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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41화 (141/206)

141화

열리는 문틈 새로 형형한 하워드의 눈을 보고도 칼론은 주눅 드는 기색이 없었다.

고리타분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그게 칼론이 한 생각의 전부였다.

“…말조심하라 했을 텐데.”

“듣는 귀도 없는데요, 뭘.”

서재 문을 열어 준 수행인이 눈치껏 밖으로 향하자, 그걸 본 칼론은 하워드를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물기로 착 달라붙은 셔츠 아래의 성난 근육들은 주인의 몸짓을 따라 꿈틀거리고 있었다.

“결혼식까지 한 마당에.”

칼론은 장난스레 벽면에 즐비하게 꽂힌 책들을 툭툭 쳤다.

그 모습을 탐탁잖게 지켜보던 하워드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였지만, 칼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지못해 한발 물러선 하워드가 낮게 일렀다.

“공주는.”

“더할 나위 없이 순조롭습니다. 재미도 꽤 보고 있고요.”

‘재미’를 뱉으며 칼론은 제 고간을 슥 훑었다.

하워드의 인상이 대번에 사나워졌다.

“천박하게 굴긴.”

“아버지도 천박하게 구셔서 절 낳으셨잖아요.”

이죽거리는 칼론의 적안이 날카롭게 빛났다.

짙어지는 병색에 목숨이 저당 잡힌 중년과 잔뜩 혈기 오른 청년은 도저히 부자지간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에겐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공주가 보통 성질이 아닌데 어떻게 구워삶은 거지?”

하워드의 눈빛에 의심이 비쳤다.

라프넬이 칼론에게 보낸 답신은 이미 모두 본 터였지만, 타고난 불신은 제 아들이라 해도 거둘 수 없는 탓이었다.

“오히려 쉽죠. 라프넬 같은 애들은.”

피식대는 웃음은 은근히 빈정거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보였습니다. 받지 못한 애정에 목말라하는 몸짓이. 가려운 부분을 살살 긁어주면서 제 편인 척, 그 욕망을 건드려주니 보세요.”

과장되게 벌린 두 팔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이리 안기는걸요.”

그는 이 모든 걸 하나의 놀이처럼 생각하는 듯 보였다.

“이건 장난이 아니다…!”

“저는 장난이 아니면 하지 않습니다.”

금세 서늘해진 적안이 저를 버린 비정한 아비를 응시했다.

단단히 굳은살 박인 손바닥을 잘근거리는 이빨은 짐승처럼 예리했다.

“재미도 없는 장난 뭣 하러 하겠습니까. 어쭙잖게 브리틴 왕가의 피가 흐르는 이상, 저도 당신 꼴이 날 텐데.”

칼론의 눈동자가 하워드의 다리를 향해 내려갔다. 비쩍 마른 다리는 의자 위에 부자연스럽게 걸쳐져 있었다.

“제길.” 욕지거리를 뱉으며 제 머리의 남은 물기를 터는 얼굴에서 순간 하워드의 젊은 시절이 스쳤다.

“걱정 마세요. 아버지가 절 버린 걸 원망하진 않으니까요. 오히려 그 거지 같은 고아원에서 아득바득 제 존재를 증명해 다시 태어난 걸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재밌었어요. 약간, 작은 전쟁놀이를 한 것 같달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칼론은 집무 테이블 위의 서류를 건성으로 들어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이내 머리가 아픈 듯, 인상을 찌푸렸다.

“제가 코바흐전에 참전한 덕에 아버지도 재미 보셨잖습니까. 그 계집애랑 데베르.”

칼론은 말끝마다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거야말로 칼론을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였다.

재미. 어딘가 비틀린 구석을 자극할 수 있는 재미만이 그의 삶의 유일한 이유였으니까.

높이 올라가 보려는 것도, 철옹성 같은 라프넬을 꼬드기는 것도, 말 같지도 않은 제국과의 전쟁에 몸을 던지려는 것도 모두 찰나의 쾌락을 위한 것이었다.

심지어 연합군의 말단 병사로 위장해 잠시 코바흐전에 참전한 것 또한 끓어오르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쩌다 알게 된 말 못한다는 계집애가 궁금해서.

가치 없는 것은 곁에 두지도 않는 하워드가 단지 제 어미와 얼굴 하나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살려둔 여자를 보고 싶었다.

막상 봤을 때의 첫인상은….

“오히려 어려운 쪽은 베스 그 계집애 같은 것들이죠. 당최 뭘 욕망하는지를 알 수가 없는…. 왜 거기서 둘이 붙어먹게 됐는지 이해가 가세요?”

이번엔 하워드도 쉽사리 답할 수 없었다. 운이 좋았다는 말 외에 무얼 더 할 수 있을까.

베스만 한 애들은, 오히려 베스보다 더 치밀하고 나은 애들은 쉼 없이 데베르의 곁을 지나쳤다. 물론 지나쳤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가차 없이 죽었으니.

그래도 혹시 모를 한 줌의 가능성을 위해 올리비아도, 베스도 살려두고 있던 터였다. 어쩌면 데베르가 카시우스의 심미안을 닮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판단이 맞았다는 것을 알아챈 날엔 오랜만에 웃음을 터트렸다.

모두 어미의 불행을 닮은 베스 덕분이었다.

“…아직 믿을 순 없다. 클리프 놈들은 갖고 노는 데엔 도가 튼 것들이라.”

올리비아의 목줄을 넘긴 건 카시우스였다.

꽤 오래 내통한다 생각했던 둘 사이가 어쩌다 비틀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카시우스는 그럴 작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넥서스의 새로운 주인이 될 생각이다.’

하워드를 찾아온 카시우스의 첫마디였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첩자 세력마저 권력의 발판으로 삼으려 할 만큼 당시 클리프 세력은 막강했다. 꼼짝없이 공작의 뒷배가 되어 숨을 죽이는 와중에, 갑자기 전사한 카시우스의 소식은 하워드에겐 구사일생이 아닐 수 없었다.

다소 진중한 하워드의 얼굴을 보며 칼론은 빙글거렸다.

“아버지의 약점이 뭔지 아세요?”

“약점…?”

“지나친 대의. 그게 바로 아버지의 약점입니다. 브리틴에 대한 명예, 충성, 정통성 뭐 그딴 것들이요.”

“감히 네놈이-”

“호이든. 단순 병사가 아니죠?”

소파에 기댄 칼론은 다 안다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감히. 베스티아 황후의 아들이라기엔 지나치게 덜떨어졌잖아요.”

원치 않게 태어난 아들을 노려보는 하워드의 입가가 씰룩였다. 바르르 떠는 입꼬리엔 숨길 수 없는 경멸과 분노가 담겨 있었다.

“호이든은 선 황후의 치욕이다. 그 멍청한 머리, 아둔한 판단, 빌어먹게 굼뜬 몸뚱이까지…! 베스티아의 피를 받고 그따위로 태어나선 안 되지.”

“그래서. 아더가 그 차선책인가요.”

“하.”

이번엔 하워드가 칼론과 비슷한 조소를 뱉었다.

절뚝거리며 부인의 침실로 간 하워드는 침대에 늘어져 있는 여자의 가슴팍에서 목걸이를 잡아챘다. 금고를 열고 천장에 붙은 서류 봉투를 꺼내는 손길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안에 든 밀서를 확인하기 시작하자, 별안간 투박한 손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이게….”

칼론의 눈이 빛났다.

“…개새끼가 주인을 착각했군.”

저건 곧 재밌는 일이 생긴단 전조였다.

* * *

빛 한 점 들어오지 못하도록 두껍게 커튼을 친 서재 안. 그곳엔 기다란 인영 하나가 시체처럼 누워있었다.

“후우….”

뻐끔거리는 입술에서 새 나오는 시가 연기가 인영이 아직 살아있음을 말해줬다.

인영의 주인은 아더였다.

그는 쌓인 먼지의 매캐한 냄새와 마개 열린 술병의 알코올 향이 잔뜩 뒤섞인 속에서 시가만 까딱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용케도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빛 한 가닥을 보곤 손장난을 쳤다. 이리 돌리면 밝아졌다, 저리 비틀면 어두워지는 꼴이 꼭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바닥에 떨어진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호이든의 장례식까지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는 깨닫자, 아더는 작게 욕을 짓씹었다.

술에 절어 이 꼴이라니. 한심한 작태였다.

겨우 몸을 일으킨 후, 테이블 위의 서류를 신경질적으로 정리했다. 방을 맴도는 혼란한 향만큼이나 섭정을 위한 서류도 엉망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나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은 점점 느려졌다. 끝이 그을린 편지 한 장이 자꾸만 시선을 잡아끌었기에.

테이블 한편엔 그와 비슷하게 그을음이 남은 편지 몇 장이 더 놓여 있었다.

“….”

결국 아더는 서류 대신 그 편지를 들어 올렸다.

다른 투서보다 노골적으로 황제 호이든을 비판하는 밀고는 비방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황자님이 황좌에 빠르게 앉으셔야 한다는, 반역죄에 해당하는 소리까지 덧붙여져 있었다.

하지만 멍청하다 싶을 정도로 속내를 드러내는 투서엔 이름 모를 발신자의 숨은 뜻이 담겨 있었다.

섭정이 시작되고 지리한 나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 밤, 그는 지쳐있었다. 배다른 동생을 향해 폭언을 퍼붓는 황제의 발작적인 행동에 눈가에 상처까지 난 날이었다.

그래서일까. 평소라면 그대로 태워버렸을 이 지질한 투서에 시선이 닿은 건.

고민의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편지는 태우지 못하고 일렁이는 불빛 위를 노닐었다. 음험한 속마음이 부추긴 짓이었다.

그때, 빼곡히 적힌 투서 위로 푸른 글씨가 올라왔다.

[가장 아름다운 분께 가장 높은 곳을]

브리틴어로 적힌 시구.

무슨 생각인가 스친 아더는 태우려던 투서들을 정신없이 훑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유치하다 싶을 정도로 원색적인 것들만 추려냈다.

탈 듯 말 듯 불길 위를 어슬렁거리자, 어김없이 숨겨진 글자가 드러났다.

비밀 많은 발신인의 진짜 목소리를 듣는 순간이었다.

[나는 당신께 충성을 맹세했네]

[노란 꽃이 피는 날, 내 목숨을 바치기로]

[하늘의 별은 닿지 못할 환영일 뿐]

[내 환영은 당신을 닮아 슬프기만 하네]

[가장 아름다운 분께 가장 높은 곳을]

‘나는 가장 낮은 곳에서 당신을 우러러보리….’

완성된 하나의 시.

마지막 편지 한 장까지 털어낸 아더는 헛웃음을 지었다.

‘꽤… 머리가 좋네.’

익명의 발신자는 황자가 고작 이따위 저열한 투서마저도 단번에 태우지 못하는 때를 기다린 것이었다. 태우지 못한다는 것은 고민한다는 것이고, 고민은 황위 계승을 은밀히 마음에 품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다음 날. 데베르와 콜린스의 얘기를 엿들은 건 기막힌 우연 내지는 필연이 아닐 수 없었다.

커튼을 젖힌 아더는 저 멀리, 개미 떼처럼 가까워져 오는 조문객을 바라봤다.

“호이든. 네 마지막을 보러 사람들이 오고 있어.”

간밤부터 내린 비는 여전히 추적대며 웨인을 적시고 있었다.

꼭 무능한 황제의 서거를 슬퍼하는 것처럼.

그리고 다가올 새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는 것처럼.

* * *

각 가문의 문장이 선명하게 새겨진 자동차며 마차가 줄지어 황궁 안으로 들어섰다. 개중엔 코바흐와 브리틴, 혹은 그보다도 더 먼 나라에서 도착한 외국 사절단도 포함된 채였다.

기묘한 긴장감이 피어나는 가운데, 클리프 가문의 차에서 여인 한 명이 내렸다.

이제 그곳에서 내릴 수 있는 여인은 넥서스에서 단 한 명뿐이었다.

검은 레이스로 얼굴을 반쯤 가린 그녀는 인파를 뚫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클리프 부인, 안녕하세요.”

“역시 부인도 오셨군요.”

“안녕하십니까, 부인. 저는 제르망 남작이라고 합니다.”

망자의 넋은 핑계일 뿐, 제 몫을 챙기는 데만 급급한 치들의 안부 인사를 받으며 베스는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멀지 않은 곳에서 저를 향해 다가오는 한 무리의 사내들을 향해 있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하워드도 제가 밀서를 훔친 걸 눈치챘을 것이다. 아마 저들은 늘 그래왔듯, 자신을 잡으러 오는 것일 테고.

“하워드 백작님께서 찾으십니다. 가시죠.”

하워드의 수하들이 자연스레 베스를 데려가려는 찰나. 또 다른 한 무리의 덩치들이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무례를 범하지 마십시오. 이 분은 이제 클리프 부인이십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곳엔 더 이상 베스 하워드가 아닌, 베스 클리프만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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