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폐하의 서거.
그 한마디만으로도 술렁이던 장내를 폭발시키기엔 충분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넥서스 황제의 죽음은 단순히 한 황족의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결혼식장에 모인 이들 모두가 넥서스에서 꽤나 힘을 쓰는 귀족 치들었기에, 황제의 서거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안 봐도 뻔한 그림이었다.
데베르와 아더의 눈이 마주친 것도 그때였다.
아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슈트 단추를 잠갔고, 데베르는 베스의 얼굴 위로 다시 면사포를 드리웠다. 언제든 황제의 곁으로 뛰어가야 하는 군대장의 임무는 막 성혼을 선언한 부부에겐 가혹한 숙명이었다.
“데베르!”
먼저 문가로 뛰어가던 아더가 버진로드 중앙에 서서 데베르를 불렀다.
데베르는 아주 잠시, 면사포 뒤에 숨은 베스를 바라봤다. 베스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데베르도 마찬가지였다.
“데베르 공작!”
하객들이 어수선하게 우왕좌왕하고 있는 와중에 몰리 부인도 데베르를 불렀다.
부인은 이미 가장 먼저 식장을 벗어나는 중이었다. 콜린스가 황족 시해 혐의로 구금된 지금, 가장 위험한 건 그녀의 남편이었으니까.
데베르는 아무 말 없이 버진로드의 단상을 뛰어 내려갔다. 그의 눈짓 한 번에 베스의 곁으로 건장한 체격의 수행인 몇 명이 따라와 붙었다. 감시인지 보호인지 알 수 없는 처사였다.
“세상에, 저번에 시해 혐의도 있었잖아요.”
“병환 때문은 맞는 거야?”
“그럼, 아더 황자가 차기 황제가 되는 건가요?”
“이크, 말조심하세요, 부인. 듣는 귀가 얼마나 많은데.”
“하긴. 천하의 콜린스 공작도 보스넬 구치소에 있는 마당인걸요.”
넥서스의 세력가들이 식장에서 사라지자, 사람들은 좀 더 대범하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베스는 홀로 고요히 남아 점점 작아져 가는 데베르의 뒷모습을 아주 오래도록 지켜봤다.
* * *
들이닥치듯이 황제의 침실 문이 열렸다.
가장 먼저 들어선 건 데베르와 아더였다. 둘은 양쪽으로 갈라져 호이든의 시체가 누인 침대의 한편을 각자 차지했다.
“사망 시각은.”
“지금으로부터 사십 분 전입니다.”
“사인.”
데베르는 무뚝뚝하게 물으면서도, 눈으론 푸르딩딩하게 부풀어 오른 호이든의 얼굴을 쏘아봤다.
“그, 그것이….”
주치의가 우물쭈물 말을 아끼자, 데베르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사인.”
“헉, 헉…. 그건 제가 확인할게요.”
때마침 뛰어 들어온 몰리 부인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침대맡으로 다가왔다.
시체에 손을 올리기 직전, 부인이 아더를 한번 보자 그는 허락의 의미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 같은 침묵 속에서 오직 의료 집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그러나 왜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능숙하게 움직이던 부인의 손길이 점차 느려졌다.
“이건….”
부인도 주치의와 같은 반응을 내비쳤다.
“말씀하세요.”
조금은 강압적인 아더의 말이었다.
부인의 얼굴에 답지 않은 망설임이 스쳤다. 전장 병원을 돌며 산전수전 다 겪은 몰리 부인이었다. 갖은 죽음의 형태를 다 본 그녀에겐 눈앞에 있는 호이든의 죽음 또한 수많은 죽음의 형태 중 하나였다.
하지만, 결코 넥서스 황제의 사인이 돼서는 안 되는 것도 있다.
가령.
“…독살….”
음해 세력이 존재하는 죽음 같은.
시종 중 누군가가 히익, 숨을 들이켜는 소리에 아더의 입술 끝이 들썩였다. 부인의 입에서 ‘독살’이 나온 이상, 아무리 입단속을 해도 이 얘기는 밖으로 새나갈 것이 자명했다.
“…확실합니까.”
아더는 허옇게 질린 제 입술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모두가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는 틈에 어디선가 작은 소란이 들려왔다.
“공주님, 여긴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아더의 고개가 급히 돌아갔다.
라프넬은 문가에 서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침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서 있는 곳에서 호이든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미 부인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모두 들은 참이었다.
새하얀 슬립 위에 가운을 걸친 라프넬은 서거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온 듯했다. 아마 황궁 구석에 꼭꼭 숨은 라프넬에겐 소식이 늦어졌으리라.
“황제 폐하가…”
라프넬은 멍하니 중얼거리며 아더를 바라봤다.
내일이면 황제가 콜린스와 약조한 라프넬과의 결혼 소식이 발표되는 날이었다. 콜린스가 하지 않는다면 아더가 해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시기 좋게 오늘 호이든이 죽다니.
우연의 일치일까. 우연을 가장한 연극일까.
“나가. 라프넬.”
분노가 잔뜩 억눌린 목소리였다.
아더는 반듯하지만 거친 걸음걸이로 문가를 향해 걸어갔다. 그 흉흉한 기세에 다들 몸을 사리며 시선을 피하는 와중에 라프넬만이 그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여동생의 손목을 아프도록 쥔 아더는 그대로 침실을 벗어났다.
조심스레 다가온 주치의가 호이든의 머리 위로 흰 천을 덮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께서 서거하셨습니다.”
부검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몰리 부인과 황궁 주치의뿐만 아니라, 입이 무거운 제국 병원 의사들까지 붙어 진행된 일이었다. 콜린스가 시해 혐의로 구금된 상황에 제국 병원 소속을 불러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긴 했지만, 혹시 모를 주치의의 거짓 부검을 염려해 아더가 직접 부탁한 것이었다.
과도한 혈관의 팽창. 미처 입 안에서 녹지 못한 의문의 약. 전신에 올라온 푸르스름한 약물 중독의 흔적.
모든 것은 명확했다.
“독살이네요.”
바든이 착잡하게 읊조렸다.
부인은 덜덜 떨리는 손을 애써 꽉 쥐며, 수술대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욱! 우욱!”
“병원장님!”
불현듯 헛구역질이 올라온 부인은 바닥에 엎어져 의미 없는 토악질을 해댔다. 잊고 있던 공포를 토해내는 것이었다.
누군가 황위에 오르려 한다. 누구를 위한 황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걸 위한 희생양은 아마….
“데, 데베르 공작이 아직 황궁에 있나요.”
부인은 대답을 듣기가 무섭게 복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차창 너머로 검은 차 한 대가 헤드라이트를 밝히는 게 보였다.
데베르는 제 차 보닛 위로 둔탁하게 몸을 던지는 인영을 응시했다.
벌컥 뒷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몰리 부인이었다.
본 적 없는 부인의 행동에도 데베르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 지친 기색은 있었지만, 당황한 기색은 없었다.
“말씀하십시오.”
그는 오히려 부인이 찾아올 줄 알았다는 듯 의연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데베르의 표정이나 뜯고 있을 만큼 부인은 여유롭지 않았다.
“데베르, 아니. 데베르 공작. 아니!”
부인은 발작하듯 제 머리를 부여잡았다. 지끈거리는 두통이 또다시 머릿속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데베르 클리프 군대장.”
“벌써 알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자네 가슴팍의 제국 브로치가 돌아왔으니까.”
몰리 부인은 기민한 자였다.
그건 단순히 부인들의 사교계나 이끌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과거의 끊임없는 권력 싸움에서 살아남으며 터득한 본능 같은 것이었다.
“눈치가 빠르시네요.”
“그까짓 눈치마저 없었다면 여태 살아남지 못했겠지.”
“부탁을 하러 오셨군요.”
데베르는 목을 옥죄는 타이를 약간 느슨하게 풀었다.
부인의 옷에 밴 희미한 약품 냄새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상대는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데베르 군대장, 사면권을 써 줄 수 있나요?”
그럴 만도 했다. 인자한 구석이 있던 부인의 눈은 두려움으로 점철되어 있었으니까.
다 제 것을 지키고 싶을 땐 저런 표정을 짓기 마련이었고, 데베르는 그런 표정을 질리도록 봐왔다.
베스 제인스도 마찬가지였지.
“무리한 부탁을 하시네요.”
데베르는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려 눈을 가볍게 감았다 떴다.
“저는 황제도 아니고, 아무에게나 사면권을 떨어뜨리고 다닐 만큼의 권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단 한 번만 콜린스가 풀려난다면-”
“풀려난다면. 그다음은. 계획이란 게 있으십니까.”
“…뭐?”
데베르는 손짓으로 차를 출발시켰다.
차는 부드럽게 황궁 후원을 돌아 나가기 시작했다.
“지금껏 몰리 공작가는 중도를 지켰습니다. 적절하게 터져대는 전쟁 뒤에 숨으면서요. 전장 병원이라는 대의마저도 완벽했죠.”
그의 목소리는 지독히도 무감했다.
“하지만 지금은 전쟁도 없고, 더 이상 부군께서 도피하실 곳은 없습니다. 좋든 싫든 한쪽 편에 서야 한다는 뜻인데…. 과연, 고고하신 내외께서 그러실까요?”
“지금….”
“아더보다 저를 먼저 찾아오신 걸 보면, 부군의 구금 사유에 황자의 입김이 들어갔으리라 판단하신 것 같은데.”
웨인 중심가는 여전히 가로등이 꺼져 있었다.
데베르와 몰리 부인은 유유히 그 어둠 속을 배회하는 중이었다. 끔찍한 대화를 곁들이며.
“제가 부군을 사면한다면 아더는 몰리가와 클리프가가 한패라 생각할 겁니다. 멍청한 것 중 몇 명은 이곳으로 붙기도 할 테고요. 그게 뭘 의미한다 생각하십니까?”
부인의 손이 차 시트를 거세게 쥐었다.
“반역입니다. 현재 섭정은 아더니까요. 부군께서 아더의 반대편에 서신다는 뜻이 되겠네요.”
“자, 자네가 아더를 도우면-”
“제 목줄을 아더 메이너에게 맡기라고 말씀하시다니요. 부인께서도 아더를 온전히 믿지 못해, 더 미덥지 않은 저를 찾아오셨으면서.”
데베르는 맥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황좌가 바뀔 때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선대를 통해 모두 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 몰리 부인은 똑똑히 기억했다. 그랬기에 이리 데베르를 찾아와 콜린스의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친목이 반목이 되고, 끝없이 일어나는 추문이 가문을 몰락시키고, 누군가 처형당하고.
오히려 전쟁 발발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는 순간, 부인은 죄스럽게도 안도의 숨을 쉬었더랬다.
“콜린스를 죽게 내버려 두란 말인가.”
“사면권을 쓴다면 죽음은 더 빨라질 겁니다. 다음엔 보스넬 구치소가 아니라, 제국 법정에 바로 서게 되시겠죠. 그럼 부인은 반역 죄인의 아내가 될 테고요. 공석이 될 제국 병원장 자리의 후임자는 생각해 보셨나요.”
그는 조롱이 아니라 사실을 뱉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저 숨죽이고 있는 게 맞나, 데베르 공작?”
그랬기에 부인의 목소리에 원망은 없었다. 짙은 체념만이 있을 뿐.
“황제에겐 충신이지만, 황제가 되려는 자에겐 콜린스 공작만 한 걸림돌이 없으니까요.”
잔인한 선고가 이어졌다.
“중도를 지향하며 어쭙잖은 대의만을 가진 자는 무의미하고 무능할 뿐입니다.”
차는 마침내 몰리 저택 앞에서 멈추어 섰다.
먼저 내린 데베르는 에스코트를 위해 부인이 앉은 자리의 문을 열었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저택의 소담한 꽃들은 찬 가을바람에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그의 앞에서 고개를 떨구고 있는 몰리 부인처럼.
“차라리 구금이 길어지길 비세요. 부인께서 하실 수 있는 건 그것뿐이네요.”
짧은 여름은 끝났고, 불어오는 바람에선 피비린내가 풍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