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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44화 (144/206)

144화

바깥에 거세게 내리는 빗줄기에도 불구하고, 적진의 아귀로 들어가는 데베르의 얼굴엔 빗방울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혼자 온 게 아니란 뜻이었다.

하워드가 닫힌 문을 힐끔 쳐다보자, 데베르는 성심껏 바깥의 상황을 말해줬다.

“수행인 몇 명 정도.”

아량이라도 베푸는 듯한 태도였다.

데베르는 침음을 삼키는 하워드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서재를 둘러봤다. 유행을 따르기보단 과거의 자태를 지닌 실내는, 창문 하나 없이 사면이 책장으로 갑갑하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감상하듯 손가락으로 책을 훑었다. 시시때때로 끌려갔던 카시우스의 서재는 이보다 층고가 높고, 고서가 즐비했다.

“서재가 좋긴 하지. 빽빽이 꽂힌 책들이 꽤 괜찮은 흡음재가 되거든. 뭔가 꺼림칙한 짓을 할 때도 지하실보단 서재가 남들 눈에 괜찮고.”

“…지금 뭐 하자는 거지.”

“그러게. 뭘 하고 싶은 걸까.”

순간, 하워드의 턱 밑으로 묵직한 봉투가 퍽 던져졌다. 단단한 가슴팍에 부딪힌 봉투가 테이블 위로 엎어지자, 안에 든 밀서도 꼴사납게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잔뜩 힘이 들어간 하워드의 턱 근육이 잘게 떨렸다. 다리는 쇠약해졌어도 아직 단단한 그의 몸 곳곳은 첩자 하워드의 젊은 시절이 어땠는지를 어렴풋이 말해줬다.

“날 첩자로 처넣을 생각이라면-”

“주인을 바꾸는 게 어때.”

보란 듯이 말허리를 자른 데베르는 제 할 말만 했다.

애초에 통보를 하러 온 거지, 대화하러 온 게 아니었다.

“무슨…!”

지나치게 무심한 목소리에 외려 하워드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아직 공작이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었다.

하워드가 앉은 테이블을 데베르가 한 손으로 짚자, 위압적인 시선이 그의 머리께에서부터 쏟아졌다.

“권유라고 알아들으면 곤란하고.”

자연스레 상대를 압박하는 서늘한 눈동자는 단순한 젊은 치기가 아닌, 되는대로 전장을 굴러먹은 군대장의 특권이었다.

“카시우스를 두 눈으로 봤잖아.”

그는 직접, 하워드의 안에서 피어나는 상념에 종지부를 찍어줬다.

데베르는 지금 카시우스의 흉내를 내는 중이었다. 차기 황제가 되려는 내 발판이 돼라. 분명 제 아버지는 이리 말했을 것이다. 올리비아란 여자도, 눈앞의 하워드도 이제껏 살아있다는 게 그 증거였다.

‘난 쓸모없는 새끼는 거두지 않아.’

카시우스가 질리도록 뱉어대던 말은, 필요하면 죽이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모든 살육엔 그만의 대의가 있었다. 지겨울 만치 손에 피를 묻히면서도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무역을 핑계로 외국으로 나도는 하워드 백작가의 재력과 정보력은 새로이 황제가 되려는 자에게 꽤 괜찮은 뒷배이리라. 물론, 클리프가에 비길 것은 못 되지만.

아직 상황 판단을 제대로 못 한 하워드의 얼굴에 전에 없는 혼란이 스쳤다. 데베르와 눈이 마주쳤을 때만 해도, 팔다리 하나쯤은 잃겠다고 생각했던 차였다. 그런데 손을 내밀다니.

“…브리틴으로 오겠다는 뜻인가?”

그 말에 데베르는 픽 웃었다. 그러나 꼬챙이처럼 말린 입꼬리는 이내 제자리를 찾아갔다.

“개집에 들어가는 주인이 어디 있겠어. 개가 주인을 바꿔야지.”

노골적인 언사에 이번엔 하워드의 입꼬리가 모멸감으로 씰룩였다.

“호이든까지 죽은 마당에 브리틴의 정통성이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지?”

브리틴 왕가에선 호이든이 마지막 적자였다. 브리틴의 통치까지 겸하던 호이든이 죽었으니 먼 친척뻘인 숙부며 사촌 따위가 등장할 순 있겠지만, 다리를 절만큼 왕가의 피가 진한 인물은 없었다.

데베르는 하워드의 곯아 있는 다리를 비스듬히 내려다봤다.

“아마 내 추측이 맞는 거 같은데.”

이 쳐 죽일 클리프 놈이 감히.

하워드의 불룩한 눈 밑 근육이 분노로 파들거렸다. 저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데베르를 노려보는 눈동자에도 살기가 어렸다.

“잘 생각해. 또다시 멍청한 브리틴 놈 하나를 황제로 세울지, 아니면 브리틴 왕가의 적통을 다시 세우는 시작점이 될지.”

상대의 욕망은 곧 약점이란 것을 잘 안다.

데베르, 그가 그랬으니까.

“시간이 많지 않아.”

그 말을 마지막으로 데베르는 등을 돌렸다. 미련 없이 서재를 떠나는 등에 대고 의문스러운 목소리가 꽂혔다.

“아더 메이너는 오랜 친우 아닌가? 굳이 지금 반목이라… 믿기지 않는군.”

슬쩍 뒤를 돌아보는 눈동자에 잔악스러운 기운이 담겼다.

“내 아버지를 손수 죽인 내게 친우라니.”

은근히 떠보는 입을 다물리기에는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

맴도는 침묵을 작별 인사 삼아 데베르는 서재를 나섰다.

저택 내엔 익숙지 않은 하워드가만의 이국적인 향취가 가득했다. 역겨운 냄새. 한때 이곳에 살았을 베스에게선 단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향이었다.

“출발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수행인들에 발맞춰 차에 오르려던 데베르는 정원 한구석에서 재빠르게 몸을 숨기는 날다람쥐 하나를 발견했다. 정확히는 날다람쥐 같은 베스의 시녀, 루카였다.

사라진 인영의 자취를 눈으로 좇으며 주머니에 든 편지 한 장을 만지작거렸다. 쪽지나 다름없는 빛바랜 종이는 굳이 꺼내 보지 않아도 이미 머릿속에 박힌 뒤였다.

“아이가 있다….”

카시우스는 그 여자를 살려준 게 아니라, 배신의 대가로 무너지고 망가지는 꼴을 지켜보기 위해 살려둔 것이다.

지극히 제 본능 하나만을 위해 끔찍한 선택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했겠지. 처절하게 구를수록 카시우스의 존재는 그녀의 안에 선명하게 떠오를 테니. 정신을 놓은 지 그리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발작처럼 그 이름을 되뇔 만큼 말이다.

데베르가 그리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저 자신에게 있었다.

“…이래서 피는 못 속인단 건가.”

자신도 그와 비슷한, 어쩌면 똑같을 마음을 품고 있으니까.

데베르는 숨을 죽이고 침대맡으로 다가갔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오르내리는 가느다란 어깨가 보였다. 그가 나간 뒤, 어째 슬립은 챙겨입을 기력이 났는지 얇은 끈 하나가 팔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지독히도 얽힌 손은 호이든의 장례식에서 클리프 저택으로 돌아올 때까지도 풀리지 않았다.

결국 먼저 입을 뗀 건 베스였다.

‘손을-’

‘놓으면 네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게 시작이었다.

데베르는 여자를 안아 들었다. 조급한 입맞춤이었다. 부딪히는 잇새로 자꾸만 움츠러드는 말캉한 속을 옭아매기 위해 그는 한껏 고개를 비틀어야만 했다.

몇 번의 지분거림에도 음전하기만 하던 클리프 부인의 얼굴은 쉽게 달아올랐다. 다리를 버둥거리며 내려달란 신호를 보내봤자, 거세게 붙잡힌 허벅지만 아려올 뿐이었다.

데베르는 숫제 정신 나간 사람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벗겨진 원피스는 벌써 그들의 발치를 나뒹굴었고, 방만하게 올라간 슬립 자락은 여자의 허리께에서 달랑거리고 있었다.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한 여자가 결국 그의 어깨에 얼굴을 박았다. 수치라도 참아보겠다는 건지 입술을 꾹 깨문 채였다.

‘흣….’

데베르는 그 죽어가는 신음 하나라도 들어보려, 살집 없는 몸뚱이에서 유난히 곡선이 두드러진 부분을 집요하게 빨아당겼다. 팔딱거리는 숨이 입술로 전해질 때마다 치밀어오르는 쾌감에 머리가 저릿했다.

반면, 한 줌도 되지 않는 발목을 움켜쥘 때는 분노가 치밀었다.

‘오늘 밤 하워드에게 가면 무슨 소릴 하려고 했어.’

귓가를 잘근거리며 던지는 물음이 살벌했다.

‘오늘은 죽일 수 있을 것 같다 말하려 했어?’

큭큭대던 웃음소리는 이내 열기 오른 숨소리로 바뀌었다.

‘아니… 읏, 아니에요. 인제 그만 내려주면….’

벽에 등을 붙인 채 정신없이 흔들리던 여자가 그에게 기대왔다. 별수 없을 것이다. 허공에 붕 뜬 채 손 뻗을 곳이라곤 그 하나뿐이니까.

데베르는 베스가 제게 더 깊이 안겨 올 때까지, 그밖에 없는 것처럼 간절하게 목덜미를 껴안을 때까지 집요히도 아래를 맞부딪혔다. 이렇게 굴지 않으면 언제라도 사라질 여자였다.

그는 낙인을 찍듯 베스의 안을 탐하고 있었다.

알려주는 것이었다. 이 진창에 널 가둘 사람도, 구해줄 사람도 나라는 것을. 오직 나밖에 없다는 것을.

그게 진실이건 아니건은 중요치 않았다.

‘사랑한다고 해 봐.’

부어오른 정점을 보란 듯이 입술로 쓸며 재촉했다.

착실하게 저를 따라 반응하는 여자의 몸이 기꺼웠다.

‘울지 말고. 얼른.’

하얀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 자국이 퍽 아까워 데베르는 제 입술을 가져갔다. 가혹할 정도의 소유욕이었다. 그녀의 안에서 나오는 건 그 어떤 것도 아까웠으니까.

‘난… 정말로, 흑, 해칠.’

‘그딴 말 말고, 뱉으란 말이나 해.’

뻔한 죄책감에 이젠 요구하는 말마저 제대로 하지 못하는 여자를 보자 심사가 뒤틀렸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 너는. 내가 그 거짓을 바란다는데.’

지쳐 늘어진 여체를 그제야 침대에 누이고 다정하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땀에 젖은 얼굴을 보자, 또다시 아래가 묵직해졌다.

덜떨어진 새끼. 데베르는 그런 자신을 향해 조소했다.

‘대답하기 싫으면 다른 걸 해도 좋아.’

부드럽게 속삭이자, 여자의 손이 주춤거리며 그의 셔츠 깃을 붙잡았다. 제 딴에 당겨보려는 노력이겠지만, 그가 장단 맞춰주지 않으니 제가 올라가는 꼴이었다.

바들거리며 상체를 조금 일으킨 여자의 입술이 데베르의 턱 끝에 닿았다. 그러곤 다시 힘이 빠졌는지 털썩 시트 위로 뒤통수를 처박았다.

“계속 그렇게 잠들어 있어.”

침대에 걸터앉은 데베르는 잠든 베스의 얼굴이며 귓바퀴,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물기로 가닥 진 속눈썹을 발견하곤 제 손가락을 갖다 댔다. 아직 목욕한 게 마르지 않았을 수도 있고, 그가 떠난 뒤 홀로 훌쩍였을 수도 있다. 아마, 베스 제인스라면 후자가 더 가까울 것이다.

“죄책감 느낄 필요 없이.”

나는 그렇거든.

데베르는 눈물 자국이 남은 볼에 짧게 입 맞췄다.

* * *

베스는 병원 창밖에 표정 없이 서 있는 남자들을 일별했다. 벌써 익숙하다면 익숙해진 풍경이었다.

보호라는 명목하에 데베르의 수행인들은 베스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녔다. 애초에 나다니는 곳은 병원뿐이었지만, 그들은 늘 긴장한 태세로 클리프 부인의 주위를 맴돌았다.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워드는 베스를 찾지 않았고, 콜린스는 여전히 구금되어 있었다. 의료진들도 이젠 일과처럼 면회 조를 짜 병원장을 만나러 갔다. 데베르는 깊은 밤에만 저택으로 돌아와 베스의 곁에 잠시 머물렀다. 목적이 뚜렷한 귀가였다. 정신을 차렸을 땐, 그가 곁에 없는 게 당연했다.

꼭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그러나 곧 무슨 일인가 생길 것만 같은 불편한 평화의 나날이었다.

“아가씨!”

루카가 병원에 도착한 건, 그런 웨인에 이상한 소문이 돌 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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