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도망친 밤-145화 (145/206)

145화

“아가씨, 저 여기 있어요!”

병원의 복도 창문을 두드리며 방긋 웃는 루카는 그사이 키도, 머리카락도 조금 더 자라 있었다.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시커먼 장정 탓인지 루카는 평소보다 더 앳돼 보였다. 그 얼굴이 꼭 처음 만났을 때의 파리한 얼굴 같아 베스는 마음이 아렸다.

“루카.”

짐짓 밝은 척하며 문을 밀고 나가자, 루카가 폴짝거리며 제 아가씨 곁으로 다가왔다. 실로 오랜만의 조우였다.

“그런데 이 짐….”

옷을 여미며 다가오던 베스의 시선이 루카의 발치로 향했다. 그곳엔 낡은 가방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루카는 어색하게 웃으며 가방끈을 고쳐 들었다.

“헤헤. 차차 말씀드릴게요.”

곁으로 다가온 루카는 조심스레 베스의 카디건 끝자락을 잡았다. 그 작은 몸짓 하나에 베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평소의 루카였다면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루카는 달리는 기차 안에서 베스를 찾은 이후, 지금까지 항상 그녀를 ‘아가씨’로 대우해주었다. 그랬기에 까불긴 했을지언정, 함부로 몸에 손을 얹는 행동은 일절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루카는 아무 말 없이 빙긋 웃으며 베스를 거리로 잡아 이끌었다. 자연스레 그들 뒤에 수행인들이 붙었지만, 힐긋 돌아보기만 할 뿐 겁먹은 티는 나지 않았다.

“저도 한 번쯤은 아가씨를 대접해드리고 싶었어요.”

루카는 베스를 웨인 중심가의 디저트 가게로 데려가고 있었다. 베스는 영문도 모른 채 루카의 손에 이끌려 가면서도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저번에 저한테 금화 주셨을 때, 처음으로 이 가게에 들어와 봤어요. 늘 달콤한 냄새가 나서 꼭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소원성취했지 뭐예요.”

“루카.”

“잠시만 기다리세요, 아가씨.”

테라스에 베스를 앉힌 루카는 묻는 말엔 대답도 않고 종종걸음치더니, 이내 손에 작은 접시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동그란 접시 위엔 손바닥만 한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억지로 베스의 손에 포크를 쥐여 준 후,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새하얀 게 아가씨를 닮아서 사드리고 싶었는데….”

그러나 결국 말을 미처 끝맺기도 전에 울먹이기 시작했다.

“아가씨, 저 이제 넥서스를 떠나요.”

“뭐…?”

“곧 항구로 가야 해요. 표도 이미 구했어요.”

“갑자기 무슨 말이야. 떠난다니…. 설마.”

베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도망은 아니겠지.”

다행히 루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백작님이 떠나라고 하셨거든요.”

“그자가?”

“표랑 여비도 구해주셨어요.”

하워드가 어째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루카를 클리프가에 감시하는 눈처럼 붙이려던 계획은 실패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하워드가 어렴풋이나마 비밀을 아는 자를 곱게 보내줄 리는 없었다.

“착오가 생긴 거야. 그럴 리가 없어. 안돼, 루카. 가선 안 돼.”

베스는 두서없이 루카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제 곁을 떠나는 이는 누가 됐건 사라질 것만 같았으니까.

루카는 안절부절못하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목소리를 잔뜩 낮췄다.

“사실 얼마 전, 폭우가 내리던 밤에 데베르 공작님이 저택으로 오셨어요. 백작님과 무슨 말씀을 나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뒤에 떠나라는 명령을 받아서….”

공작이란 말을 듣는 순간, 베스는 쥐고 있던 손목을 힘없이 놓았다.

자신은 단 한 번도 첩자를 곱게 죽인 적 없다는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했다.

“백작님은 제 존재 자체가 아가씨께 위험이 될 거라고 하셨어요. 괜히 이것저것 쥐새끼처럼 들은 것만 많다고. 살려 줄 때 얼른 넥서스에서 나가라고 그러셨는데.”

“엑! 겨우 이거 하나 가지고 누구 코에 붙여?”

혼란스런 생각을 갈무리하기도 전에 꽥 고성이 머리맡에서 들려왔다.

“딕시?”

갑자기 나타난 딕시는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레 그들이 앉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도 너무 걱정 마세요! 이분이 도와주시기로 하셨어요. 아, 이건 아가씨 거라고요!”

루카가 포크를 쥔 딕시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딕시는 입술을 삐죽이며 포크를 놓았다. 노상 함께 간호복만 입고 다니던 때에 비하면, 화려한 녹색 원피스를 입은 딕시는 제법 사업가의 분위기가 풍겼다. 그녀는 귀찮은 듯 손을 휘저으며 그간의 일을 요약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거야. 쥐방울이 거리에서 지나가는 날 보더니 대뜸 도와달라고 하더라니까?”

“공작님이 저택에 오신 이후로 제 외출이 좀 자유로워졌었거든요. 저도 이참에 돈 버는 법을 배워 보려고요.”

“마침 꼬맹이 목적지가 우리 셋째 언니가 사업하는 곳이길래, 거기서 심부름이나 하라고 일러뒀어.”

딕시가 시계탑을 힐끔 쳐다봤다.

“이제 슬슬 출발해야 할걸? 내가 대여 마차도 저기 불러놨거든.”

“그럼,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루카는 애써 방긋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스로서는 당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루카는 엉거주춤 제 팔을 붙잡는 아가씨를 처음으로 안아봤다. 저보다 조금 작은 아가씨의 품은 생각보다 훨씬 따뜻했다.

“이별이 길어지면 슬플까 봐 갑자기 떠나는 걸 용서해주세요.”

“정말로 괜찮은 거지?”

데베르란 말을 들은 순간부터 베스는 자신이 루카를 붙잡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떠나는 아량을 베풀어준 이가 하워드라는 게 미심쩍긴 해도, 막연히 웨인에 붙들어 두는 것보다는 딕시의 보호 아래 외국으로 나가는 것이 훨씬 나았다.

“그리고 이건 언제나 하고 싶었던 말인데…. 제 목숨을 대가로 아가씨의 숨통을 조인 건 너무 죄송해요. 그래도 전 아가씨를 만나 참 행운이었어요.”

둘은 컴컴한 지하실에서 서로를 마주한 첫날을 기억했다. 지금껏 서로의 죄책감이 되어 묶여 있던 관계였다.

“아니야, 루카. 아니야. 네가 거기에 없었으면….”

“아가씨는 캄캄한 지하실에서 저의 유일한 빛이었어요. 마치 새로운 가족을 만난 것처럼.”

“난-”

무슨 말인가 하려는 베스를 꽉 껴안은 루카가 그녀의 귀에 대고 뭐라 속삭였다. 오직 제 아가씨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속삭임이었다.

그 말을 들은 베스는 차오르는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어야만 했다.

“…그래.”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지금은 작별 인사라도 할 수 있으니까.

“비록 결혼식을 못 본 건 너무 아쉽지만, 다음에 제가 외국에서 돈 많이 벌면 반드시 놀러 오세요.”

베스는 기약 없는 약속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에 올라타려던 루카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다.

“제 이름 뜻 기억해주실 거죠?”

어떻게 그걸 잊을까. 베스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네가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가라고.”

손님이 탄 걸 확인한 마부가 채찍을 정리했다.

“어디에도 속박되지 말고 날아가라고.”

“어디에도 속박되지 말고 날아가라고.”

둘이 동시에 말하곤 짤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저, 드디어 날아가요. 가고 싶은 곳으로.”

눈물을 그렁대면서도, 앞으로의 삶에 대한 기대감으로 상기된 뺨이 사랑스러웠다.

베스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소녀의 얼굴이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난 네가 당연히 아는 줄 알았어.”

딕시는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입술을 뗐다.

테이블엔 이제 선물한 이가 사라진 케이크만이 놓여 있었다.

베스는 외출이 자유로워진 루카가 왜 제게 오지 않았는지 희미하게나마 짐작했다. 백작의 입으로 제 존재가 아가씨에게 위험하단 소리를 들었으니 겁을 집어먹었을 게 분명했다.

“너무 걱정 마. 셋째 언니가 성격이 좀 지랄 맞긴 해도 정이 많아서 아마 잘 데리고 있을 거야. 그리고 요즘 웨인 분위기가 어린애 혼자 지내기 좋지도 않고.”

“웨인 분위기?”

흘리듯이 덧붙여진 말에 베스의 표정이 굳었다.

“아, 소식지가 뜸해 넌 모르겠구나.”

딕시는 여상한 얼굴로 속닥이기 시작했다.

“이상한 소문이 돌아.”

그녀는 더 은밀히 말할 목적으로 상체를 한껏 테이블 가까이 붙였다.

“가끔 소문을 퍼뜨릴 목적으로 전화국 교환원들을 상대로 전화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아무래도 평민 여자들이 모여 있으니까 소문이 퍼지긴 제격이라서. 불륜이니 사기니 소문은 가지가지인데, 요즘은 전부 공작님과 황자님에 관한 얘기야.”

딕시는 테라스 난간 밖에 선 수행인들의 눈치를 보더니 베스의 귓가에 짧게 속삭였다.

“요사이 황자님 주위 인물들이 죽어 나가는 게 실은 데베르 공작님의 짓이라고.”

“말도 안 되는…!”

“그래, 진짜 말도 안 되지. 두 분이 친우인 건 우리가 전장 병원에서부터 봐왔잖아. 그러니까 내가 클리프 부인인 네게 이 얘길 할 수 있는 거지.”

딕시는 푹푹 케이크를 퍼먹으며 그간 베스가 전혀 알지 못했던 얘기들을 쏟아냈다.

“내가 병원 그만두기 전에, 왜 브리틴 사절단 올 즈음 말이야. 유난히 젊은 부상 환자들이 자주 왔던 거 기억나? 그것도 내전을 준비하던 병사들이 비밀 군사 훈련 중에 다친 거래.”

“그런 얘기를 대체 누가….”

“뭐, 혼란한 시기니까 이 얘기, 저 얘기 괴담처럼 퍼지는 거지. 공포야말로 최고의 무기잖아.”

늘 장난스럽던 주홍색 눈동자가 영민하게 행인들을 훑더니, 한 곳을 보곤 턱짓을 했다. 베스의 시선이 그 길을 따라가자 보따리 짐을 마차에 싣는 이들이 보였다.

“내전이 생기면 웨인이 가장 위험할 테니 지레 겁먹고 떠나는 거야.”

딕시는 한숨을 연신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모르니 너도 몸 사려. 지체 높은 클리프 부인이 갈수록 말라가니 걱정이야, 아주.”

베스는 병원으로 돌아오자마자, 급히 지난 환자들의 차트 기록을 살폈다.

약물, 약물, 자상, 총상…. 웨인에선 흔하다면 흔한 사망 사유였지만, 소문을 듣고 나니 평소처럼 보이지 않았다. 환각에 취해 실려 오던 몇몇 황실 호위병들의 얼굴도 스쳐 지나갔다.

다가오는 겨울만큼이나 빠르게 저물어가는 창밖을 한참 쳐다보다가, 문득 길 너머의 클리프 군수회사를 올려다봤다.

애매한 확신이 스친 건 찰나였다.

“아닐 거야. 아니어야 해….”

벌떡 일어난 베스는 정신없이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때, 열린 정문 사이로 들것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한 풍경에 굳이 걸음을 멈춘 건, 피로 물든 붉은 천 옆으로 삐져나온 손 하나가 유독 눈에 익었기 때문이었다.

베스는 저도 모르게 덥석 차가운 시체의 손을 잡아챘다. 때론 본능이 이성보다 빨랐다.

“…카.”

“어이구! 간호사님.”

그 손길에 들것을 옮기던 장정이 몸이 휘청이며 뒤를 돌아봤다.

“…아닐 거야.”

식어버린 손의 온기만큼이나 읊조리는 목소리도 차가워졌다.

설마. 제발.

짧은 기도를 끝맺기도 전에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덮인 천을 밀어냈다.

“루카…!”

그곳엔 가고 싶은 곳으로 날아간다던 소녀가 얌전히 날개를 접은 채 잠들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