저 꺼내.”

“안돼.”

“뭐?”

아더는 경악스런 얼굴로 데베르를 쳐다봤다.

“그럴 수는 없어. 그러지도 않을 거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데베르의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 짐승의 털빛처럼 짙은 잿빛 머리칼과 고집스럽게 다물린 턱이 지독히도 클리프다웠다.

“사면권을 쓴다는 건 죄를 인정한다는 거야. 그럴 수는 없지.”

이채가 번뜩이는 눈동자가 불현듯 허공을 응시했다. 마치 그곳에 아름다운 그림이라도 있는 것처럼, 아니. 거기에 베스가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탄성에 찬 시선으로 허공을 훑어내렸다.

“그 여자는 완전무결해야 해. 한 치의 오물도 묻어선 안 돼. 그게 의심이 되었건, 추문이 되었건.”

“…단단히 미친 새끼.”

아더는 그 집착 어린 눈빛에 질린다는 기색을 여과 없이 내비쳤다.

데베르는 제가 언제 그랬냐는 듯 무심한 눈빛으로 돌아가, 앞으로의 계획을 읊어내라기 시작했다.

“하워드가 굳이 오늘을 노린 건, 이 더러운 얘기를 널리 퍼뜨릴 멍청한 놈들이 가장 많이 모여드는 날이기 때문이야. 사람들이 원하는 건 진실이 아냐. 진실이었으면 싶은 것들이지. 그걸 갖고 노는 건 내가 가장 잘하는 짓이고.”

사람들은 순진한 진실보단 가증스런 거짓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데베르는 이번엔 잔 입구 대신 제 입술께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당장은 닿지 못할 베스의 입술을 대신한 것이었다.

지금쯤이면 그 붉고 상처 난 입술을 열어 꺼내달라, 결백하다 소리라도 한 번 내질러 봤을까.

그는 제 상상 속의 여자를 발라먹듯이 샅샅이 지켜봤다.

“내겐 그럴 힘이 있거든.”

어쩌면 나를 기다리고 있으려나.

* * *

별궁으로 뛰어 들어간 벨은 조급하게 공주의 침실 문을 두드렸다. 예민한 공주의 방문을 두드리고, 그 안에 음식을 집어넣는 건 오직 그녀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

“들어와.”

요즘 들어 축축 늘어지던 공주의 목소리에도 흔치 않은 총기가 감돌았다.

“들은 게 있어?”

성마르게 재촉하는 푸른 눈동자에 그늘이 졌다.

황제 즉위식의 그 난리를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고 나서부터 떨리는 심장은 멈출 길이 없었다. 제 안의 흥분이 공포인지, 기대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할 만큼 라프넬은 속이 메스꺼웠다.

“완전히 출입을 봉하셨어요. 데베르 공작님 외엔 황궁 안엔 시종 하나 허락지 않으시고 모두 내보내셨더라고요.”

“젠장…!”

라프넬은 손끝을 물어뜯었다.

머릿속에선 쉬지 않고 질문이 범람했다.

왜 갑자기 브리틴이 데베르와 척을 지지? 정작 아더는 다시 데베르와 손을 잡은 것 같던데? 그 늑대 새끼의 계략인가? 아님, 아더가 무슨 생각이라도 있어서 이러는 건가?

“칼론….”

그러나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결국 칼론이었다.

즉위식을 하는 도중 눈이 마주쳤지만, 브리틴의 군대장으로 온 그는 냉랭한 얼굴로 공주의 시선을 피했다. 말이 피한 것이지 그녀는 흡사 무시당한 기분이었다. 그러고 나자마자, 친위대에게 끌려가는 베스의 모습은 이미 불이 지펴진 불안을 가중하기에 충분했다.

설마,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걸까.

“같잖은 다정 떨 때부터 알아봤어. 결국 나를 여기에 버려둘 거면서 장난질한 거지.”

저주를 퍼붓는 입술과 달리, 스스로를 감싸 안은 두 팔은 애처롭게 떨렸다. 한 번 맛본 애정의 단맛 때문인지, 홀로 남은 지금 그녀는 미칠 듯이 외로웠다. 이 두려움에서 저를 안아줄 사람은 더 이상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치가 떨렸다.

전부 증오스러웠다. 멍청한 제 오라비도, 교활한 칼론 그 군인 새끼도.

“엇, 공주님. 저기….”

연민에 빠져 허덕이는 라프넬을 깨운 건, 창문을 콕콕 두드리는 익숙한 소리였다.

“어째서….”

멀리서 보면 꼭 금빛 실뭉치 같은 노랑 새가 공주를 부르고 있었다. 창 너머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새는 연신 작은 부리를 유리창에 쪼아댔다. 새의 발치엔 오늘도 어김없이 쪽지가 매달려있었다.

라프넬은 얼른 달려가 창을 열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찬지도 몰랐다. 헐레벌떡 매듭을 푸는 손이 몇 번이나 미끄러졌다.

[때가 됐어.]

“라프넬.”

들려오는 목소리에 라프넬은 입술을 깨물었다. 뜨거워진 눈시울이 제가 생각하기에도 꼴사나워 크게 치떴다.

“거기가 아니고 위야.”

장난기 섞인 목소리는 저번과 거의 비슷한 말을 하고 있었다.

라프넬은 창가 위의 비스듬한 지붕을 노려보듯 올려다봤다.

“가자, 지금. 나랑 같이.”

어릴 적 유모는 말했다. 공주님, 붉은 꽃은 독이 든 게 많으니 절대 함부로 입술을 갖다 대지 마세요. 흘려들은 경고가 오늘에서야 떠오른 건, 이제야 그 붉은 독을 발견했기 때문이리라.

“읏차.”

한 발을 창턱에 내린 칼론의 몸이 너른 창 안으로 들어오려는 찰나. 라프넬은 두 손을 뻗어 우악스럽게 그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휙 당겨오는 벌어진 어깨를 지지대 삼아, 한껏 까치발을 들었다.

“건방진 새끼.”

달콤한 꿀을 먹겠다 꽃을 빨아당기는 어린아이처럼, 라프넬은 붉은 머리통을 붙잡고 입술을 부딪쳤다. 온몸이 달아올랐다.

그 안의 걷잡을 수 없이 뜨거운 열기는 그녀가 선택한 독이었다.

* * *

뚝, 뚝.

베스는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에도 어깨를 흠칫 떨었다. 무릎을 방패처럼 세운 채 벽에 바짝 기대앉은 마른 몸이 쌕쌕 밭은 숨을 토해냈다.

꽉 막힌 목구멍을 애써 열어 사람을 불러봐도 간수 한 명 오지 않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기다란 복도엔 그녀만 있는 듯 다른 죄수들의 목소리 또한 들리지 않았다.

철저한 고립이었다.

“…올, 리비아….”

제 어미의 이름을 불러봐도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베, 베스… 릴리아드.”

밀서 속에서 본 이름을 중얼거려도 마찬가지였다.

“콜린스, 교수님? 거기 계세요…?”

없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콜린스의 이름을 불렀다.

튀어나온 무릎에 어질거리는 머리를 기댔다. 창문이 없으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몇 번이나 선잠이 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며 누군가 제발 저를 찾아오기를, 그래서 벽 너머의 상황을 말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한참을 더 미몽과 지독한 현실 사이를 기어 다니고 나서야 희미한 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엔 떨어지는 물소리를 착각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점차 분명해지는 구둣발 소리는 지금이 현실이라 알려주었다.

“저, 기요….”

쥐어짜는 목소리가 처량하게 떨렸다.

그새 굳은 다리를 겨우 움직여 조금씩, 창살 가까이 기어갔다. 부지런히 바르작거리던 몸이 순간 멈칫했다.

“공작….”

견고한 창살 너머의 반질한 군화 코. 그건 그녀에게 너무도 익숙한 모양새였기에.

“베스.”

간지러운 목소리가 텅 빈 감옥을 울렸다.

더 다가가지 못하는 여자를 대신해 창살 사이로 단단한 팔이 들어왔다.

그새 낯설어진 온기가 베스의 뺨을 지분거렸다.

“기다렸어?”

엎드리다시피 한 여자의 시선에 맞춰 쭈그려 앉은 데베르는 아주 사랑스러운 것을 보듬는 양 제 아내의 턱을 살며시 쥐었다. 그러곤 금방이라도 입 맞출 것처럼 고개를 기울였다.

그까짓 창살쯤은 보이지도 않는 듯이.

“공작님….”

“궁금해.”

그가 달콤하게 물었다.

“이젠 내가 좀 간절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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