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헉, 공주님…!”
“따뜻한 차로 몸을 녹이고 계시는 동안 얼른 목욕물을 받겠습니다.”
쫄딱 젖은 채 별궁으로 들어서는 라프넬을 본 하녀들의 걸음이 분주해졌다. 다들 공주에게 한 소리 들을세라 바짝 기합이 들어간 게 뻔히 보였다.
라프넬은 창 너머로 휘몰아치는 비바람을 잠시 노려봤다. 변덕스런 날씨는 이젠 천둥 번개까지 내리치고 있었다. 호이든의 운구 행렬이 엉망이 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아무도 들어오지 마.”
라프넬은 짧은 명을 남기고 침실로 들어섰다.
은밀히 모든 것을 감춰줄 문이 채 닫기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여체를 홱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남자의 품에 갇힌 라프넬은 공연히 몸을 뒤틀었다.
“뭐 하는 짓이야…!”
“춥잖아.”
척척한 몸 위로 후끈한 열기가 전해졌다. 무식하리만치 근육으로 불거진 남자의 몸에서 나온 타고난 열기였다.
칼론은 꼭 제 머리색 같은 체온을 갖고 있었다.
뜨겁고, 또 뜨겁고, 뜨겁기만 한.
“함부로 황족의 거처에 숨어드는 쥐새끼는 사형이야.”
한참을 버둥대던 라프넬은 모른 척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기댔다.
싫지 않았다. 이 열기가.
“많이 울던데.”
칼론은 향내가 풍기는 금발을 꼬며 장난스레 말했다.
주변국의 사절단이 모두 도착했으니, 브리틴의 군대장인 칼론이 장례식장에 있는 건 당연했다.
“우는 체한 거야. 그렇지 않으면, 같은 배에서 나오지 않아 무정하다고 입방아에 오를 테니까.”
“넌 생각이 너무 많아.”
가볍게 대꾸한 칼론은 젖은 원피스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조금씩 벌어지는 옷자락에 감춘 둔덕이 보일 즈음, 라프넬은 칼론의 손목을 쥐었다.
“…내키지 않아.”
어딘가 지친 기색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럼 뭐하지?”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칼론은 정말 모르겠다는 듯 천연스럽게 물었다.
라프넬과 비밀리에 편지를 주고받고, 웨인의 후미진 여관을 밀회 장소로 정한 이후엔 만날 때마다 몸을 섞었다. 단 한 번도 서로를 거부한 적이 없었다.
이건, 서로 바라는 게 명확한 계약이었다.
“여전히 예쁘네, 라프넬.”
라프넬은 오늘따라 멀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황제의 장례식 때문에 화장기도 거의 없는 마당에 비까지 맞은 탓이었다.
칼론은 그 투명한 얼굴이 퍽 마음에 들었다. 화려하고 기세등등하던 넥서스의 공주가 점점 제게 수그릴수록 저 아래에서 치밀어오르는 쾌감은 더 짙어지기만 했다.
“위로해줄까?”
그는 영악한 사내였다. 이럴 때 어떻게 굴어야 하는지를 너무나도 잘 아는.
“뭐?”
두툼한 입술이 가로로 길게 찢어지며 ‘위로’를 소리 없이 벙긋거렸다.
“정신 나간 소리 하지 마.”
라프넬은 새침하게 대꾸하며 몸을 물렸지만, 칼론은 이미 작정한 듯 그녀를 잡아당겨 제 무릎 위에 앉혔다. 커다란 손이 차갑게 식은 여체를 정성스레 매만졌다. 정말 제 온기라도 주려는 듯 정염이라곤 실리지 않은 담백한 손길이었다.
“이런 건….”
이런 건 우리 사이에 옳지 않아.
라프넬은 그리 말하고 싶었지만,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무서웠어? 시체를 처음 봐서?”
누구도 제게 궁금해하지도, 묻지도 않은 말이 저 멍청한 군인 놈에게서 나오다니.
라프넬은 순진하게 반짝이는 적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럼 왜 울었어.”
칼론의 쭉 뻗은 콧대가 공주의 흰 목 언저리를 비비적거렸다. 라프넬은 흠칫 어깨를 떨었지만 밀어내진 않았다.
여전히 칼론의 손은 라프넬의 등줄기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정말 위로라도 하는 것처럼.
“됐어. 하던 거나 마저 해.”
고운 아미가 대번에 구겨졌다.
“이제 할 마음이 생긴 거야?”
재밌다. 재밌어. 성마르게 군복 셔츠를 벗겨내는 손길에 칼론은 웃음을 터뜨렸다.
능구렁이처럼 속으로 온갖 수를 떠올릴 때는 언제고, 가끔 이렇게 앙큼한 구석을 내보이는 공주였다. 재미 좀 보자고 고른 상대치곤 과분하게 흡족했다.
그래, 자신은 확실히 이쪽이 취향이었다. 얌전이나 떠는 공작의 여자보단.
“우린 닮았어.”
반쯤 드러난 라프넬의 둔덕에 입술을 묻으며 칼론이 속삭였다. 그의 무릎 위에 앉아있던 라프넬의 몸이 소파로 처박히며, 뒤섞인 두 사람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지겹도록 반복한 관계의 시작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들려온 소란이 점점 가까워지더니 굳게 잠겨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라프넬!”
순간, 끔찍한 정적이 찾아왔다.
아더는 굳은 듯이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다, 제 뒤에 열린 문을 조용히 닫았다. 미동조차 없는 푸른 눈동자는 아연한 현실을 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흐트러진 차림의 라프넬을 본 그의 표정에 경멸이 스쳤다. 라프넬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친 것도 거의 동시였다.
“아더….”
그 자리에서 당황하지 않은 사람은 칼론뿐이었다. 그는 의연하게 일어나 셔츠 단추를 잠그기 시작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더 한 꼴도 보일 수 있었는데.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뭉근한 열기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넥서스의 사령관님을 뵙습니다. 아, 이제 폐하라고 하는 게 맞을까요? 호칭에 민감하신 분인지라.”
“입 닥쳐.”
아더의 으름장에도 상대는 담담하기만 했다.
“지금 그 차림을 하고. 감히 라프넬의….”
저의가 뭘까. 진실한 밀회였다면 자신을 상징하는 저 군복부터 벗고 왔어야 할 텐데.
의문스러웠다. 마치 이 삼자대면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보이는 칼론의 작태며, 심지어 이전보다 더 믿는 구석이 생긴 듯한 꼴 또한.
대체 무슨 꿍꿍이길래.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진 않으시네요. 여태껏 전장에서 살아남으신 것 치곤.”
“입 닥치라고-”
“가장 아름다운 분께 가장 높은 곳을.”
금빛 눈썹이 꿈틀거렸다.
드디어 찾아온 푸른 심연의 동요를 보곤, 칼론은 눈에 띄게 기뻐했다. 답 없이 흘레질을 하는 여동생을 봤을 때보다 선명한 동요였다.
“네가….”
“정확히는 저뿐만 아니라, 저를 포함한 일종의 세력이죠.”
“아마, 당신의 힘이 되어주고자 하는?” 칼론은 마지막 말을 뱉으며 구겨진 군복 깃을 정돈했다.
“오늘은 날이 좀 그러니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공주님도 그때 다시 뵙죠.”
복도로 나서던 그는 퍼뜩 무언가 생각났는지 뒤를 돌아봤다.
“편지의 답장은 다음에 만날 때 구두로 들려드릴게요, 공주님.”
달칵. 다시금 문이 닫히고 나자 아더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라프넬을 보면 치밀어오를 감정을 애써 눌러 내리기 위함이었다.
삭여낼 수 없는 분노가 읊조리는 목소리에 담겼다.
“편지가 뭐야. 연서라도 주고받는 거니?”
“아니야.”
라프넬은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이며 가운을 주워 입었다.
“그럼. 황제와의 결혼이 싫어 몰래 청혼서라도 받은 거야?”
“아니라고!”
“차라리 그런 거였어야지!”
갑작스런 고성에 라프넬은 제 가운 자락을 움켜쥐었다.
“끽해야 남자에 정신이 팔려 연애편지나 주고받는 거였어야지!”
단 한 번도, 이만큼이나 아더가 그녀에게 화를 낸 적은 없었다.
덜덜 떠는 라프넬의 시선이 허공에 쳐들린 아더의 손으로 향했다.
“…왜, 너도 날 때리려고…?”
순간적으로 감정을 이기지 못한 아더의 관자놀이엔 부푼 핏줄이 터질 듯이 튀어나와 있었다.
“네가 대체 무슨 헛짓거리를 한 줄 알기나 해?!”
툭. 팔이 맥없이 떨어졌다. 꾸역꾸역 참아내는 아더의 목소리 끝이 꼴사납게 갈라졌다. 참아내는 것은 분노이기도 했고, 두려움이기도 했다. 그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엉겨 붙어 자꾸만 그를 괴롭혔으니까.
“아둔한 욕망에 눈이 멀어, 멍청하게 덫에 걸린 거야.”
세력을 얻는 것과, 세력에게 잡히는 것은 다르다.
지금 저로서 가장 만만한 브리틴 세력을 온전히 등에 업지 못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황자를 새로운 꼭두각시로 만들어 보려 눈이 벌건 치들이 넘쳐나서.
더군다나 그따위 비밀 편지를 보낼 엄두를 내는 것들이라면, 손을 잡을 시엔 그만큼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다.
“…스스로 인질이 되겠다 자초한 거라고.”
이제야 명확해졌다. 왜 오늘 같은 날. 굳이. 칼론이 군복을 입고 별궁을 기어들어 왔는지.
불쌍한 네놈의 인질이 살살 발려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언제부터야.”
이지를 찾은 눈동자가 차갑게 물었다.
라프넬은 태연한 척, 시선을 더욱 고고히 내리떴다.
“호이든이 섬망에 찌들어 국혼을 입 밖에 꺼냈을 때부터.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대체 네 머릿속에… 나에 대한 믿음이 있기는 하니, 라프넬?”
이제 칼론의 세력과 결탁하지 않을 시엔, 정숙해야 할 공주에 관한 추문 혹은 그보다 더한 것들이 닥쳐올 것이다.
아더도 알고 있었다. 섭정이 새로운 황제가 될 때, 이복 여동생 한 명을 제물 삼는 건 희생 축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걸.
다만, 제겐 라프넬의 무게가 좀 남다를 뿐이었다.
그녀는 죄책감의 무게를 타고났다.
“…없어.”
“내가 너 하나를, 고작 너 하나를… 구해보고자 어떤 짓들을 감내했는지 알면…!”
아더를 노려보는 라프넬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하지만 그걸 보고도 더 이상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잠을 못 자. 네 발밑에 무수히 고인 무고한 피들이 내게 아우성을 쳐대서.”
지긋지긋했다. 미칠 정도로.
“아무 가치도 없는 라프넬 메이너, 고작 너 따위를 살려보겠다고 내가 죽인 이들이야.”
* * *
하워드는 언 몸을 녹이기 위해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넥서스의 가을은 혹독한 겨울을 위한 초읽기에 지나지 않았기에, 폭우까지 내리고 있는 저녁은 안온하기보단 스산한 기운을 풍겼다. 찬 기운에 마른 다리가 더욱 쑤셔댔다.
이제 곧 베스가 올 것이다.
건방진 계집애. 되지도 않을 뒷공작을 부리는 것조차 제 어미를 닮았지.
똑똑. 주저함이 묻어나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저, 백작님….”
“들여보내.”
또 무슨 꼴로 왔길래 저리 뭉그적거려.
하워드는 핑계 따위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잔뜩 거만을 떨던 얼굴은 삽시간에 굳을 수밖에 없었다.
“데베….”
카시우스의 환생 같은 잿빛 눈동자.
그곳엔 불청객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남자가 서 있었으니까.
“내 아내는 당신과 계약한 게 있다고 말하던데.”
그 눈동자에 이채까지 번뜩이면서.
“듣다 보니 나도 끼고 싶어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