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이른 아침부터 등장한 예상 밖의 손님에 아이네스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당연히 베스가 올 줄 알았는데, 정작 병원에 모습을 드러낸 건 데베르 공작이었다. 그것도 꽤 냉담하고, 어딘가 화가 난 듯한.
“루카라고, 베스의 전담 시녀에요.”
아이네스가 공작의 눈치를 살피며 영안실 문을 열었다. 머리가 지끈거릴 만큼 독한 소독약 냄새에도 데베르는 찡그리는 기색 하나 없이 파리한 시체를 향해 다가갔다.
“등을 볼 수 있겠습니까.”
이미 집사의 짧은 전갈을 통해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제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하룻밤 사이 더욱 딱딱하게 굳은 시체가 텅,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생명 없는 몸에선 늘 그렇듯 텅 빈 소리가 났다. 그는 아이의 등에 문신처럼 남은 클리프 가문의 문장을 말없이 응시했다.
“시체가 썩기 전에 장례를 치러야겠군요.”
“아, 그렇죠….”
약간은 피곤한 기색이 담긴 목소리에 되려 아이네스가 그의 눈치를 봤다.
“평민이더라도 가문 사용인들은 보통 공동-”
“태워주십시오.”
“네?”
데베르의 표정은 일관됐다. 그 얼굴엔 한치의 비애나 안타까움도 들어있지 않았다. 지극히 사무적인 시선으로 으스러진 시체의 곳곳을 훑을 뿐이었다.
“이름이 루카라고 했던가요.”
“네, 루카요.”
갑자기 이름의 뜻은 왜. 아이네스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 어디로든 날아가라, 그런 뜻 같은데.”
“브리틴어 뜻은 아마 그럴 거예요. 얼핏 베스가 그리 말했던 기억이 있거든요.”
“제 아내의 전담 시녀니, 그 결정권이 저에게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군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시체는 태워주십시오.”
시체는 태우라. 데베르는 다시 한번 똑같은 말을 했다.
여전히 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베스를 위한 마지막 아량이었다. 적어도 그녀가 마음을 다해 지어줬을 이름값은 하고 끝맺을 수 있게끔.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마음 안에 뒤를 돌아볼 만한 건 같잖은 묘지든 뭐든, 어떤 것도 남겨둘 생각이 없었다. 지극히 그다운 배려이자, 저열한 욕심이었다.
자꾸만 이곳저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새카만 눈동자는 오직 그만을 바라봐야 했다. 그 겨울날의, 그 전장처럼.
데베르는 무심히 걸음을 옮겨 루카의 곁에 있는 시체 한 구의 얼굴을 살폈다. 기억하기론 아더 산하의 황실 친위대 중 하나였다.
“공작이 황자를 위협한다….”
추문의 증거를 바라보는 시선이 짙어졌다.
* * *
베스는 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정신이 들라치면 끔찍한 몽마가 덮쳐와 속절없이 몸을 고꾸라뜨렸다.
마지막으로 루카를 보러 가야 하는데….
이젠 불러도 돌아볼 이 없는 이름을 곱씹으며 어둠 속으로 침잠할 때면, 밀려드는 무력감에 치를 떨었다.
클리프가의 시녀들은 부인이 조금이라도 정신이 들라치면, 입술 새로 묽은 수프며 물을 집어넣으려 했지만, 베스는 모든 걸 거부하고 또다시 끝없는 잠에 빠져들었다.
원치 않는 꿈은 창살 없는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본 적 없는 항구. 커다란 선박. 귓전을 울리는 고동 소리. 그 속에 쓸려 있으면 어디선가 아가씨를 부르는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엔 노란 원피스를 입은 루카가 갑판에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는데, 햇살에 부딪히는 미소가 유달리 해사했다.
그러다 소음이 뚝 멈추는 순간, 지옥이 펼쳐졌다.
벌겋게 번지는 핏물이 발치에 닿아 시선을 옮기면,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얼굴은 루카가 되었다, 어린 데베르가 되었다, 거죽만 남은 올리비아의 얼굴이 되기를 반복했다.
“흐윽….”
데베르는 바르작거리며 흐느끼는 작은 얼굴로 손을 뻗었다. 손끝은 그가 없는 사이 하얀 이마에 생긴 상처에 닿았다.
‘기절하듯 순간적으로 쓰러지시면서 잠이 드시는 게 아마 기면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부인을 지켜봐 온 집사는 그리 말했다.
“난 잠들지 못하고, 넌 깨어나지 못하고.”
어긋나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잠드는 순간까지 마주 보지 못하는구나.
데베르는 제 시답잖은 감상을 조소하며 베스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갈수록 말라가는 뺨은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이전 같은 생기는 없었다. 그러나 영악한 그의 속내는 베스가 깨어나지 못하는 지금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오늘도 당기면 당기는 대로 제게 안겨 오는 여체를 품에 안고 긴 밤을 지새울 작정이었다.
한 품에 들어오는 베스의 얼굴이 얌전히 그의 가슴팍에 기대졌다. 여전히 울고 있는 눈가를 한번 쓸고, 피가 엉겨 붙은 이마의 상처에 입을 맞췄다. 찝찔한 피 맛마저도 이 여자가 살아있는 증거라 생각하니 기꺼웠다.
한없이 죽여버리고 싶으면서도, 막상 눈감은 모습을 보면 그 새카만 눈동자가 보고 싶었다. 이런 모순이 있을까.
그렇지만 저는 원래 이런 놈이었다. 놀랄 것도 없었다.
“이대로 영원히 잠들어 있을까, 우리?”
우스운 헛소리를 하며 눈을 감았다.
“밤이 길어.”
기쁘게도.
잠시 멈춰진 둘만의 시간이었다.
베스는 실로 오랜만에 맑은 정신으로 눈을 떴다.
창문 새로 들어오는 햇빛이 선명하게 보이는 게 오늘은 정말 루카를 보러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까슬한 침대보를 손으로 훑자 누군가 다녀간 온기가 느껴졌다.
그 남자가 왔다 간 걸까.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운을 걸치고 창문을 열자, 초겨울의 시린 풀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새 겨울이 왔구나.
베스는 흘러간 시간을 짐작했다.
침실 문을 열고 나오자 익숙지 않은 클리프 저택의 복도가 보였다. 베스에게 클리프 저택은 이토록 낯선 것이었다. 맨정신으로 이 저택을 클리프 부인답게 누벼본 기억 따윈 있지도 않았다. 아마 그런 날은 앞으로도 오지 않으리라.
“…병원에 가야겠어요.”
희미한 목소리로 집사에게 말했다.
“아이네스 영애께 미리 연락해 놓겠습니다.”
집사의 노련한 배려에도 베스는 고개만 주억이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복도를 걸어갔다.
아무도 없는 저택을 홀로 헤맸다. 누구를 찾는지도, 어디로 가고 싶은지도 알 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던 그때, 타닥거리는 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누군가 저를 와락 껴안았다.
“베스!”
병원에 있다가 연락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온 아이네스였다. 베스는 제게 닿는 온기가 낯설어 품 안의 친구를 더듬었다.
“이마는 어쩌다 이렇게 된 거니? 넘어진 거야?”
아이네스는 베스의 얼굴이며 몸을 살피다, 이마의 상처를 발견하곤 눈이 동그래졌다.
“난 괜찮아.”
그제야 정신이 든 베스가 헛도는 손으로 성급히 그녀를 떼어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상처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루카는?”
“네가 꽤 오래 일어나지 못해서….”
“아, 벌써 장례를 치렀구나.”
그럴 만도 했다. 벌써 사고 이후 며칠이나 지났으니까.
베스는 입술 끝을 올려보려 애썼다. 하지만 바짝 마른 입술은 뜻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어디로 가면 될까? 아마, 외곽에-”
“화장했어, 베스.”
“뭐…?”
아이네스는 머뭇거리며 답했다.
“공작님이 오셨어. 아이의 사인도 살피셨고. 그분께서 널 대신해서….”
“태웠다고…? 루카를?”
멍한 머릿속을 애써 굴려, 아이네스가 한 말을 곱씹었다.
‘공작은 번트의 모든 이가 볼 수 있는 언덕 꼭대기에서 하녀를 태웠어.’
속이 울렁거렸다.
아닐 거야. 설마. 그렇지 않을 거야.
“나도,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
베스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되는대로 혀를 놀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부터 뚝뚝 끊어지는 장면들이 눈앞에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누군가의 손을 빌려 치장하고, 클리프 가문의 차를 타고, 제국 병원을 들러 흰 상자 하나를 받고, 불어오는 바람에 정신을 차렸을 땐 항구가 한눈에 보이는 언덕 위였다.
“어서 보내주자, 베스.”
함께 온 딕시가 울음을 참으며 그녀의 어깨를 도닥였다.
거친 바닷바람을 맞으며 안아 든 상자를 열었다.
“여기에 가고 싶었구나.”
발아래 모든 것이 꿈속과 비슷했다. 딱 하나, 루카가 없는 것 빼곤.
이젠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는 아이의 흔적을 허공에 뿌렸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이렇게 예쁜 아이를 어떻게 넥서스에 잠들게 할 수 있을까. 좋은 기억이라곤 없을 그 넥서스에.
그러다 갑자기 들려오는 루카의 목소리에 어깨를 흠칫 떨었다.
‘아주 예전에 그분께 접근하던 여자들이 있었는데 모두 죽었대요. 엄청 잔인하게.’
아니야. 루카, 아니야.
베스는 힘껏 고개를 저었다.
‘가죽을 벗겨서 태우셨대요….’
그렇지 않아.
베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지 않아야만 해.”
누굴 위한 다짐인지 알 수 없었다.
계속해서 바람이 불었다.
어쩌면 제 마음이 흔들려 바람이 분다 착각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 * *
데베르는 오늘도 어김없이 그가 오기 전에 잠든 베스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집사에게 듣기론 시녀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왔다고 했는데, 새삼스럽게 달라진 점은 보이지 않았다.
얇은 슬립 한 장만 걸친 채 쓰러져있는 여자의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그 상태로 시선을 올리자 이마의 상처가 유독 눈에 거슬렸다.
피는 이 여자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다고 사라지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메마른 손으로 상처의 잔흔을 쓸었다.
“오늘은 울지 않네.”
손끝으로 전해지는 사치스런 온기를 느끼다, 손을 떼려는 순간.
“….”
“….”
여자의 손이 그의 손 위로 겹쳤다.
어둠 속에서 느릿하게 깜빡이는 속눈썹이 보였다.
“꿈인가….”
물기 어린 목소리가 그에게 물었다.
데베르는 오히려 자신이 묻고 싶었다.
이건 꿈일까. 또다시 빌어먹을 내 환각일까.
“당신이 이럴 리가 없는데….”
웅얼거리는 속삭임이 그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다행히도, 아직 넌 꿈속을 헤매는구나.
작은 손을 시트에 내려놓기 위해 허리를 일으키려는데, 돌연 가느다란 팔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가지 마, 데베르 클리프.”
데베르는 숨을 멈추었다.
귓가에 닿는 목소리는 속절없이 떨리고 있었다.
“지금이 꿈이 아니란 걸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