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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37화 (137/206)

137화

간호 숙소를 나서는 소피아는 제 머리통보다도 큰 가발을 재차 눌러쓰는 중이었다. 어두운 사위를 재차 둘러보는 눈빛엔 두려움이 비쳤다. 그러다 익숙한 그림자 하나를 보곤, 반가운 듯이 종종걸음치기 시작했다.

아더는 차 안에서 은밀하게 소피아를 만났던 평소와 달리, 불 꺼진 가로등 밑에 서 있었다. 소피아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뻐끔거리는 시가 연기가 선명하게 보였다.

아둔한 꼴.

아더는 맞지도 않은 가발을 뒤집어쓰고 오는 간호사를 보며 그리 생각했다. 아마, 어젯밤 가짜 베스가 아니라 진짜 베스가 저 어둠 사이로 제게 다가오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리라.

본래 진짜를 보면, 가짜는 제아무리 그럴듯해도 우습기 마련이다.

“황자님.”

이리 목소리도 다른데 말이야.

어쩌다 데베르 클리프는 이런 얕은수에 속아 넘어갔을까.

“황자님?”

운이 좋았다.

때마침 가로등이 전부 꺼진 나날이 이어지던 것이.

대답 없이 저를 노려보는듯한 시선에 소피아의 어깨가 오그라들었다.

늘 그녀를 보면 한밤중에도 따스하게 웃어주던 황자가 아니었다. 그건 풍겨오는 분위기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끼쳐 드는 이질감에 여자의 구두가 한발 물러서려는 찰나, 아더가 늦지 않게 입꼬리를 휘었다. 그러면 웬만한 사람들은 내가 알던 아더 메이너가 맞는구나, 하고 마음을 놓기 마련이다.

아더는 평생을 그 알량한 미소 뒤에 숨어 살았다.

“들으셨나요?”

주어가 없어도 밀회를 지속한 두 사람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이제껏 아더는 쓸만한 정보를 물어오지 못하는 간호사를 일부러 밤마다 찾아왔었다. 자신을 향한 이성적인 호감을 모를 만큼 눈치 없지 않은데도 말이다.

그저, 필요에 따른 이용이었다.

이 멍청하고 불쌍한 간호사는 그의 부름이라면 우스꽝스런 가발을 쓰고도 자정에 뛰쳐나올 것이라 확신했기에.

“네.”

소피아의 대답에 아더의 눈썹이 가볍게 들썩였다.

입가에 가져가던 시가는 잠시간 매캐한 연기만을 뿜어내다 결국 바닥으로 떨어졌다. 긴장이었다.

“데베르 공작님에게 ‘아니다’ 이 한마디만 전하라고 하셨어요.”

“대체 언제?”

“아, 제가 오늘 베스 대신에 구치소 면회를 하러 갔거든요.”

소피아의 얼굴에 언뜻 자신감 같은 게 스쳤다. 제 딴엔 이제야 황자를 돕는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젠장할.”

욕을 짓씹는 아더의 턱이 불거졌다.

유독 웃을 때 말갛게 휘어지던 눈가가 분노로 벌겋게 달아오르자, 그 괴리감은 더 섬뜩하기만 했다.

“황자님, 괜찮-”

“그래서.”

소피아의 말을 끊는 아더의 턱이 약간 들렸다.

잔뜩 내리깐 푸른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고 있었다.

“콜린스 공작이 시키는 대로, 데베르 공작에게 갔습니까.”

“엇, 네…. 안되는… 건가요?”

“멍청한 것들은 이래서 문제지.”

“네?”

혼잣말 같은 아더의 욕설에 소피아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아더는 제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상대의 반응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태도였다.

그러나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가려진 눈동자는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제가 구치소에 갔을 때는 낮인데, 황자님과 저는 깊은 밤에 만나니까요”

‘깊은 밤’을 말하는 소피아의 귓바퀴가 새빨개졌다.

“그리고, 그리고… 그 대화를 가장 먼저 가져오라는 말씀은 없으셔서….”

일개 평민이, 특히나 수더분한 성정의 소피아가 말하지 않은 주문까지 알아서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이 밀회가 꺼림칙한 구석은 있어도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고 믿고 있는 참이었다.

“클리프 공작가의 집사님께 말씀드리고, 곧장 황자님께 말씀드리는 건데….”

아더의 귓가엔 더 이상 소피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용 가치가 떨어진 소리에 귀 기울여줄 아량은 없었다.

“그래서, 네가. 호이든 앞에서….”

황궁에서 데베르가 떨던 같잖은 가식을 떠올렸다. 주군 따위 심중에 세워본 적도 없는 놈이, 감히 뱀 같은 혀를 놀려 군대장의 자리를 채가던 모습을.

적당한 때에, 적당한 사고로 위장해 콜린스를 수술대에 눕혔을 때만 해도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혈액 검사를 제대로 한 걸 보면 조력자가 더 있단 소리였다.

답은 뻔했다.

“몰리 부인….”

아더는 뻐근한 제 목덜미를 주물렀다.

웨인의 귀족 부인들을 전담하다시피 하는 몰리 부인 아닌가. 전염병 주사를 핑계로 공주의 피를 빼돌리기란 너무도 쉬웠을 것이다.

“버리세요.”

“네?”

치밀어오르는 부아를 가라앉히지 못한 관자놀이에 퍼런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버리세요.”

순간 거칠어진 숨을 고요히 고르며 재차 말했다.

살짝 눈을 감았다 뜬 황자의 모습은 모두가 알던 아더가 아니었다.

더없이 차갑고.

“아니면 태우든가.”

지독히도 타성에 젖은 듯한.

“그 가발 얘깁니다. 운이 좋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을 테니.”

* * *

베스는 자신을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우는 손길에 눈을 떴다.

잘 떠지지도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끌어올리자, 커튼 사이로 새들어오는 햇살이 어렴풋이 보였다.

하지만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일어나셔야 해요.”

자그마한 낯선 목소리.

베스는 그제야 제가 누운 곳이 지나치게 푹신하고, 따뜻하다는 걸 눈치챘다. 어제 해가 질 무렵, 집무실의 소파에서 진창으로 뒹굴던 제 모습이 떠오른 것도 함께였다.

눈을 질끈 감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장면은 더 생생히 떠오르기만 했다.

제 발치로 떨어지던 브리틴과 관련한 기록들. 목을 조르던 거친 손길. 구걸하듯 애걸해도 듣지 않던 냉담한 눈동자. 그러면서도 뜨겁기만 하던 숨결들.

엉망으로 시작된 정사의 끝엔 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었다. 땀에 젖어 미끈한 몸 위로 남자가 무너져내렸고, 겹친 몸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에 눈을 감은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어디로 갔더라.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으셨습니다.”

희미한 미몽에 다시 빠지려는 베스를 사용인이 깨웠다.

결혼식.

그 말에 베스는 겨우 몸을 뒤척여 일어났다. 고작 침대에서 일어나 앉는 것뿐이었지만, 잔뜩 시달린 몸은 제 주인을 따라주지 않았다.

“두 시간 남으셨어요.”

침대 발치엔 처음 보는 여자 사용인이 서 있었다. 필요한 말만 하곤 얌전히 시선을 피하는 것이 지극히도 클리프 저택의 사용인다웠다.

베스는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만큼 얼이 빠져 있었다.

“오늘이… 결혼식인가요?”

이미 알고 있는 질문을 하면서도 베스는 멍하니 허공을 쳐다봤다.

그 시선을 사로잡은 건 언젠가 보뜨네의 의상실에서 고른 드레스였다.

“씻고 나오시면 치장을 돕겠습니다.”

그때부터 베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필요도 없었다.

몸에 열꽃처럼 피어난 자국도 몇 번 욕조에서 문지르다가 포기했다. 어차피 지워지지 않으리란 것을 알았으니까.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욕실 밖에 서 있기만 해도, 어디선가 나타난 사용인들이 알아서 몸을 닦아주고 드레스를 입히기 시작했다. 베스는 인형처럼 그들의 손길을 따라 움직였다.

“엇, 이거는….”

능숙하게 머리를 만지고, 얼굴을 칠하던 사용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던 베스도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깨선이 완연하게 드러난 드레스는 목덜미와 빗장뼈 근처를 빼곡히 채운 남자의 흔적을 여과 없이 보여줬다.

생각지 못한 상황에 사용인이 허둥지둥하는 사이, 나직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부인을 뵈러 왔습니다.”

예상치 못한 보뜨네의 방문이었다.

보뜨네는 ‘아가씨’로 부르던 이전과 달리, 베스를 ‘부인’으로 부르고 있었다.

“미처 챙겨드리지 못한 것이 있어서요.”

힐긋 베스를 본 보뜨네는 가죽 가방에서 베스가 입은 드레스와 똑같은 레이스 천을 꺼냈다. 작은 꽃이 빈틈없이 수놓아진 레이스가 베스의 목과 어깨 위로 케이프처럼 둘렸다.

얼굴 아래까지 흰 천이 올라오자, 붉은 입술과 새카만 눈동자가 더 눈에 띄었다.

“웃으세요, 부인.”

보뜨네는 잔뜩 얼어있는 차기 공작부인의 어깨를 살며시 쥐었다.

그녀는 이렇게 선대 클리프 부인 또한 치장했었다. 기억 속의 고고한 클리프 부인과는 달랐지만, 거울 속의 약간은 겁에 질린 아가씨 또한 제법 클리프 부인에 어울리긴 했다.

하여간에 지독한 사내들.

보뜨네는 클리프를 그렇게 평가했다.

“데베르 공작님은 미감이 좋으신 편이고, 그분이 선택하신 것들은 틀린 적이 없다고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날카롭게 읊조리던 보뜨네는 성긴 농담에도 웃지 않는 베스를 보곤 설핏 웃었다.

“공작님 눈에도 예쁘실 거예요.”

그녀는 비밀을 지키는 만큼, 기억도 잘하는 자였다.

꽉 모아쥔 베스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꽤 엄하게 말했다.

“결혼식의 주인공이 늦으시면 안 되죠.”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면사포를 쓴 베스의 눈엔 모든 것이 반쯤 흐릿하게만 보였다.

문 안에선 사람들이 오가는 소리와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들려왔지만, 문밖에 선 베스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가만히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수고가 많았구나.”

하워드에게 제 한쪽 손을 맡긴 베스는 입술을 거세게 깨물었다. 할 수만 있다면 손목을 끊어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마저 스쳤지만, 코펠을 떠올리면 그럴 수도 없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은 초조하게 두근거렸다.

언젠가. 언젠가 이 모든 게 끝나면.

베스는 습관적으로 전쟁 후를 떠올리던 예전처럼, 이젠 모든 것이 끝났을 때를 떠올리려 애썼다. 가장 행복한 미래가 될 수는 없어도, 더 이상의 고통은 존재하지 않을 그때를.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잠시 멈추더니, 이내 귀에 익은 행진곡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철옹성 같던 황금빛 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리며, 베스의 앞으로 끝없이 이어진 버진로드가 눈에 들어왔다.

“고개 들어라.”

하워드가 그리 말하지 않아도 베스의 눈은 오직 붉은 길 끝에 서 있는 데베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제복 차림의 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사이가 좁혀지자 몇 걸음 천천히 마중 나오는 그의 모습은 어둑한 숲길을 걸어 나오던 군대장의 그림자와 겹쳐 보였다.

마침내 손을 마주 잡은 두 사람 사이엔 그 어떤 시선도, 말도 오가지 않았다. 서로에 대한 결속을 확인하는 자리에서 가장 헐겁게 마주 잡은 손이라니.

무언가 귓가에 웅얼거렸지만, 전부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변치 않는 믿음을 서약하는 정결한 입맞춤으로 성혼을 선언토록 하겠습니다.”

늙은 주례사의 마지막 말과 함께, 데베르의 손이 하늘거리는 면사포를 천천히 벗겨냈다.

서서히 드러나는 베스의 입술을 향해 데베르의 고개가 느릿하게 틀어지는 순간.

웅장한 종소리가 거리를 울렸다.

뎅. 그 소리에 홀을 채우던 모두의 눈동자가 창밖으로 향했다.

데베르와 베스의 시선이 부딪히듯 마주쳤다.

한 번 울리고 말 줄 알았던 종은 다시 한번 커다랗게 울려댔다.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지만, 마주한 두 사람의 눈동자는 한없이 침잠하고 있었다.

종소리는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귓전을 때렸다.

“폐, 폐하가…!”

뛰어 들어온 누군가의 외침이었다.

“…서거하셨습니다!”

종은 연이어 네 번 울렸다.

넥서스 황제의 죽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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