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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40화 (140/206)

140화

첫 사냥은 아홉 살 무렵이었다.

카시우스의 손에 끌려 소위 ‘늑대 숲’이라 불리는 번트의 야산으로 끌려가던 날이었다.

건장한 체격을 가진 제 아버지의 허리춤 정도밖에 오지 않던 데베르는 어린아이답지 않게 능숙한 손길로 사냥총을 장전했다. 특별할 건 없었다. 성안에서건, 후원에서건 질리도록 반복해온 동작을 숲에서도 하는 것뿐이었으니까.

데베르에게 아이다운 것이라곤, 잿빛 눈동자에 깃든 두려움이 전부였다.

그리고 카시우스는 그 두려움을 경멸했다. 클리프는 그래선 안 되는 것이었다.

두려움은 언제나 죄악이다.

‘고작 항간에서 떠들어대는 늑대 새끼란 멸칭 하나에 벌벌거리다니.’

카시우스는 벌을 내리듯 늑대 새끼를 찾아내 죽이라고 명령했다. 데베르는 벌게진 눈가를 연신 문지르며 숲 어귀로 기어들어 가야만 했다.

‘촉각을 곤두세워. 네가 짐승의 기척을 느꼈다면, 그 짐승은 벌써 네 숨통을 노리고 있을 거다.’

날 선 목소리는 채찍질이 되어 데베르의 등을 떠밀었다.

솟아오른 나무들이 이리저리 얽힌 숲은 갈수록 어두워졌다.

‘의심하고 또 의심해라. 나뭇가지 소리라고 착각한 게 적군의 발소리가 될 거야.’

눈물이 짓무른 데베르의 눈가에도 차츰 모진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늑대를 잡지 않으면 이 숲에서 나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들려오던 카시우스의 목소리도 점점 멀어졌다. 사라진 것인지, 그저 소리 없이 따르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한참을 숲에서 헤매다 들어온 길 따위는 잊어버렸을 즈음, 데베르는 걸음을 멈췄다.

어두운 바위 밑, 그 작은 틈에 숨은 새끼 한 마리. 데베르는 숨을 죽이고 총구를 들어 올렸다. 저와 닮은 잿빛 눈동자를 빛내며 덜덜 떨어대는 작은 몸체는 늑대라곤 믿기지 않았다.

충분히 명중할 수 있는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데베르는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부질없이 사냥감과 눈을 마주하는 시간만 길어지고 있던 찰나.

곧게 뻗어 있던 총구가 툭, 고개를 떨구었다.

너무 어리다. 아버지도 겨우 이만한 새끼를 찾아내라고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데베르는 그 작은 희망을 품으며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의 희망이 얼마나 헛된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아, 아버….’

카시우스의 총구는 어린 아들을 향해 있었으니까.

‘무슨 짓이지?’

‘왜….’

당신은 왜 나를 겨누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카시우스는 끝맺지 못한 물음의 대답 대신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고, 단말마 같은 총탄 소리와 함께 데베르는 팔을 움켜쥐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헉, 헉.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의 귓가로 다시 한번 찢어지는 듯한 총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얇은 셔츠 위로 피가 번지지 시작했다.

오발이 아니었다.

뚜벅뚜벅 어딘가로 걸어간 카시우스는 퍽, 데베르의 발치로 새끼 늑대의 사체를 던졌다. 작은 머리통이 엉망으로 으깨진 모습이었다.

‘데베르 클리프. 네 실수는 두 가지야.’

땀방울 하나 없이 말끔한 카시우스의 얼굴은 소름 끼칠 정도로 고요했다.

‘첫째. 이 어린놈은 올겨울이 왔을 땐 성체가 돼 있을 거다. 지금은 네가 목숨을 살려줬다고 착각하겠지만, 겨울이 되면 오히려 목숨을 구걸해야겠지. 그리고 둘째.’

늑대의 사체를 헤집던 총구가 또다시 데베르를 향했다.

‘넌 네게 겨누어진 총구를 보고도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어.’

‘아, 아버지셔서….’

‘아버지는 반드시 아들의 편이라고 어떻게 확신하지?’

짧은 침묵이 흘렀다.

퍼뜩 정신을 차린 데베르는 총알이 스쳐 지나간 팔을 부여잡은 채, 황망한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나동그라진 총을 힘겹게 들어 올리자 팔이 끊어질 듯이 아려왔지만, 이를 꽉 깨물곤 제 몸만 한 총을 눈앞의 인영을 향해 서서히 겨누었다.

뒤늦게 실수를 정정했다.

그곳엔 아버지가 아니라, 넥서스의 늑대라 불리는 공작이 있을 뿐이란 걸.

‘아무도 믿지 마라.’

처음이자 마지막인 카시우스의 충고였다.

아무도 믿지 마라. 아무도.

데베르는 제 밑에 누워 숨을 헐떡이면서도, 저만을 바라보는 새카만 눈동자를 주시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작된 입맞춤이었다. 밀려드는 남자의 힘에 못 이겨 여자의 고개가 비틀리자, 데베르는 조급하게 그 끝을 따라붙었다.

몇 시간을 고심해 골랐을 드레스는 군데군데가 찢어진 채 바닥 어딘가로 내팽개쳐졌다. 여자가 걸치고 있던 장신구들도 거친 입맞춤 탓에 두서없이 시트 위로 떨어져 내렸다.

데베르는 숨이 부족한 사람처럼 베스의 입 안을 탐미했다.

숨겨진 것 하나 없이 발라먹겠다는 심정으로 여자의 몸 위로 제 낙인을 찍어나갔다.

때마침 몰아치기 시작한 빗소리는 때려 붓는 총탄 세례처럼 거세게 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새나오는 신음과 질척이는 타액 소리를 숨겨주기엔 그 정도면 충분했다.

베스는 자신의 아래를 치받아오는 힘이 버거워 데베르의 어깨를 껴안았다. 너른 어깨를 다 감싸지 못한 팔이 미끄러지자, 남자는 아는 것인지 상체를 더 숙여줬다. 빗장뼈 아래의 정점이 단단한 그의 가슴팍에 쓸릴 때마다 베스는 제 입술을 아프도록 깨물어야만 했다.

억지로 틀어막은 숨이 좁은 목구멍을 때리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굵은 남자의 손가락이 발간 입술을 짓뭉갰다.

“소리 내.”

고압적인 명령을 하며 귓바퀴를 깨무는 그는 잔인한 포식자였다.

반면, 그에게 목덜미를 내준 피식자는 가련할 만큼 작기만 했다.

“손끝마저 희생했는데, 아깝지 않아?”

눈물이 맺혀 어룽거리던 여자의 눈이 순간 그를 쏘아봤다. 그래봤자 독기 하나 없이 제 서운함을 조금 내비치는 게 전부였지만.

데베르는 그 눈을 보지 않으려 울혈이 가득한 둔덕 위로 얼굴을 묻었다. 살짝 열린 창틈으로 들어온 물비린내와 진득한 여자의 향취가 어지럽게 섞여 그를 괴롭혔다. 그런 와중에도 숙인 머리통을 쓰다듬는 여자의 손길에 욕지거리가 혀끝을 맴돌았다.

“넌….”

감히 내게 이래선 안 돼.

건방진 손을 낚아채 가둔 후, 사나운 허리 짓을 재개했다.

한 품에 들어오고도 남을 허리를 부러트릴 듯이 붙잡고 몰아붙이자, 간헐적으로 숨을 토해내던 여자의 미간이 좁아 드는 게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데베르는 그 지점에 제 입술을 붙였다. 여자를 달래야겠다는 생각 따윈 없었다. 그저 본능이었다.

쏟아지는 입맞춤을 받으며 베스는 이게 고통 같은 쾌락인지, 쾌락 같은 고통인지 알 수 없었다. 결국 그 둘 모두를 주는 건 제 위를 점령한 남자라는 것만이 분명할 뿐이었다.

그래서 자꾸만 그를 안으려 했다. 그러면 괜찮을 것만 같아서. 모든 것이. 어떤 것이든.

“…대체 어리석은 게 누군지.”

데베르는 자신을 잡아먹는 짐승에게 자꾸만 손을 뻗는 여자를 응시했다.

베스는 열이 오를 대로 올라 부르튼 입술은 몇 번 달싹이다가 이내 다물었다. 대신 작은 손가락이 꼼지락거리며 그의 등 위를 유영했다.

그 움직임의 의미를 깨달은 데베르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안아줘요]

여자는 그리 말하고 있었다.

순진하게도 깜빡이는 눈동자가 그를 재촉했지만, 데베르는 이번엔 몸을 숙이지 않았다. 대신 흉터 가득한 손으로 여자의 눈가를 덮었다.

작은 얼굴을 반쯤 가리자 보이는 건 붉게 익은 입술밖에 없었다.

모든 게 다 저 빌어먹을 새카만 눈동자에 속은 탓이다.

데베르는 베스와의 결합이 사라지면 죽는 사람처럼 더 깊이 그 안을 파고들었다.

“베스….”

더 참지 못한 그의 잇새에서도 신음성이 기어 나왔다.

베스는 차단된 감각 속에서 더욱 생생히 남자의 존재를 절감하며 손을 더듬었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몸 때문에 몇 번이나 갈 곳을 놓쳤지만, 질기게도 포기하지 않았다.

잔뜩 성이 나 있는 남자의 팔을 지나, 각이 진 어깨를 헤매던 손이 마침내 단단한 턱 끝에 닿았다. 남자의 움직임이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그러자 조금 더 수월하게 올라간 손끝이 굳게 닫힌 입술을 매만졌다.

보이지 않아도 손으로 그려졌다.

뻗은 콧대, 튀어나온 눈썹뼈, 머리색과 같은 짙은 잿빛 속눈썹, 이젠 비가 아닌 땀에 젖어 있는 이마….

베스는 데베르를 다른 방식으로 제 안에 새기는 중이었다.

차라리 재회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후방 병원 공습에 죽었거나, 아니면 당신이 전방에 있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운이 좋지 않았다. 우리가 다시 만난 것도, 당신이 아무것도 아닌 내게 청혼한 것도.

모두 악연의 시작일 뿐이었다.

인연인 줄 알았던 악연.

“왜, 항상….”

데베르는 여린 목을 잡아 비틀어 묻고 싶었다.

넌 왜 항상 내 변수가 되는 거냐고.

마지막으로 허리를 쳐올린 그는 기어이 저를 굴복시키고야 마는 여자의 품에 무너져내렸다. 눈을 가린 손은 아직 치우지 않은 채였다.

빈틈없이 맞닿은 몸의 열기와 숨이 온전히 서로에게 전해질 때에서야, 데베르는 끓어오르는 상념을 잠재울 수 있었다.

아직은 살아 있다. 아직은.

황제가 서거한 날이자, 베스 제인스가 베스 클리프가 된 오늘 밤. 쏟아지는 가을비 뒤에 감정을 숨긴 두 사람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런 밤은 다시 오지 못하리란 것을.

베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이 순순히 물러나자 정염에 물든 눈동자가 닿을 듯 가까운 곳에서 보였다.

이번엔 베스가 데베르의 위로 몸을 뉘었다. 부드러운 몸만큼이나 간지러운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 위로 쏟아지자. 데베르는 체념하듯 눈을 감았다.

이전과 다른 조심스런 입맞춤이 이어졌다.

질긴 악연이 아닐 수 없었다.

* * *

같은 시각.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퍼붓는 빗줄기를 뚫고 군용차 한 대가 하워드 저택 앞에서 멈추어 섰다.

사위가 구분되지 않을 만큼의 폭우였지만, 차에서 내리는 장대한 기골은 모른 척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시커멓고 커다란 사내는 자연스럽게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우비 하나 걸치지 않은 그의 몸을 타고 물줄기가 쉼 없이 떨어졌지만, 저택의 복도를 걷는 그를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쯧.”

그는 저택 안의 간이 엘리베이터를 보고 혀를 찼다.

“여기도 곧 초상나겠군.”

오만하게 지껄이는 목소리의 주인은 칼론이었다.

그는 이 집의 가주인 것처럼 굴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풍기는 분위기가 그러했다.

젖은 머리칼을 대충 털던 칼론은 비식 입꼬리를 올리며 서재 문을 두드렸다.

“아버지.”

숨겨야 하는 비밀까지 제멋대로 뱉어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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