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도망친 밤-142화 (142/206)

142화

모종의 대치 중인 두 가문의 수행인들을 향해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던져졌다.

탁. 탁.

질척한 바닥을 규칙적으로 내리찍는 지팡이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 것도 그때였다.

“베스.”

지팡이에 한껏 몸을 기댄 하워드가 제 양녀를 불렀다.

베스는 가만히 그를 노려봤다. 검은 레이스 뒤에 숨은 그녀의 눈엔, 반질한 하워드의 얼굴도 거미줄 같은 빗금이 쳐진 채 보일 뿐이었다.

말아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놓고 간 게 있더구나. 이른 시일 내 찾아가는 게 좋지 않겠니.”

“언제가 좋을지 말씀해 주세요, 아버지.”

하워드의 얼굴에 설핏 놀란 기색이 스쳤다. 예상외로 피하지 않는 베스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콧잔등을 찌푸렸다.

저 계집애는 노상 겁을 집어먹고도 안 그런 척 시침을 떼 그를 미치게 했으니까. 하긴. 그 정도 깜냥이 없었다면 감히 밀서를 훔쳐 갈 엄두도 내지 못했으리라.

하워드는 비소를 머금으며 습관처럼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두들겼다.

“저녁에 저택으로 오렴. 겸사겸사 어머니도 보고. 너무 늦은 밤이 되면 공작이 널 찾을지도 모르잖니.”

“그럴게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카맣게 치장한 베스의 모습은 꽤나 고혹적이었다. 눈에 띌 만한 색채라곤 도화지처럼 말간 바탕이 돼주는 흰 피부와 약간의 붉은 기를 띠는 입술뿐이었지만, 그 음전한 외양은 그새 완벽한 클리프 부인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쏘아보던 하워드의 눈가에 짙은 시름이 끼었다. 그러다 주위를 둘러선 클리프 놈들의 기세를 눈치채곤 먼저 등을 돌렸다.

베스는 하워드가 추모를 위한 성안으로 완전히 들어가고 나서야 걸음을 뗐다.

“공작님께선 이미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뿐히 이어지는 공작부인의 걸음을 따라 건장한 수행인들이 동그랗게 진을 쳤다.

새삼 하룻밤 사이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달라졌는지가 어렴풋이 체감됐다. 그만큼 이젠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간밤의 폭우로 낮인데도 바깥이 어둑한 탓에, 실내엔 화려한 샹들리에 대신 벽 램프가 줄지어 켜져 있었다.

“단상 앞, 두 번째 줄에 앉아 계십니다.”

굳이 수행인의 언질이 없어도 곧바로 남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쉬운 일이었다. 제 눈은 언제고 저 쓸쓸한 잿빛 머리통을 쫓아다녔으니까. 어릴 적에도, 그리고 지금도.

전쟁 같은 지난 밤을 보내고 눈을 떴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기척 없이 제 곁을 떠났던 남자처럼, 베스 또한 소리 없이 그의 곁에 다가가 앉았다. 둘은 서로를 쳐다보지 않았다.

거대한 홀 천장을 타고 내려오는 오르간 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음 속에서 고요를 지키는 건 이제 갓 부부가 된 데베르와 베스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촛대를 든 노인 하나가 단상 위로 올라왔다.

“거기, 황금빛 문을 두드리는 망자는 누구인가.”

좌중이 순식간에 숙연해졌다. 식의 시작을 알리는 엄숙한 목소리였다.

그와 함께 장송곡이라기엔 지나치게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오더니, 친위대의 어깨에 들린 관이 홀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호이든 메이너. 넥서스 대제국의 황제이자, 황제 친위대의 친위 대장이며…”

고저 없이 읊조리는 조사가 끝없이 이어질수록,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잦아졌다. 그러나 모두 거짓이었다. 슬픈 체하는 사람은 많아도, 정말 슬픈 사람은 없는 죽음이 바로 황족의 서거였으니까.

클리프 부부의 앞자리엔 황가의 남매가 나란히 앉아있었다.

공주가 눈물을 훔치기 위해 고개를 숙일 때마다, 머리에 꽂힌 검은 사파이어가 일렁이는 램프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한참을 그녀를 지켜보던 베스의 눈길은 자연스레 곁에 앉은 아더에게로 옮겨갔다.

베스는 저도 모르게 아더와 밀회 아닌 밀회를 한 그날 밤을 떠올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꼬인 날이었다. 수십, 수백 번을 홀로 되새긴 날이기도 했다.

만약 황궁에 자신이 가지 않았다면 일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차라리 황제가 이미 서거한 후였다면. 아니면 제가 빈 주사기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의미 없는 되물음은 결국 단 하나의 질문에서 멈추어졌다.

어쩌면 나라는 존재 자체가, 내 어머니에게 그러했듯 애초에 없어야 했던 건 아닐까.

그 순간. 미온한 열기가 베스의 손등으로 끼쳐 들었다.

퍼뜩 고개를 떨군 베스는 제 위로 겹친 데베르의 손을 발견했다. 그때까지도 그녀는 하워드를 만났을 때 잔뜩 힘주어 쥔 손을 풀지 않고 있었다. 본능적인 긴장 탓이었다.

간지러운 레이스 장갑 위로 느껴지는 온기가 묘했다. 남자의 손은 작은 여자 손 하나쯤은 온전히 덮기엔 충분했기에 더 그랬다. 빳빳한 셔츠 소맷단 아래로 흉흉하게 솟아난 정맥은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드는 자신을 책망하는 것만 같았다.

마디가 선명한 그의 손가락이 지독스럽게 사이를 파고들려 하자, 베스는 당황해 더욱 손을 옹송그렸다. 피어오르던 상념은 어딘가로 날아간 지 오래였다. 급히 남자를 올려다봤지만, 그는 마치 제 손과 자신은 주인이 다르기라도 한 것처럼 무감하게 단상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읏….”

우악스런 힘을 벗어나려 미미하게 비틀던 손짓은 결국 남자를 더 받아들이는 결과만 낳았다.

채 펴지도 못한 작은 주먹 사이로 덮쳐 온 굵은 손가락이 제 존재를 여실히 드러냈다.

그의 엄지가 여자의 새끼손가락을 느릿하게 쓸었다. 건드리면 부러질 것처럼 연약한 뼈대였다. 이런 몸으로 지난밤 잘도 그를 받아낸 게 용할 정도로.

“하.”

짧은 한숨을 뱉은 데베르는 고개를 비틀었다. 무언가 탐탁지 않단 신호였다.

해봤자 장갑 위를 매만지는 것뿐이었지만, 그 감각이 지나치게 선연해 베스는 애써 모른 척하려 노력했다. 무언가 뒤틀린 사람처럼 구는 그를 잠재울 방법은 그저 받아들이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점점 깨닫는 중이었다.

잠시간 지루한 조서에 귀를 기울이던 베스는 다시 한번 조심스레 제 손을 틀었다. 그도 그때는 잠깐의 자유를 허락해줬다. 물론 둘 사이의 온기가 사라지기 무섭게 다시 덮쳐들긴 했지만.

엄지는 엄지에. 검지는 검지에. 마지막 새끼까지.

고스란히 맞닿은 손끝이 이제야 짝을 알맞게 찾아갔다.

“…선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의 총아로써…”

여자의 이른 안심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남자는 느긋하게 다리를 꼬아 앉았다. 매끄러운 그의 구두코가 드러난 종아리 근처를 닿을 듯 말듯 간질이자, 또다시 베스의 몸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이 모든 것이 별거 아닌 행동인 줄은 안다. 심지어 부부이기까지 한데. 남들 눈엔 비감에 빠진 아내를 위로하는 남편쯤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데베르는 아무것도 아닌 행동을, 아무 일인 것처럼 하는 재주가 있는 남자였다.

은근한 행동에 숨은 노골적인 뜻을 모르기엔 이젠 베스도 그와 보낸 밤이 많아진 터였다.

“…모두 일어서 주십시오.”

때마침 기립을 청하는 목소리를 핑계 삼아 베스는 얼른 손을 털어냈다.

절정을 향하는 오르간 소리가 첨탑 꼭대기를 찌를 듯 높아졌다.

“잡혀 온 포로 행세하지 말고, 네 역할에 충실해.”

청아한 선율을 틈탄 경고도 함께였다. 냉담한 목소리가 만들어낸 낮은 울림이 베스의 마음에 파동을 일으켰다.

그제야 지독히도 빗나가던 둘의 시선이 온전히 맞닿았다. 애초에 먼저 닿았어야 할 건 손끝이 아니라 시선의 끝이었는지도 모른다.

“….”

얽힌 시선의 깍지를 먼저 푼 건 데베르였다. 베스는 한 발 느리게 그에게서 눈을 뗐다.

하나둘씩 운구 행렬을 뒤따르기 시작했다.

베스는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한 인파를 돌아봤다. 그 수많은 사람 중, 이 남자의 곁에 앉은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내 역할. 내 역할이라니.

베스는 그 말을 곱씹었다.

“…지금, 클리프 부인답나요?”

선대 클리프 부인에 관한 얘기는 알음알음 사람들을 통해 들었다.

그녀가 얼마나 기품 있었는지, 외모는 얼마만큼 아름다웠는지. 예술적 소양이 어느 수준으로 고매했는지. 세월이 지나도 빛이 바래지 않는 찬사가 아직도 넥서스엔 남아 있었다.

“꽤.”

데베르는 거짓말을 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거짓말쯤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모두 번번이 속아 넘어가는 이 여자 탓이다. 데베르는 그리 자위했다.

“꽤 클리프다워.”

베스 제인스가 클리프답냐니.

그만큼 우스운 소리가 있을까.

클리프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죽음을 대가로 치러왔는지를 알면, 그리고 얼마나 그 죽음들에 죄책감 가지지 않았는지를 안다면. 감히 저 올망졸망한 눈으로 클리프답냐는 소리 따윈 못할 것이다.

“믿어도 돼.”

그는 이젠 습관처럼 베스를 기만했다.

부지런히 빠져나가는 인파의 행렬은 어느새 둘의 차례까지 와 있었다.

베스는 용기를 내 남자의 손끝을 붙잡았다. 다행히 그는 내치지 않았다. 이에 조금 더 용기를 낸 베스는 흉터 가득한 그의 손바닥에 입 맞추듯 제 손을 부딪쳤다. 비가 와서인지 서서히 얽히는 손끝의 열기가 유독 뜨겁게 느껴졌다.

부부라기엔 서먹하고, 남이라기엔 애틋한 두 사람 사이에서 미묘한 분위기가 풍겼다.

잠시라도 완벽한 부부가 되어볼까. 찰나라도 클리프다워 보이게.

베스는 잡은 손에 부러 힘을 줬다. 그래봤자 이 남자에겐 그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하겠지만.

“아프면 말해요.”

저다운 경고를 한 베스가 먼저 걸음을 옮기자, 데베르는 불현듯 맞잡은 손을 거세게 옭아맸다. 그 탓에 휘청이는 여자의 몸이 그에게로 기울어지자, 익숙한 체취에 섞인 불순한 향이 건너왔다.

아. 데베르의 입술이 탄식하듯 작게 벌어졌다.

“…기만은 네가 하고 있구나.”

내가 아니라.

베스 제인스에게서 그와 똑같은 향이 풍긴다.

더없이 기꺼우면서도, 한없이 끔찍한 일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