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라프넬은 불안스레 제 손톱 밑을 뜯어대고 있었다.
아더의 손에 끌려오다시피 별궁으로 도착하자마자 갇힌 참이었다.
‘그 누구의 방문도 허락지 마라’
짧은 명령을 하녀들에게 남긴 황자는 그대로 사라졌다.
바깥은 이미 어두워진 지 오래였지만, 바깥엔 어떤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고리를 거세게 흔들어봐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문을 몇 번 더 두드리던 라프넬은 다시 제 손끝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호이든이 어쩌다 독살로 죽은 거지? 정말로 콜린스가 그런 건가?
평생 숨통을 옥좨온 호이든인데도 막상 그의 죽음을 목도하자, 후련함보다 공포가 더 크게 다가왔다. 시체를 제대로 본 적 없는 탓도 있었다. 정확히는 타인에 의해 죽임을 당한 시체지만.
푸르스름하게 부어오른 얼굴과 곳곳의 붉은 반점이 뇌리에 박혀 떠나질 않았다.
“설마, 아더는 내가 그랬다고….”
아더는 무언가 잘못을 저지른 그녀를 참아낼 때 그런 표정을 짓곤 했다.
“아니야, 아니라고…!”
라프넬의 거친 손길에 협탁 위의 유리잔이 벽에 내리꽂혔다.
날카로운 파열음이 방 안을 울림과 동시에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고리가 달칵, 돌아갔다.
“무슨 짓이야.”
문을 열고 들어온 아더의 얼굴엔 지울 수 없는 피로감이 드리워져 있었다.
박살 난 유리 파편이 카펫 위를 나뒹구는 꼴을 잠시 노려보던 그는 소파에 걸터앉았다.
“얌전히 있으라고 했지.”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부검소견서가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소파에 고개를 기댄 아더는 버석한 제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내렸다. 엉망으로 뭉개지는 얼굴과 달리, 허공을 응시하는 눈동자엔 전에 없는 이채가 맴돌고 있었다.
“난 아니야.”
그 형형한 눈빛을 견디지 못한 라프넬이 먼저 입을 뗐다.
끝이 미미하게 떨리긴 했지만, 늘 오만하게 굴던 공주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넌 아니다…?”
“난 결코-”
“그래야지.”
아더의 고개가 비스듬히 돌아갔다. 죽음의 공포에 잔뜩 얼어있는 제 여동생을 향해서.
“내가 그랬으니까.”
그는 동요하고 있지 않았다.
“…네가?”
오히려 혼란스러워하는 쪽은 라프넬이었다. 아더는 결코 제 형제를 해하지 못할 텐데, 어째서.
그 아연한 얼굴을 보며 아더는 싱겁게 웃었다. 한쪽 입꼬리만 길게 올라간 게 언뜻 조소처럼 보이기도 했다.
“왜? 같잖은 연극은 너만 한다고 생각했어?”
라프넬은 황제의 침실에 도착했을 때, 허옇게 질린 아더의 얼굴을 똑똑히 봤다. 그 떨림, 두려움, 막막함까지.
설마 그 모든 것이….
“내 손으로 몰리 부인에게 부검까지 맡겼어. 주치의를 믿지 못한다는 핑계로.”
내막을 알리는 목소리는 담담하기 짝이 없었다.
아더는 라프넬이 미처 비우지 못한 술병을 기울였다. 유리잔은 그가 도착하자마자 산산조각이 났기에, 자연스레 술병째로 목을 축였다. 흐트러진 모습으로 술을 들이켜는 황자의 모습은 꽤나 방만해 보였다.
“황제와의 결혼은 없던 일이 됐는데, 어때. 기분이.”
취기라곤 없는 눈동자가 올곧게 라프넬은 바라봤다,
라프넬은 그 곧은 시선이 버겁기만 했다.
“뭐든 입안의 혀처럼 굴려야 직성이 풀리는 너를 위해 그런 건데 표정이 왜 그렇지?”
아더의 목소리는 여전히 나직했지만, 점점 감출 수 없는 분노가 실리고 있었다.
상황을 이리 내몬 라프넬에 대한 증오 내지는 안쓰러움, 이복형제를 제 손으로 죽였다는 후회와 두려움, 그리고 마침내 족쇄 하나를 뜯어냈다는 홀가분함.
그 모든 게 어지럽게 섞인 아더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라프넬 널 위한 거야.”
생각보다 자신은 뛰어난 위선자였고 연기자였다.
그 사실이 못 견디게 아더의 심장 한편을 괴롭혔다.
“네가 그토록 말한 유일한 가족을 위해서.”
“그럼 황좌엔 네가-”
“입 닥치고 있어…!”
더없이 차가운 살기가 아더의 주위를 넘실거렸다.
천천히 일어선 아더는 비틀거리며 라프넬에게 다가갔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위협감에 라프넬이 주춤거리며 물러섰지만,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아더는 제 악력 따위 상관치 않고, 손마디가 하얗게 질릴 만큼 억세게 라프넬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읏….”
“내가 지금껏 어떤 촌극을 벌였는지 알면… 더는 그 세 치 혀를 놀려선 안 돼.”
뒤늦은 취기라도 몰려온 듯 아더의 눈가가 시뻘게졌다.
하지만 그는 지극히 맨정신이었다. 시시각각 닥쳐오는 감정들이 아플 만치 생생하게 저를 일깨우고 있는데 취할 리가.
“그런데 네가 알고 싶어 할까?”
“….”
라프넬은 입술을 굳게 잠갔다.
아더가 저를 위해 무슨 짓을 했는지 궁금치 않았다. 심지어 그게 제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자극할 것이라면 더더욱.
“난 빚을 갚았어. 더는 내게 죄책감을 독촉하지 마. 그랬다간.”
아더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속이 끊임없이 뒤틀렸다.
“이번엔 널, 죽여버릴지도 몰라.”
* * *
불 꺼진 데베르의 침실엔 그의 공간과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그림자 하나가 앉아있었다.
침대맡에 쪼그리고 앉은 베스의 발치엔 남자가 제게 던졌던 종이 뭉치들이 단정하게 쌓인 채였다.
베스 릴리아드.
반역죄로 일가족 전체가 처형당한 불명예스러운 가문.
처음으로 알게 된 어머니의 성이자, 가문이었다.
베스는 알면서도 모르는 게 많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미처 모든 것을 알기도 전에 저를 둘러싼 상황들과 지켜야 하는 몇 안 되는 목숨에 그저 내달리기 바빴으니까.
“비….”
탁. 타닥.
여린 빗줄기가 창을 때리고 떨어지는 소리에 숙인 고개를 잠시 들어 올렸다. 들려오는 소리라곤 없는 적막한 저택에서 베스의 곁을 지키고 있는 유일한 소음이었다.
창에 부딪혔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는 빗방울을 보며, 멀어지던 데베르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언제부턴가 다가오는 모습보다 사라지는 모습이 더 익숙해진 남자였다.
베스는 홀로 물었다.
아직도 황궁에 있는 걸까.
언제쯤 돌아올까.
이곳으로 오기는 할까.
아직 벗기지 않은 면사포 속에 갇힌 그녀의 시야는 유독 더 시커멨다.
멍하니 창밖의 빗줄기만 바라보며 속절없이 시간을 죽일 때였다.
불현듯 귓가로 서늘한 장전 소리가 날아들었다. 그러나 놀라지 않았다. 철컥대며 돌아가는 탄창 소리쯤은 이젠 자신도 구별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총을 쥔 주인이 누구인지도.
느릿하게 고개를 돌린 곳엔 어느덧 코앞까지 온 총구가 미미한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베스에게 보이는 건 그게 전부였다.
“황제의 죽음이 너와 상관이 있나.”
어둠 속의 심문자가 물었다.
베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작은 머리통이 흔들릴 때마다, 얼굴을 가린 베일도 함께 살랑였다.
내리깔고 있던 시선이 면사포 끄트머리를 간지럽히는 총구를 따라 조금씩 위로 올라갔다.
“네 말이 거짓일 시엔.”
날렵한 총구 끝이 면사포를 물어 올렸다.
서서히 드러나는 흰 얼굴은 저보다 한참은 높은 곳에 있는 심문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즉시 사살할 텐데도.”
티 없는 얼굴은 그를 보며 다시 한번 고개 저을 뿐이었다.
“황제의 죽음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맹세해.”
물음인지 명령인지 불명확한 말이었지만, 베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죽음에 가담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물음이든, 가담하지 않았다고 맹세하란 명령이든 중요치 않다는 것을.
더 이상 서로를 믿지 못하는 연인 사이에 오가는 말은 허공 위를 부유하는 먼지와 비슷했다.
“….”
황제의 서거를 알리고 얼마 되지 않아, 황궁의 정무실엔 넥서스의 대신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앞으로의 섭정을 어떻게 하겠냐는 얘기가 주를 이뤘지만, 실상은 다들 제 몫을 어떻게 하나라도 더 끌어올까 궁리하는 더러운 진풍경이었다.
데베르는 그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하워드를 지켜봤다. 여태껏 콜린스와 비슷하게 애매한 중도의 입장만을 고수하던 하워드는 은근히 아더의 편에 서 있었다.
그래,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베스 제인스가 브리틴의 첩자니까.
“널 어떻게 죽이지.”
그는 이번에도 모호하게 물었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은 어떻게 죽일지를 고민하는 잔인한 학살자 같기도 했고, 차마 처형을 결정 짓지 못해 혼란스러운 애인 같기도 했다.
베스는 작은 입술을 뻐끔거렸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그 속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뭘 원할 줄 알고.”
군복을 입은 심문자와 웨딩드레스를 입은 첩자.
이 꼴사나운 풍경이 우리 관계의 전부인데.
“…뭐든.”
베스는 한걸음 제게로 다가오는 데베르를 끈질기게 바라봤다.
만약 제가 베스란 이름을 쓰지 않았다면, 그래서 브리틴의 기록에 적힌 베스 릴리아드를 그가 발견치 못했다면 오늘 밤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베스’란 이름은 태어나 처음으로 받은 선물이었으니까.
지독한 모순이었다. 그토록 소년 데베르에게 전해주고 싶던 이름이 결국은 모든 관계를 파탄 내는 시발점이 되다니.
‘기막히게 운이 좋았지. 네가 데베르와 그 전장에서 만난 게.’
하워드는 그리 말했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것이었지만, 자신은 어디까지나 하워드의 차선책이었다. 올리비아를 빼닮긴 했어도 말문이 막혔다는 장벽이 너무도 컸기에. 그 사이에 저를 대신한 여자들이 몇 번이나 데베르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고 했다.
“저번에도 말했지 않나? 넌 내가 도는 걸 즐기는 것 같다고.”
기다란 사냥총이 아무렇게나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한쪽 무릎을 굽힌 데베르는 말갛게 드러난 여자의 턱을 쥐었다.
짐승처럼 번뜩이는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응시하던 베스는 조심스레 손을 들어 그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바깥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반듯하게 드러난 이마를 매만지던 여자의 손가락은 이내 내려와 그의 뺨을 살며시 쥐었다. 어린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넌 겁이 없어.”
데베르는 짓씹듯 읊조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당장이라도 죽여버리고 싶게.”
성급하게 맞춰진 입술 새로 탄식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미처 끝맺지 못한 성혼 서약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