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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47화 (147/206)

147화

“너, 누구야….”

이미 들은 적 있는 말이었다.

캄캄한 전장의 숲길. 커다란 나무 등 아래. 청년이 된 데베르 클리프에게 멱살이 잡힌 채 들은 그 말.

기억 속에 묻어둔 음산한 목소리를 따라 베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데….”

그곳엔 한때는 애인이었고, 지금은 남편이자, 이젠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정적이 서 있었다. 물론 그의 텅 빈 시선은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것을 보는 듯 무감하기만 했지만.

아, 무언가 잊고 있던 것이 그제야 떠오른 것처럼 남자는 눈썹을 들썩였다.

“베스.”

미묘하게 초점이 엇나간 눈동자가 천장을 한번 쳐다봤다가, 스르르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칼론에게로 향했다.

허공에서 눈이 마주치자, 데베르의 상태를 먼저 알아본 칼론이 비식거렸다.

“소문대로네. 맛이 갔구나?”

그때까지도 올리비아의 목을 쥔 손에 힘을 놓지 않던 데베르가 툭, 악력을 풀었다.

베스는 족쇄처럼 감긴 그의 손가락을 얼른 풀어내, 올리비아의 호흡을 살폈다. 이미 시체나 다름없는 꼴이었지만 아직 숨은 붙어 있었다. 버석한 뺨에 제 얼굴을 붙여 조금의 온기라도 전하려 하자 또다시 눈물이 쏟아져 벌떡 몸을 일으켰다.

“공작, 읏!”

그러나 갑자기 달려드는 데베르에게 치여 뒤로 밀쳐졌다. 말릴 틈도 없이 두 남자의 몸이 서로 사납게 엉겨 붙었다.

정적을 깨는 파열음과 함께 낡은 창문의 유리 조각이 우수수 밑으로 흩어졌다.

“으윽, 이 개새끼가!”

“베스와 뭘 하고 있던 거야.”

이젠 올리비아가 아닌, 칼론의 목을 움켜쥔 데베르는 좀 전과 비교도 되지 않는 힘을 실어 바뀐 표적의 머리통을 창밖으로 밀어냈다. 창턱에 걸친 칼론의 단단한 허리가 남은 몸을 지탱하고 있었지만, 관자놀이에 힘줄이 돋을 만큼 악을 싣는 데베르의 기세를 버티기는 힘들어 보였다.

약. 베스는 환히 달빛이 비쳐드는 곳에 서 있는 데베르의 얼굴을 보고서야 그가 지금 무언가에 취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 없는 새 재미라도 본 건가.”

“크큭, 윽. 미친… 새끼.”

칼론은 핏대 선 흉흉한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데베르를 노려봤다. 그러나 참지 못하고 끅끅 새 나가는 웃음은 어쩔 수 없었다. 꼭 놀이라도 하는 것 같았으니까.

“우리가, 큭. 아직 이럴 때는, 아닌데.”

“….”

안광이 죽은 잿빛 눈동자는 상대의 숨통을 끊는 데만 혈안이 돼 있었다.

점점 칼론의 허리가 뒤로 넘어갔다. 동시에 비틀어지는 굵은 모가지는 퍼렇게 질려갔다.

“제발…!”

베스가 있는 힘껏 데베르의 허리를 잡아당겨도 부질없는 짓이었다.

마침내 칼론의 한쪽 다리가 허공으로 들릴 무렵, 베스는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울부짖었다.

“데베르!”

순간, 데베르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현실이 아닌 어딘가를 부유하는 것만 같던 시선의 길이 점차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제길…!”

칼론은 욕을 짓씹으며 엉망으로 벌어진 셔츠 깃을 신경질적으로 털었다.

데베르는 눈앞의 칼론 따윈 보이지 않는 것처럼 제 허리를 껴안은 채 매달리는 여자를 내려다봤다. 언젠가는 단정히 머리칼에 붙어 있었을 장식끈이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베스는 산발이 된 머리카락 속에 얼굴을 숨기고 울고 있었다. 그 소리 없는 울음을 따라 그의 구두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끔찍했던 전장의 그날을 재연하는 것만 같았다. 그때도 베스는 이 남자를 붙잡고 무너져내렸었다.

“쯧.”

바닥에 주저앉은 베스를 한번 일별한 칼론은 창턱에 발을 올렸다.

생각보다 재밌다 싶었는데 막상 저 꼴을 보니 썩 그렇지도 않았다.

“저러니 못 벗어나지.”

그는 그대로 외벽을 타고 손쉽게 병원을 빠져나갔다.

고요한 병실엔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베스의 숨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멍하니 깨진 유리 조각을 바라보던 베스는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쇳소리처럼 까칠한 목소리가 목구멍을 기어 올라왔다.

“…날 죽여요. 지금이라도.”

아버지, 할멈, 사라진 보호구역 아이, 콜린스, 그리고 루카까지. 이젠 누가 저를 위협하는지도 궁금치 않았다. 지독한 악연일 수도, 누군가의 계략일 수도 있겠지만 만약. 아주 만약에 그 끝에 서 있는 사람이 저 남자라면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았다.

“죽여.”

이 말이라도 할 수 있어 다행이라, 마음 한구석이 기껍다면 정말 제가 미친 거겠지.

담담한 표정 속에 숨긴 진심은 빛을 잃은 지 오래였다.

“도망치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을 테니.”

데베르는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도 모르는 것 같은 파리한 입술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누구 좋으라고.”

데베르는 눈을 맞추기 위해 기꺼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베스는 멀건 얼굴로 그를 마주 봤다. 더 이상 소년 데베르는 없다. 그 사실을 이젠 그녀도 인정해야만 했다.

“내가 그렇게 쉽게 놓아줄 것 같아?”

거칠한 남자의 손끝이 흰 얼굴에 난 눈물길을 훑었다.

달랠 생각 없는 그 손길 하나에 참지 못하고 우는 꼴이라니. 제가 이 어쭙잖은 다정함을 핥아먹고 있는 사이에도 루카는 홀로 영안실에 버려져 있을 텐데.

“베스, 난 그럴 생각이 없어.”

“제발….”

뺨을 감싼 남자의 손을 펼쳐 얇은 목을 들이밀었다. 짙어진 체념 위로 원망이 묻어났다. 그 원망을 받아먹는 데베르의 숨이 거칠어졌다.

“함부로 다가올 땐 언제고, 네 멋대로 사라지겠다는 거야.”

콱, 그의 손에 악력이 실리자 베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본능적으로 숨통을 트기 위해 입술이 벌어지자 데베르는 얕게 웃었다.

그래, 그렇게 살려고 해야지. 너는 내 곁에서 살려고 발악을 해야지.

비틀린 욕정이 그를 끝없는 바닥으로 추락시켰다.

데베르는 잔뜩 웅크린 여자의 허리를 잡아당겨 품에 가뒀다. 쌕쌕 내쉬는 숨이 그의 귓가에 제대로 들리도록 작은 머리통을 제 뺨에 단단히 붙였다.

“…나와 함께 진창을 뒹굴자, 베스.”

달콤한 목소리로 끔찍한 권유를 하는 것까지 그날을 닮아 있었다.

모든 게 지독했던 시간을 되풀이하는 것만 같아 베스는 몸서리를 쳤다. 몸을 짓누르는 그의 무게가 버거웠다. 벗어나려 해봐도 그의 품 안일 뿐이었다.

“욱…!”

또다시 토악질이 밀려왔다. 외로이 누워있을 루카의 얼굴은 하릴없는 죄책감을 일으키고, 삶보다 죽음이 더 가까워진 어미의 얼굴은 공포를 불러와서.

목덜미에 훅 끼쳐오는 뜨거운 숨은 아직 그가 어느 환각 속을 헤매고 있음을 말해줬다.

“내 두려움은 여전히 그곳에 있어….”

데베르는 베스가 알지 못할 얘기를 두서없이 뱉어냈다.

“자꾸만 등 뒤에 피가 흘러서 눕질 못해. 벌어진 살 틈으로 천이 엉겨 붙으면 옷을 벗는 순간 또다시 피범벅이 되거든. 클리프란 이유만으로도 죽이려 하는 인간들이 넘쳐나니까.”

그의 입술이 눈물로 얼룩진 뺨을 지분거렸다.

“태어나 처음 죽인 첩자는 유모야. 직접은 아니야. 어린놈이니 방심하다 들킨 밀서를 카시우스에게 넘겼어. 더럽고 역겨워서 참을 수가 없더라고.”

잔인한 고백이 이어졌다.

“카시우스가 처형하기 전까지 늘 궁금했지. 유모는 언제쯤 나를 죽일까. 오늘은 내 수프에 독을 탔을까. 날 죽이고 싶으면서 왜 자꾸만 웃어줄까. 왜….”

희미한 중얼거림이 베스를 불렀다.

“왜 하필 첩자야.”

베스는 벌겋게 짓무른 눈을 그의 어깨에 묻었다.

왜 하필 첩자일까. 세상에 수많은 끔찍한 것 중 왜 하필.

불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숨소리는 꼭 그가 흐느끼는 것처럼 착각하게 했다.

“내 등은 날 죽이기 위한 과녁인데, 넌…. 넌.”

실수였나. 그 흉터를 발견했던 것이.

지난 시간을 돌이켰다. 정말 실수였나. 악연을 시작하지 않으려면 이 남자의 상처를 지나치고, 잠 못 드는 밤을 모른 척해야 했나.

베스는 손을 올려 아물지 못한, 그리고 영원히 아물지 못할 그의 등을 잠잠히 쓰다듬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미안해요….”

더욱더 거세게 그의 팔이 그녀를 옭아맸다. 곧 사라질 무언가를 붙잡는 어린아이처럼.

“미안해요. 미안….”

베스는 서서히 밀려드는 수마에 잠식됐다.

그렇게 한참을 데베르는 베스를 안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은 어디로도 떠나가지 못할 여자를 안은 채 참아온 숨을 헐떡였다. 그간 모자랐던 베스 제인스만의 향취를 탐하기 위해 목덜미에 코를 묻고 재차 숨을 들이쉬었다.

창밖의 해가 밝아올수록 데베르는 평소의 클리프 공작으로 돌아갔다.

개처럼 바닥을 기며 이 여자 몰래 약을 집어삼키다, 어떻게 코펠까지 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여기였고, 또다시 정신을 깨워보니 이 여자의 품이었다.

“너는 어떤 밤을 보냈길래.”

데베르는 잔뜩 생채기 난 베스의 맨발을 꽉 쥐었다.

무방비하게 잠든 여자를 안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딸과 닮았다는 과거 카시우스 첩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미동도 없이 혼수상태에 빠진 채였다.

“딸 덕에 연명했나 보군.”

베스 릴리아드. 베스 제인스를 베스 클리프로 살려놓기 위해선 죽어야 하는 인물.

그 무의식이 약에 취한 그를 이곳으로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재수 없게 베스를 만난 거고.

병원 밖으로 나오자마자 보이는 클리프 가문의 차에도 데베르는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주인의 행선지를 짐작한 눈치 빠른 집사가 보냈으리라.

그는 뒷좌석에 올라타며 베스의 안색을 다시 한번 살폈다. 날씨가 제법 찼다.

“웨인으로.”

“집사님이 전달을 부탁하셨습니다.”

수행인은 편지 한 장을 건넸다.

간밤의 짧은 소식을 전해 들은 데베르는 아무것도 모르고 어둠을 헤매는 제 아내의 뺨에 가볍게 입 맞췄다.

“이런 밤을 보냈구나.”

그녀가 모를 게 분명하기에 떨어보는 가증스런 다정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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