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도망친 밤-146화 (146/206)

146화

벌벌 떨리는 손이 젖혀진 천의 끝자락을 붙잡았다. 루카가 처음으로 아가씨의 옷자락을 잡았을 때처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어떻게 루카가.

“아는 아입니까?”

눈치를 보던 장정이 말을 건네자, 베스는 멍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아니에요. 제가 모르는 아이예요. 루카는 지금쯤 배를 타고 먼 여행을 시작했거든요. 그 대답을 하고 싶어 입술을 뻐끔거려봤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시야가 일렁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슬프지 않은데. 툭, 툭. 볼을 타고 흘러내리던 눈물이 기어코 턱 끝에서 대롱거리다 바닥으로 추락했다.

왜 이러는 걸까. 저 아이는 분명 루카가 아닐 텐데. 베스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에, 베스.”

그사이 로비를 지나가던 몇 사람들이 심상찮은 기운을 눈치채고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 속엔 아이네스도 있었다.

그녀는 들것에 실린 시체의 얼굴을 알아보곤 급히 다가왔다. 베스의 손에 들린 천을 재빨리 낚아채 죽은 아이의 얼굴을 가렸다.

“영안실로 옮겨주세요.”

장정들이 걸음을 옮기자, 베스가 쥐고 있던 작은 손이 맥없이 떨어져 나갔다. 서늘한 촉감이 아직도 손끝에 선한데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니.

“이리 와.”

아이네스는 무리의 뒤편에 조용히 서 있는 몰리 부인을 향해 눈짓하곤, 베스를 영안실로 이끌었다.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에 베스는 불현듯 구역질이 밀려와 입을 틀어막았다.

허리를 숙이고 헛구역질하는 베스의 눈에 차가운 베드 위에 눕혀지는 몸뚱이가 보였다. 피로 물들다 못해 암갈색으로 척척해진 원피스 끄트머리의 색이 익숙했다. 루카가 좋아한 노란색이었다.

“베스, 아무래도-”

“내가 잘못 본 거 같아. 루카가 아니야. 나, 나갈래.”

허둥거리며 문고리를 부여잡았다.

“베스…!”

“아니라니까!”

외마디 비명과 함께 작은 몸이 주저앉았다. 처음으로 지른 비명에 제가 더 놀라, 헉헉거리며 밭은 숨을 뱉기 시작했다. 형체 없는 숨들이 덩어리처럼 뭉쳐 가느다란 목구멍을 틀어막는 것만 같았다.

“흐윽, 흑… 흐흑.”

꼴사납게 흐느끼는 소리가 제 귓가에도 들렸다.

‘제가 살면서 들은 목소리 중에 아가씨의 목소리가 가장 예뻤어요. 그 목소리를 가장 먼저 듣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사랑스러운 작별 인사가 아직도 머릿속을 맴도는데, 어떻게 루카가.

“사인을 알 수 있을까요?”

아이네스는 헐떡이는 베스를 대신해 물었다.

“제작 중인 선박 틈에 끼었습니다. 갑판에서 미끄러진 건지, 혼자 그 사이로 들어갔다 봉변을 당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제가… 제가 확인해야 해요.”

베스는 휘청거리는 다리를 애써 곧추세우며 루카에게로 다가갔다.

무표정하게 감긴 눈은 더 이상 아가씨를 향해 웃어주지 못했다. 군데군데 으스러졌을 몸을 함부로 만지지도 못해, 떨리는 손은 허공을 더듬었다.

“전부 내 잘못이야. 보내지 말 걸. 안된다고 말릴걸.”

파리한 루카의 얼굴 위로 눈물이 두서없이 떨어졌다.

그때, 부러진 팔뚝에 묻은 시커먼 페인트 자국에 베스는 돌연 울먹이던 입술을 다물었다. 흐르던 눈물도 마침표를 찍듯 마지막으로 아이의 뺨 위로 떨어져 내렸다.

불길한 직감에 가장 먼저 움직인 건, 갈 곳을 잃었던 손이었다.

“베스, 무슨 짓…!”

턱, 둔탁한 소리를 내며 루카의 몸이 뒤집혔다. 친구를 말리려던 아이네스는 눈앞의 광경을 보곤 숨을 들이켰다.

안 그래도 싸늘한 영안실에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그 선박이 클리프 가문 것이었군요.”

굳은 핏자국과 섞인 거대한 문장 끄트머리는 의심할 여지 없이 클리프의 것이었기에.

“클리프….”

이번에도 또다시 클리프. 중얼거리는 베스의 목소리는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아…!”

당장 복도로 뛰쳐나가 창문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만 해도 불이 켜져 있던 군수회사는 죽은 듯이 새카맸다.

안돼. 안돼.

영안실을 뒤로하고, 병원장실을 향해 뛰어가는 베스는 들이닥치는 한기에 온몸이 식어가는 줄도 몰랐다. 수화기를 들고 클리프 저택까지 전화가 연결되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전화선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두서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지금, 공작님이… 저택에 계시나요?”

[아직 오시지 않았습니다. 혹시 무슨 일 있으신 겁니까.]

집사의 걱정스런 물음에도 베스는 답하지 못하고 수화기를 떨어뜨렸다.

겉옷 따위 챙겨입을 여유도 없이 병원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눈에 보이는 아무 마차나 붙잡기 위해 거리 한복판에서 미친 듯이 손을 흔들었다.

“코펠로 가주세요. 최대한 빨리…!”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마부에게 손에 쥔 돈을 닥치는 대로 쥐여 주며 재촉했다. 엉겁결에 분에 넘치는 돈을 받아 든 마부가 부리나케 채찍을 놀리고 나서야, 베스는 마차 안에 틀어박혀 손끝을 뜯어댔다.

마부는 계속해서 “아닐 거야”만 반복하는 아가씨를 힐긋 돌아보곤 남몰래 혀를 찼다. 오밤중에 단단히 정신 나간 여자 하나를 손님으로 받은 게 분명했다.

“아니야, 아닐 거야.”

홀로 얼마나 주문을 걸었을까.

다그닥거리던 말발굽 소리가 점점 느려졌다.

항상 루카만 외따로 보내야 했던 코펠의 병원 앞에서 마차가 멈추어 서자, 베스는 희미한 빛을 이정표 삼아 따라갔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램프 몇 개의 불빛이 전부인 병원은 음산하기만 했지만 두렵지 않았다.

베스의 두려움은 다른 곳에 있었다.

지키고 있어야 할 간병인도, 간호사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병원 계단을 계속해서 올라갔다. 올리비아가 있을 그곳까지.

커다란 병실 맨 구석. 비쩍 마른 여체의 발을 발견한 베스의 입꼬리가 그제야 움찔거렸다. 살아있다는 걸 확인한 후 밀려온 희미한 안도감이었다.

“아.”

하지만 그 옆에 선 커다란 그림자를 보곤 불시에 턱이 떨리기 시작했다.

베스는 자신을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림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여린 몸뚱이가 퍽 소리가 날 만큼 거세게 그림자에 들러붙었지만, 남자의 손길 한 번에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뭐야?!”

굵은 목소리에 예민함이 묻어났다.

그림자는 툭툭 제 어깨를 몇 번 털더니 쓰러진 여체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베스?”

칼론…? 달빛에 비친 적안을 확인한 베스는 바르작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하, 이것 참. 묘하네.”

칼론은 피식거리더니 손을 내밀었다. 베스는 미간을 찌푸리곤, 저보다 한참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남자를 노려봤다.

“당신이 여기 왜….”

“왜라고 말하면 좀 서운하고.”

그는 겨울을 향해 가는 서늘한 밤공기에도 불구하고 여름 셔츠를 입고 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얇은 천은 탄탄한 몸을 더 부각했다. 상대를 두렵게 만들 생각이라면 충분히 목적을 달성한 터였다.

베스는 칼론을 무시한 채, 올리비아가 누운 침대맡까지 무릎걸음으로 겨우 기어갔다. 이미 시체나 다름없는 어머니의 코밑에 떨리는 손을 가져다 대고 나서야, 참은 숨을 토해낼 수 있었다.

“필시 무슨 일이 있었나 보군.”

하는 꼴을 잠자코 지켜보던 칼론이 말했다.

조롱도, 장난기도 없는 그 목소리에 베스는 더 혼란스러워졌다.

“당신이 한 거야?”

“뭘?”

“…루카.”

“….”

칼론은 문득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쓸었다.

마주 보고 있는 새카만 눈동자에 물기가 어리는 게 보였다. 창문 새로 비치는 달빛 때문인지, 발갛게 충혈된 눈이 유난히 선명하게 반짝였다.

“그런 눈으로 물으면 답하기 곤란한데.”

창턱에 걸터앉은 그는 손가락으로 제 눈가를 가리켰다.

“별로 진실을 알고 싶지 않아 하는 눈이잖아. 거짓말에 재주 없는 첩자라니. 안타까운 일이야.”

“말장난하지 마.”

“우리가 장난칠 사이는 아니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줄 요량으로 뻗는 칼론의 손을 베스는 매섭게 쳐냈다. 그럼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고매하신 공작부인이 어쩌다 맨발로 여기까지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헛다리 짚었어.”

꽤 냉정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난 단순히 호기심에 오늘 밤 여기로 온 거고, 우연히 널 만난 거야. 루카니, 뭐니 내가 아는 바도 아니고.”

“호기심…?”

“그래, 호기심.”

칼론은 올리비아를 향해 턱짓했다.

“그리 아름다웠다던 네 어미 얼굴이 궁금해서. 카시우스랑 뒹굴 정도면 보통 미모론 안 됐을 텐데.”

솟구치듯 일어난 베스가 그의 뺨을 내리치려 했지만, 되려 붙잡힌 손목만 부들거리며 떨렸다.

칼론은 잡은 손목을 제 앞으로 확 당겼다. 사람에 따라 제법 매혹적이라 느낄 미소가 그의 얼굴에 걸쳐졌다. 뱀처럼 형형한 눈동자가 코앞에 선 여자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요즘 데베르랑 사이가 안 좋나 봐? 왜지? 들켰어?”

“…하워드도 당신도 미쳤어.”

“당연하지. 핏줄이잖아. 데베르도 제 아버질 닮아 널 눈여겨본 거 같던데.”

한껏 무너져내리는 여자의 눈동자를 보며 칼론은 고개를 기울였다.

“아님, 그새 공작 취향이 변했나? 너 생긴 건 코바흐전 때랑 똑같거든. 아, 말 못하는 게 취향인가 봐. 그 새끼는.”

부러 날 세운 말을 뱉을 때마다 허물어지는 하얀 얼굴이 더 상처 주라, 그의 저열한 본능을 충동질했다. 어쩌면 공작과 자신은 잔악한 취향이 닮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지금이라도 그때처럼 말 못하는 척해 봐. 그럼 혹시 알아? 데베르가 또다시 널, 꽤 예뻐해 줄지?”

“정말 루카를-”

“쉿.”

그때, 적막한 복도를 타고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칼론은 잽싸게 침대 옆에 쳐진 커튼 뒤로 베스와 제 몸을 욱여넣었다. 베스는 칼론에게 잡힌 어깨를 빼내려 버둥거렸지만, 곧 바닥에 길게 드리워지는 그림자 하나를 보곤 숨을 죽였다.

터벅거리는 걸음은 얇은 커튼 한 장을 두고 멈추어졌다.

“….”

숨 막히는 정적이 병실을 감돌았다.

커다란 그림자는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누워있는 여체를 향해 서서히 손을 뻗었다. 그걸 지켜보는 베스의 입술도 함께 점점 벌어졌다. 그러다 그림자의 끝이 사냥감을 낚아채는 맹수처럼 마른 목을 틀어쥐는 순간, 베스는 온몸을 던졌다.

“안돼!”

올리비아의 위로 엎어진 그녀는 잔뜩 핏줄이 불거진 남자의 손을 애원하듯 붙잡았다.

이 온기. 느낌. 향.

그 주인이 누구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너, 누구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