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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50화 (150/206)

150화

무어라 아더가 할 말을 찾는 사이, 빈 술병으로 어지러운 협탁 위로 둔탁한 소리를 내며 종이 뭉치가 떨어졌다. 갑작스런 데베르의 등장에 정신이 팔려 그의 손에 뭔가 들렸는지도 모르던 참이었다.

아더는 미심쩍은 눈빛을 감추지 못한 채, 종이 뭉치를 건성으로 훑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그 문서의 의미를 깨닫곤 제 입을 틀어막았다.

“이건….”

“이제 좀 이해가 가나 보군.”

“아니. 더 이해 가지 않아.”

제국의 사령관이라기엔 고운 손끝이 종이 귀퉁이를 엉망으로 구겼다.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긴장의 방증이었다.

“어째서 내게 이걸 보이는 거지?”

애매했다. 눈앞의 카시우스를 닮은 이 젊은 공작이 그의 말대로 정말 아군인지, 아니면 아군인 척하는 적군인지. 그조차 아니면 그저 친우일 뿐인지.

“그보다 이게 누구 것인지가 더 중요한 거 아닌가.”

데베르의 기다란 손끝이 매끈한 잔 입구를 느리게 쓸었다. 으레 군사 작전을 나가기 직전, 저 홀로 생각에 빠져 있을 때 하던 버릇이었다.

“하워드.”

“…하워드?”

아더는 갈수록 엉켜 드는 머릿속에 인상을 찌푸렸다. 균열이 간 잘난 얼굴 새로 찰나의 수심이 스쳤다.

“그렇다면, 베스는.”

“그래. 네가 생각하는 대로야.”

“하.”

허탈한 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예정되어 있던 호이든의 독살이 실패한 날. 밑바닥을 전전한 것들이나 알 법한 약물을 유난히 잘 안다 싶긴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제겐 굳이 베스의 뒤를 더 캘 이유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첩자라….

“브리틴 첩자 놈들 목줄을 잡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변수가 생겼어.”

데베르의 고개가 약간 기울어졌다. 희미한 피로감이 그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루카의 죽음. 그건 필시 하워드의 짓이었다. 고작 시녀 한 명의 죽음은 정쟁의 희생양조차 되지 못할 만큼 하찮은 것이다. 하지만 그게 베스 제인스가 정을 준 시녀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적어도 각자의 목적을 숨기고 결혼한 클리프 공작과 그의 부인 사이에 있어선 유의미한 불씨가 될 것이다.

‘아이가 있다’라는 카시우스의 전갈은 베스 또한 봤을 게 분명했다. 얼마 전, 코펠에서 엉망인 꼴로 제게 안겨 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작은 의심.

그 작은 의심이 연약한 마음에 피어나기 시작하면, 곧 그것은 베스를 갉아 먹고 이미 비틀려있는 저와 여자의 사이를 뚫으리라.

“클리프 공작이 황제가 되려 황자의 주변을 위협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렸어. 뭐, 실제로 몇 명 죽이기도 했으니 영 거짓은 아니지. 의도한 건 아니었겠지만, 우린 결국 같은 일을 하고 있었던 거야. 덕분에 소문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으니까.”

데베르는 그간의 일을 차분히 읊어갔다.

“우선 아더 메이너를 황제로 추대하고, 잇달아 작은 외전을 터뜨려 무능한 새 황제를 끌어 내리고…. 여태 봐왔잖아. 뻔한 수야. 다만, 뒤에 브리틴이 있다는 게 다를 뿐.”

“변수란 뭐지?”

“그것까진 월권이고.”

미미한 웃음기가 묻어나는 말이었지만, 날카로운 눈초리는 매섭기만 했다.

단단한 목소리가 아더를 꾸짖듯 말했다.

“살랑거리며 헛짓거리를 꾸민다는 것만 알아 둬,”

데베르는 어느새 완전히 동이 튼 창밖을 바라봤다. 샛노란 아침 햇살이 광활할 만큼 커다란 황궁 정원 위로 드리워졌다.

“먼저 쳐야 해.”

“…그건 전쟁이야, 데베르.”

비스듬히 돌아간 데베르의 시선과 흔들리는 아더의 시선이 맞닿았다.

“맞아. 이건 전쟁이야.”

각이 진 잿빛 눈썹 끄트머리가 까딱였다.

“흔치 않던 평화에, 마치 영원할 것처럼 중독된 대가지.”

자리에서 일어난 데베르는 약간 흐트러진 커프스의 모양을 똑바로 했다. 때론 집착적일 정도로 모든 것을 통제하려 드는 그의 성향이 다시금 내비치는 중이었다. 아더는 그 작은 변화를 눈치챘다.

돌아서는 데베르의 뒤로 날 선 물음이 날아들었다.

“왜 내게 이걸 알려주는 거지? 네가 계획한 그대로, 외전을 거쳐 클리프가 황위에 오르면 이견을 달 치들은 하나도 없을 텐데.”

“네가 필요 때문에 날 죽이려 했듯이, 나 또한 필요로 널 황제로 만드는 거야.”

감정이라곤 없어 보이는 무심한 눈동자가 아더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데베르는 친우의 어깨너머, 벽에 걸린 거울을 보고 있었다. 그곳엔 이젠 카시우스의 망령이라고도 하지 못할 만큼 그를 빼닮은 남자 하나가 거울 밖의 데베르를 노려보고 있었다.

“…달라야지.”

“뭐?”

“난 아버지와 달라야지.”

주먹을 꽉 쥔 손등 위로 우악스런 핏줄이 불거졌다.

“그게 티끌만큼일지언정. 달라야지.”

* * *

라프넬은 감금과 같은 보호령에 발이 매여 있었다.

칼론과의 관계를 들킨 이후, 연방 뺨이라도 올려붙일 것 같던 아더는 별궁의 모든 출입을 막으란 명령만 남긴 채 사라졌다.

‘아무 가치도 없는 라프넬 메이너, 고작 너 따위를 살려보겠다고 내가 죽인 이들이야.’

라프넬은 아더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침대 위의 여린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고작 그까짓 거 가지고….”

하얀 시트 위에 흐트러진 금발은 멀리서 보면 마치 넥서스를 상징하는 꽃처럼 보였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살아서 번뜩거리는 푸른 눈동자를 눈치챈다면 그런 사랑스러운 칭찬은 못 할 것이다.

“공주님, 조금이라도 식사하셔야죠.”

벨이 수프와 빵 따위를 티테이블 위에 놓으며 나름의 참견을 했지만, 라프넬은 문가를 턱짓할 뿐이었다.

탁. 문 닫히는 소리가 나고 나서야 라프넬은 늘어진 몸을 일으켰다.

이제 곧 올 것이다.

창문을 열고 바깥으로 손을 뻗자, 이내 파드득거리는 날갯짓 소리와 함께 작은 새 한 마리가 그녀의 팔뚝 위에 앉았다. 제 머리카락과 닮은 부드러운 새의 몸통을 라프넬은 몇 번 쓰다듬었다.

“너도 나처럼 눈치가 빠르구나. 내가 혼자 있을 때만 오고.”

익숙하게 새의 다리에 묶여 있는 매듭을 풀자 손톱만 하게 말린 종이가 창턱으로 떨어졌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밀서였다. 이젠 밀서라 하기도 민망할 만큼 속살거리는 소리에 불과했지만.

[보고 싶어, 라프넬.]

손바닥만 한 새의 무게는 딱 그 정도의 문장만을 옮겨줄 수 있었다.

라프넬은 침대맡의 보석함을 열었다. 그곳엔 이제 그녀가 흥미를 잃은 보석들과 함께 칼론의 한 줄짜리 밀서가 반지처럼 말아져 있었다.

[안녕, 공주님.]

그 한마디로 시작한 편지는 식사 때마다 그녀를 찾아왔다.

[공주란 말과 부인 중에 뭐가 더 좋아?]

쓸데없는 질문에 하릴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지금 하늘이 네 머리 색과 같아.]

단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은 하늘을 처음으로 올려다보기도 하고,

[내 몸 중 하나만 뜯어간다면 어딜 가져갈래?]

되는대로 지껄인 게 분명한 말장난에도, 붉은 머리카락에서부터 굳은살 박인 발끝까지 못 이기는 척 떠올려보기도 하고.

[답장은 아직인가 봐.]

단 한 번도 답장을 보내지 않아도 칼론은 부지런히도 편지를 엮어 보냈다.

“이러다 정말 보고 싶다고 착각이라도 하겠어.”

화장대 위에 엎드린 라프넬은 곧 꺼질 듯한 숨을 내쉬었다.

제아무리 백치인 공주라 하더라도 돌아가는 상황이 아더에게 불리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위태로운 하루하루의 연속을 지나며, 새삼스레 하녀들이 부르는 ‘공주님’ 소리에도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까지 저 말을 들을 수 있을까, 하는 잡념에 마음은 단 한시도 평정하지 못했다. 추락할 때를 모르고 이미 망가진 날개를 푸드덕거리는 새의 심정이었다.

“라프넬.”

불현듯 들려오는 부름에 라프넬은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고개를 들기보단 이마를 더 판판히 손등에 붙였다.

“라프넬.”

순간, 더 분명히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퍼뜩 쳐들었다. 황량한 방 안을 휘휘 돌아보다, 문득 창밖을 쳐다봤다. 거기엔 편지를 매달고 왔던 새가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며 종종걸음치고 있었다.

얼른 창가로 달려가 아래를 내려다봤지만 보이는 건 없었다.

“아래가 아니고 위야.”

웃음기 섞인 굵은 목소리는 그의 말대로 정말 위쪽에서 들려왔다.

“…미쳤구나.”

그곳엔 비스듬한 별궁 지붕에 쭈그려 앉은 칼론이 있었다. 보초병들의 눈을 피해 어떻게 거기까지 올라갔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붉은 머리카락은 그의 뒤로 지는 노을을 닮아 있었다.

“미쳤으니 이 짓을 하지.”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과 휘어지는 눈가가 퍽 소년 같아 보여, 라프넬은 제 감상에 치를 떨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별궁 주위를 도는 보초병의 눈치를 보던 칼론은 잽싸게 제 몸을 틀어 열린 창문 안으로 몸을 던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라프넬조차 입을 떡 벌리고, 어느새 제 곁에 선 칼론을 멍하니 쳐다봤다.

“너-”

칼론은 공주가 더 말할 틈도 없이 도톰한 입술을 깨물었다.

뭉근한 열기가 오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보고 싶었어, 라프넬.”

칼론은 연인 대하듯 라프넬을 품에 안았다.

으레 그렇듯 옷을 벗기고 욕정으로 번들거리는 눈을 봤으면 차라리 안심했을 텐데.

꼭 순수한 애정만을 담은 것처럼 위로하듯 머리통을 쓰다듬자, 라프넬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난 아냐.”

“그렇겠지.”

큭큭거리는 웃음소리가 하얀 어깨 위로 떨어졌다.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과 달리 오랜만에 닿는 온기가 너무도 뜨거워 하마터면 그 몸을 마주 안을 뻔했다.

“한낱 군인 주제에 여태 뭘 하고 있던 거야.”

저도 모르게 원망 섞인 목소리가 나와 라프넬은 얼른 입술을 말아 넣었다.

“널 넥서스에서 가장 높은 여자로 만들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중이었지. 뒷방의 공주도 이젠 지겹잖아?”

능글맞은 대꾸에도 더 이상 뾰족하게 대꾸할 수 없었다.

‘아둔한 욕망에 눈이 멀어, 멍청하게 덫에 걸린 거야.’

아더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스스로 인질이 되겠다 자초한 거라고.’

라프넬은 파르르 떨리는 눈을 감았다.

“…맞아, 지겨워.”

그리고 깨달았다.

더 이상 이건 계약이 아니라, 저 스스로 덫에 걸려 독배를 마신 거나 다름없다고.

* * *

데베르가 황궁을 다시 나섰을 땐 이미 해가 저물 무렵이었다.

차기 황제를 논하는 자리에 그가 등장하자, 장내엔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찰나였다. 아더를 지지하자마자 일단락된 혼란이었으니까.

문제는 다가올 외전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최소한의 병력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브리틴을 칠 수 있게끔.

이미 데베르가 군대장을 사임한 사이, 호이든의 손 아래에서 제국군은 엉망으로 흐트러지고 일부가 해산된 참이었다. 덧붙여 선황의 비호 아래, 브리틴의 군사 세력이 전보다 강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데베르는 저를 저택으로 모시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차를 보내고, 홀로 웨인 중심가로 걸어갔다.

아직 베스가 잠들지 않았을 시간이었다.

“제길.”

바짝 마른 입안이 또다시 약을 불러댔다. 지긋지긋한 환각을 부추기려는 것이겠지. 눈을 내리깐 채 깊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지질한 욕구를 가라앉히려 계속해서 차가운 공기를 들이켰다. 어지러운 시야가 몇 번인가 초점이 잡혔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때, 꼭 환시처럼 푸른 점 하나가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스.”

초겨울의 스산한 바람에 흐늘거리는 여름 원피스가 보였다.

곧 그를 발견한 여자가 활짝 웃었다.

닿으면 사라진다는 환상 속의 푸른 꽃처럼 시리고 예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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