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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52화 (152/206)

152화

베스는 제게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새하얀 눈송이들이 연이어 그 위로 내려왔다가 흔적 없이 바스러지는 것이 보였다. 크고 작은 흉터로 가득한 저 손이 때론 무자비할 정도로 차갑고, 때론 견딜 수 없을 만큼 뜨겁다는 것을 잘 알았다.

지금 당신은 내게 구원일까, 아님. 구원인 척하는 파멸일까.

눈앞의 모든 것이 불확실한 와중에 한 가지 확실한 건 알았다. 제게 선택권 따윈 없다는 것.

“베스.”

데베르는 제 아내의 짧은 망설임을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곧 그에게로 뻗어오는 연약한 손을 조금 더 힘주어 맞잡음으로 나름의 보상을 받아냈다.

다정한 올가미였다.

“올해는 겨울이 빨리 왔나 봐요.”

중얼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여자의 얼굴 위로도 그녀와 닮은 순백의 꽃잎들이 떨어졌다. 기어코 가까이 다가왔다가, 새카만 속눈썹에 찔려 스러지는 눈꽃은 아름다웠다. 썩지 않고 사라져 더 아름다운 것들이었다.

“넥서스는, 아….”

여린 손등 위에 입 맞추는 그의 행동에 베스는 하던 말을 멈추었다.

그저 예법이었다. 신사가 부인을 에스코트하는 시작점에 하는 지루한 예법의 한 부분.

베스가 잠시 잊은 건, 그는 클리프 공작이고 아무것도 아닌 행동을 아무 일인 것처럼 하는 데에 재주가 있는 남자란 사실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어.”

그제야 그의 얼굴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길고 짧은 세 번의 계절을 지나고, 마침내 서로를 처음 마주했던 겨울이 돌아온 지금. 데베르 클리프는 완연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성체가 된 늑대처럼 주저함을 모르는 잿빛 눈동자라던가, 한결 날이 선 턱과 달리 여유가 묻어나는 나른한 눈매엔 더 이상 기억 속 소년의 얼굴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 기묘한 낯섦에 베스는 흠칫 반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이대로 평생 서 있어도 난 아무렇지 않아.”

미소 짓는 입매엔 그토록 베스 제인스가 애정했던 야트막한 볼우물이 패었다. 그게 오늘만큼은 꼭 작은 덫처럼 보였다.

웅성거리는 주변의 소음이 점차 크게 들려왔다. 막이 올라가기 직전의 소란스러운 극장 안에 들어가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아찔한 느낌에 베스는 얼른 걸음을 뗐다. 나란히 걷는 남자의 그림자는 끈덕지게 여자의 발치를 쫓아왔다. 곁에 서 있는데도 그랬다.

새로운 황제의 즉위식을 위한 인파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타국에 나가 있던 귀족들의 귀환은 말할 것도 없고, 제국 변방에 있던 세력들은 물론 연합국의 사절단까지 속속들이 본궁에 도착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심에 있어야 하는 인사는 단연코 클리프 공작이었다.

“혹시 내가 사라지더라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 수행인들이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걱정 말고.”

“무슨-”

“먼저 약속해 줘.”

베스는 어쩔 도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베르는 초조하게 저를 올려다보는 여자를 모른 척했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오늘은 디데이였으니까.

“황제 폐하, 입장하십니다.”

문을 지키고 있던 시종의 외침과 함께 우렁찬 팡파르가 즉위식의 시작을 알렸다. 눈발이 날리는 희끄무레한 하늘 탓인지, 고조되는 팀파니의 울림이 천둥소리처럼 심장께를 뒤흔들었다.

황금빛의 카펫을 지르밟으며 아더가 단상을 향해 나아갔다. 그곳엔 역대 넥서스 선황제의 머리에 씌워졌던 황관이 얌전히 제 다음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더 메이너, 넥서스의 새로운 주인이 되려 합니다.”

황금 덩어리에 머리를 조아린 그의 위로, 그토록 바라온. 어쩌면 남몰래 평생을 염원했을 황관이 올라갔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실 친위대를 시작으로, 파도처럼 사람들의 머리가 숙어졌다. 남자들은 청혼하듯 한쪽 무릎을 꿇었고, 여자들은 치맛자락을 쥔 채 무릎을 까딱였다.

아더는 약간은 감상에 취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한 가문을 상징하고, 한 나라를 상징하는 수많은 머리가 그를 향해 숙어졌다. 그게 비록 희미한 권력을 향한 연기일뿐일지언정 말이다.

가장 높은 단상에 오른 후, 고개를 돌려 데베르를 찾아냈다. 두 사람은 기다리는 중이었다. 서서히 장내가 조용해지고, 깃대를 대번에 잡아챌 순간이 오기를.

그 사이, 베스의 불안스런 시선은 황궁 안을 어지러이 배회하고 있었다. 하워드가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하워드가 사라졌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 속에 섞여 있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그 절뚝거리는 뒷모습이 보이지가 않았다.

그토록 브리틴의 부활에 집착적인 사내가 지금 자리를 비울 리가 없는데도.

“공작-”

데베르를 부르려 고개를 돌린 베스는 또다시 황망하게 눈알을 굴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느샌가 곁에서 멀어져, 이젠 황자가 아닌 황제가 된 제 친우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과연 클리프 저택엔, 놈의 측근 중엔 내 사람이 없을까? 마음만 먹으면 젊은 군대장 따위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총으로 죽여버릴 수 있어.’

교활한 하워드의 목소리가 벽력처럼 떠올랐다. 브리틴의 소생인 황자가 황제가 된 오늘,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을지 모른다.

“안돼.”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속마음이었다.

데베르가 단상 위로 한 발을 내디디고, 베스가 그와의 약속을 거스르려 몸을 트는 그때.

“폐하!!!”

우레 같은 외침 뒤로, 한 무리의 남자들이 닫힌 문을 쩍 벌리고 뛰어 들어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삽시간에 한곳으로 꽂힘과 동시에 싸늘한 고성이 장내에 끼얹어졌다.

“폐하! 첩자입니다!”

첩자. 그 한마디에 잠잠해졌던 장내의 열기가 다시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첩자요?!”

“방금 첩자라고 했습니까?”

“친위대, 지금 뭣들 하는가!”

베스는 숨을 멈춘 채, 조금 전까지 황제가 걸었던 금빛 카펫을 짚는 익숙한 지팡이를 노려봤다. 절뚝거리는 사내가 침통한 얼굴을 한 채 황제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 가증스런 표정에 베스는 거세게 입술을 깨물었다.

힘없이 발걸음을 떼던 하워드가 툭, 지팡이를 놓치더니 맥없이 바닥에 꿇어 엎드렸다. 그러자 둥글게 말린 등에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근육이 내비쳤다.

“폐하, 하워드가를… 제 가문을 멸문해주십시오…!”

아냐, 아냐. 베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인파를 뚫고 문가를 향해 달려갔다. 온몸에 한기가 끼쳐 들었다. 머릿속엔 코펠이란 한 단어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숫제 정신 나간 사람처럼 사람들을 헤집던 그녀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머, 저게 뭐예요?”

“시체인 거 같은데요.”

“아니야, 살았어요! 저 여자가 대체 누구야?”

들것에 실려 오는 여체 하나가 발목을 붙잡았기에.

“제 여동생이 브리틴의 첩자였습니다…! 어흑, 폐하….”

보고도 믿지 못했다. 어떻게, 저곳에.

하워드의 수하들에게 옮겨지는 여체의 얼굴은 분명 올리비아였다.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못할 만큼 쇠약해진 그녀는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축 늘어진 몸뚱이는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질리도록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단상 앞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제 어미의 핏기 없는 발을 멍하니 바라보던 베스의 시선이 데베르와 허공에서 부딪혔다. 먼 거리였지만 서로를 보고 있음은 분명했다.

판단력이 흐려진 머릿속으로 꾸역꾸역 하워드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왔다.

“여동생이 브리틴의 첩자였고, 그 사실을 제 양녀이자 여동생의 여식인 베스도 알고 있었다는 증거를 발견했습니다. 감히, 반역죄를 꾀했습니다. 죽여주십시오…!”

쏘아대는 좌중의 수군거림은 이젠 베스를 향했다.

숨 쉴 틈 없이 옥죄는 시선이 작살처럼 온몸을 관통했다.

“베스? 베스가 누구예요?”

“클리프 부인 있잖아요! 그 양녀!”

“저기 있네! 세상에, 소름 끼쳐라. 그럼 클리프 공작도 속은 건가요?”

베스는 저를 둥그렇게 에워싸는 무리를 멀거니 응시했다. 과녁 속의 사냥감이 된 것 같았다.

차라리 악몽이었으면.

그러나 깨지 못할 현실은 악몽보다 지독했다.

“여기, 그 증거가 있습니다!”

하워드의 수하가 단상 아래에 종이 뭉치를 내려놓았다.

“이건….”

아더는 이미 그게 어떤 것인지 알았다. 데베르가 은밀히 그를 찾아와 내민 것과 같았다.

“하워드가의 정보와 재산을 빼돌려 브리틴의 뒷배가 되어주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아둔하게 가족을 반역 죄인으로 두었습니다. 으흑….”

데베르의 턱이 움칠했다. 냉기가 넘실거리는 눈동자는 꿇어 엎드린 하워드를 향했다가,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있는 카시우스의 첩자를 향했다. 진즉 죽였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한 여자는 베스와 조우했던 그날 밤 코펠에서처럼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뻔했다. 하워드 또한 황제 즉위식을 노린 것이리라. 첩자의 등장으로 이목이 쏠린 이 순간, 모두의 앞에 선 새 황제가 회피하지 못하고 클리프 부인을 감옥에 처넣도록. 이제껏 정체를 들킨 모든 첩자가 그러했듯이.

“데베르 공작.”

“예, 폐하.”

상황을 판단한 데베르의 눈빛은 더없이 차가웠다.

일체의 감정도 없이, 이성만이 머리를 지배하는 듯한 그의 모습에 아더는 침음을 삼켰다. 곧 그가 뱉어야 하는 말은 이제 막 황관을 쓴 황제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하워드 백작의 여동생과 그의 양녀인 베스 클리프를 독방에 구금하라. 혐의는 브리틴의 첩자로서 반역을 꾀한 죄다.”

“잡아라!”

친위 대장의 명령에 군병들이 일제히 클리프 부인에게로 총구를 겨누자, 곳곳에서 탄식과 규탄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데베르는 고요히 침묵한 채, 두 팔이 결박된 제 아내가 끌려가는 모든 모습을 놓치지 않고 지켜봤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툭 떨어지는 한 방울의 눈물까지 알아보기엔 거리가 너무 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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