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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49화 (149/206)

149화

“지금이 꿈이 아니란 걸 알아.”

꽤 간절하게 저를 붙잡은 여자의 팔을 잡아봤지만, 차마 밀어내지는 못했다.

피하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데베르는 알면서도 피하지 않은 것이었다.

“…꿈이야.”

“거짓말.”

반쯤 일으켰던 몸을 다시 침대에 붙이자, 반대로 여자의 몸은 일으켜졌다.

베스는 소중한 무언가를 겨우 찾은 사람처럼, 그를 더 단단히 품에 안았다.

“데베르 클리프. 거짓말하지 마.”

이게 꿈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몸을 바짝 붙였다. 일말의 온기라도 느껴보기 위해. 그리고 이 모든 게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

“거짓말 말곤 해줄 수 있는 게 없는데.”

“당신이 그러지 않았다고 말해.”

응석 부리는 듯한 말투에 데베르는 작게 웃었다. 그래도 떨림을 숨기지도 못하는 목소리는 애처로웠다. 이럴 바엔 차라리 제가 듣지 못하는 게 나았다. 아니면, 이 여자가 말을 못 하거나.

어설픈 협박의 저의는 짐작이 갔다. 그토록 아끼던 시녀의 등에 찍힌 클리프 문장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지나간 숱한 죽음들을 떠올리며 어떤 감정에 취했을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겐 어림잡을 뿐인 감정이었다.

어떻게 모든 죽음에 벌벌 떨 수 있을까. 그러다간 정작 가장 지키고 싶은 걸 놓칠 텐데.

“그러지 않았어.”

“…다시 말해줘.”

“그러지 않았어.”

데베르는 제게 안긴 여자의 뒤통수를 가만히 쓸어내렸다. 헤쳐진 머리카락을 따라 손가락이 내려가자, 여린 등줄기도 그 너머로 전해졌다. 안심이라도 한 건지 여자는 그의 가슴팍에 고개를 푹 묻었다.

그러지 않았다는 그 말 한마디가 뭐라고. 거짓인지 진실인지도 모르면서.

그러다 갑자기 마른 몸이 화들거리며 떨리기 시작했다.

“…죽였나요.”

데베르는 쓰다듬던 손길을 멈추었다.

“…올리비아를, 죽, 였나요.”

듬성듬성 끊어지는 목소리에 울음기가 묻어났다.

차마 꺼낼 용기조차 낼 수 없던 마지막 물음이겠지.

“예쁨 떨면서 안길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데베르는 헛웃음을 뱉었다. 허탈감에 잠식된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살려뒀다 해도 찰나야.”

베스는 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남자를 마주 봤다. 가라앉은 잿빛 눈동자에 아무것도 못 하는 제 모습이 비쳤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모르는 척, 이기적인 바람을 지껄였다.

“거짓말만 해준다고 했잖아요.”

“지금은 아니야.”

“카시우스 공작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데베르 공작님도, 한 번만… 한 번만 더 그분을 살려주시면 안 될까요.”

데베르는 울먹이는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뜯어봤다. 상처 입는 게 빤히 보였다.

카시우스를 들먹이는 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으리란 것조차 모르는 여자였다. 이리 순진하고, 투명하고, 그래서 더욱 그를 미치게 만들던 사랑스러운 첩자가 지금 애원하고 있었다.

“저는 뭐든 다 괜찮아요. 설사 공작님이 절 벌주기 위해 루카를 그러셨다고 해도 이해해요. 다 제 잘못이에요. 루카를 위험하게 곁에 뒀잖아요. 하지만, 하지만…. 올리비아는, 그분은 제 존재조차 알아보지 못하는데….”

데베르는 그제야 베스가 아직 온전한 상태가 아니란 걸 알아챘다.

하긴. 그의 이름을 부를 때부터 짐작은 했었다.

“난 신이 아니야. 너도, 그 여자도 살릴 수는 없어.”

그래서 원래라면 결코 말하지 않았을 속내를 말해줬다. 그가 약해지는 순간에만 그녀가 진실을 말해줬던 것처럼.

“헉, 헉….”

한참을 숨을 헐떡이던 베스는 황급히 베개 밑을 뒤졌다. 무언가 잡히는 대로 꺼내 바닥으로 던져댔다. 날이 무딘 편지칼, 작은 화분칼, 어디서 가져왔는지도 모를 날카로운 컵 조각. 위협이 될만한 건 뭐든 모은 모양인지, 갖은 것들이 그들의 발밑으로 떨어졌다.

“…자백이에요. 공작님을 죽이려고 했어요.”

침묵이 흘렀다.

어떤 것으로도 깨지지 않을 만큼 견고한 정적이었다.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제발….”

“정말….”

제겐 아무 위협도 되지 못할 것들을 지켜보던 데베르는 그새 베인 여자의 손을 거칠게 낚아챘다. 눈물과 닮은 핏물이 뚝뚝, 그의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참지 못한 데베르는 그대로 베스의 어깨를 붙잡아 시트 위로 처박았다. 매서운 손길이었다.

그러자 그의 아래에 가둬진 여자의 관자놀이로 또다시 징글맞은 눈물이 흐르는 게 보였다.

“똑바로 들어. 두 번 말할 생각 없으니까.”

눈물샘을 틀어막을 수는 없어, 대신 피가 흐르는 손목을 하얗게 질리도록 옭아맸다.

“네가 날 죽이는 순간에, 나도 널 죽일 거야. 번복은 없어. 먼저 내 곁을 떠나서 자유로워질 요량이라면 곱게 접어.”

공포에 질린 눈이 코앞에서 보였다.

“젠장.”

거친 숨을 몰아쉬던 데베르는 기댈 곳이 없어, 저를 죽이겠다는 첩자의 품에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이 멍청한 첩자는 목줄을 쥐지도 못할 짐승의 머리통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감쌌다.

“감히, 네가 어떻게 나를 떠나….”

웃기는 꼴이었다.

“…꿈이야.”

데베르는 물기로 척척한 새카만 눈을 가렸다. 미지근한 눈물이 계속해서 그의 손을 적셨다.

“베스, 지금은 전부 꿈속이야. 악몽이니까 다시 잠들면 돼.”

그 말 한마디에 밭은 숨소리가 점차 잦아드는 게 느껴졌다.

이 거짓말을 너는 또 믿는구나.

데베르는 꼴사나운 자장가를 제 아내이자, 저를 죽이러 온 첩자에 귓가에 밤새도록 속삭여줬다.

“네가 듣고 본 모든 게 악몽일 뿐이야. 꿈에서 깨면, 그때 다시 내 이름을 불러. 간절하게.”

* * *

쿵. 취기가 가시지 않은 아더의 몸이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널브러진 술병이 그 진동을 못 이겨 함께 쓰러졌다.

“제기랄.”

골이 깨질 것 같은 두통이 밀려왔다. 머리를 짚자, 위스키로 척척해진 소매가 뺨에 닿았다.

유약한 새끼. 나약한 저 자신을 죽여버리고 싶은 충동이 좀처럼 가라앉지 못하는 마음을 요동질 했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벽에 걸린 거울에 머리통을 기댔다. 갈수록 짙어지는 눈그늘을 거칠게 손으로 쓸다가, 한숨을 토해냈다. 팔자 좋은 황자라는 멸칭은 어느덧 기억도 나지 않는 옛것이 된 지 오래였다.

똑똑. 정갈하게 울리는 노크 소리에 푸른 눈동자가 사나워졌다.

“기다리라고 해! 빌어먹을, 넥서스가 저들 것인 줄 알지.”

아더는 협탁 위에 엉망으로 쌓인 종이 뭉치들을 한데 모으기 시작했다. 모두 차기 황제를 향해 은밀히 보내진 밀서, 혹은 협박 편지였다. 그 발신인이 누구인지는 이젠 뻔했다.

“별궁은 제대로 지키고 있겠지. 그 누구도 출입해선 안 돼.”

밖에 서 있을 수행인을 떠올리며 입에 붙은 명령을 내렸다.

칼론, 칼론. 그 개 같은 새끼…!

태연한 척 옷을 갈아입다가도 분을 못 이기고, 손에 잡히는 병을 있는 대로 벽에 내리꽂았다. 폭발하듯 깨지는 파편 조각을 보고도 이미 지펴진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못했다.

그때, 또다시 들려오는 노크 소리가 기어코 예민한 신경 줄을 끊어 먹었다.

“못 들었어?! 입 닥치고 기다리-”

“….”

“데베르…?”

아더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썹을 찌푸렸다.

“보다시피.”

“경우 없는 방문이군.”

“오랜 친우잖아.”

아더는 경계심을 감추지 못하고 쏘아붙였지만, 상대는 여상하게 답했다.

데베르는 익숙한 그의 침실의, 익숙하지 못한 꼴을 보고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느긋하게 소파에 기대 아직 따지 않은 위스키병을 들 뿐이었다.

“데베르, 무슨 헛짓거리야.”

뭐라도 할 것처럼 군대장을 채갈 땐 언제고, 클리프 공작은 황제의 서거 이후 고요히 그림자 속에 숨어만 있었다.

언제나 불안은 아더의 몫이었다.

불시에 등 뒤를 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황자의 목을 졸라오는 브리틴놈들 만큼이나, 주인 없는 데베르의 그림자 또한 그를 미치게 하기엔 충분했다.

“네 말이 맞아. 헛짓거리야.”

데베르에게선 잔뜩 날 선 기색이 풍겼다. 말끔한 낯짝 아래, 잠들지 못한 간밤의 피로가 여실히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예상 밖의 변수로 시간이 부족했기에, 군더더기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제 아둔한 짓은 그만하지. 친위대 죽음의 배후에 네가 있다는 걸 알고 왔어. 일부러 공작이 먹는 약물에 중독되게 해 죽인다는 것도. 전화국을 통해 클리프가 황자를 위협한다는 추문을 퍼뜨리는 중이잖아.”

아더의 손이 불현듯 짧게 경련했다.

“…그래서, 어쩌겠다고. 당장이라도 날 치겠다는 건가.”

“아니. 알려주려는 거야. 황좌에 눈이 먼 공작에 관한 추문을 가장 먼저 퍼뜨린 게 바로 나거든.”

“당최 알아들을 수가-”

“브리틴.”

브리틴. 그 한마디에 아더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아더 메이너.”

들려오는 고압적인 음성은, 한때 황자의 상관이었던 군대장의 것이었다.

“아군은 이쪽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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