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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36화 (136/206)

136화

“안 그래, 베스 제인스?”

여린 목은 얼마 힘주지 않아도 발갛게 달아올랐다.

당황한 베스의 손이 남자의 셔츠를 타고 미끄러졌다.

“베스 제인스란 이름은 거짓이 아닌가.”

“큽.”

점점 막혀오는 숨통에 베스의 구두 굽이 오르락내리락하길 반복했다. 절로 열기가 모여든 눈가엔 물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하긴. 말 못하는 척도 그리 오래 했는데.”

미련 없이 손아귀의 목을 떨쳐낸 데베르는 제 손을 손수건에 몇 번 문질러 닦았다. 그러곤 테이블 위의 종이 뭉치들을 되는대로 베스의 발치로 던졌다.

드러난 종아리에 아프게 부딪히고 떨어진 서류들이 어지럽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문득 세차게 불어온 바람이 그 중, 얇은 종이 한 장을 흔들어 올렸다.

베스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눈에 익은 종이를 잡아 들었다.

“읽어.”

고압적인 명령과 달리, 남자는 여유롭게 시가를 꺼내 물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이라곤 없었다. 어젯밤, 황자의 차 문을 열 때와 비슷한 얼굴이었다.

“왜, 다시 목소리가 안 나와?”

시갓불을 붙이다 말고 그가 물었다.

그의 입가에 매달린 마른 시가가 조롱하듯이 달랑거렸다.

“적은 성의를 봐서 소식지엔 실어줄 테니 걱정 마.”

소식지가 설마. 베스의 입술이 소리 없이 벙긋거렸다.

“클리프는 넥서스의 천박한 것들은 다 쓸어 담고 다니거든. 모르고 청혼을 승낙한 건 아니겠지.”

데베르는 청혼을 말하며 피식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알았더라도 해야지. 훌륭한 첩자는 그래야 하는 법이니까.”

“전-”

“한 마디만 더 지껄이면.”

뿌연 시가 연기에 남자의 얼굴이 가렸다. 길게 내뿜어지는 연기가 일순 흔들렸다.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지금 죽여버릴지도 몰라.”

베스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곤 생각했다. 자신이 아는 데베르라면 용서치 않으리란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 순간이 오자, 조금만 더 나를 믿어줬으면 하는 서운함이 밀려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기적인 욕심이었다.

“공작님을 해칠 생각이-”

“없었다고 하겠지. 전부 그래. 하나같이. 진부하게.”

뚝뚝 끊기는 음성엔 그의 감정이 선연히 드러나고 있었다.

데베르는 테이블 서랍을 열었다. 그의 손에 들린 서류 봉투의 정체를 안 베스의 표정이 아득해졌다. 오늘 아침, 진즉 챙겼어야 할 밀서였다.

콜린스의 구금 소식에 정신이 팔려 확인하지 못한 게 패착이었다. 물론 했다 한들 의미 없는 짓이었을 것이다. 눈을 떴을 때, 봉투는 이미 저 남자의 손에 들어가 있었을 테니까. 어쩌면 이런 독대가 더 빨라졌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발치에 떨어진 두툼한 종이 뭉치 위로, 조금 더 가벼운 밀서 봉투가 던져졌다.

“넌 좀 다르게 얘기해야지. 그래야 여태 속아 넘어간 내가 우습지 않지.”

올리비아의 얼굴을 아는 번트의 부인은 간병인인 척, 코펠에 도착한 의료봉사단 틈에 끼어들었다. 병원 안으로 들어간 부인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뛰어나오기까지는 십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올리비아가 맞아요. 영 얼굴이 못 쓸 지경이긴 한데, 여기! 손바닥에 기다랗게 난 화상 흉터를 보고 바로 알아봤죠.’

‘흉터?’

‘아유, 제 실수긴 한데. 남작 부인이 오고 나서 몇 년 지났을 무렵에 제 딴엔 좀 친해졌다고 생각해서 갓 끓인 수프를 냄비째 들고 갔거든요. 그걸 그 부인이 대뜸 요령 없이 붙잡았다가 손이 뎄지 뭡니까. 내가 같이 집에 들어가서 소독해주려고 해도 부득불 괜찮다고, 할 줄 안다고 그러더니 결국 흉이나 남겼지. 쯧.’

거기서 베스의 존재를 한번 떠올렸었다. 아마 그때쯤엔 아이는 이미 태어나 집안에서 자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 해산을 남몰래 도운 건 보호구역의 약쟁이 할멈일 것이고.

어렵지 않았다. 얼추 맞춰놓은 의심이란 퍼즐의 틈을 확신이란 이름으로 견고하게 붙이는 것뿐이었다.

“언제부터야. 전장에서 편지가 온 걸 보면 내 존재는 그 이전부터 알았을 텐데. 애초에 후방 병원 공습에서 홀로 전방까지 걸어온 것도 계획의 일부인가?”

데베르는 피곤한 듯 시가를 거칠게 비벼 껐다. 잔뜩 악력을 실은 탓에 시가 끄트머리가 엉망으로 짓뭉개졌다.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그때까지는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읏.”

불시에 소파로 밀쳐진 베스의 몸 위로 데베르가 올라왔다. 바동대는 두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그의 상체가 급하게 숙어졌다. 가쁘게 숨을 할딱이는 여자의 목에 데베르의 뜯어낼 듯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여자가 한껏 몸을 비틀어도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어머니의 목숨이 저당 잡혀있어서, 하워드가 처음부터 어머니를 이용-”

베스는 할 수 있는 한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하는 애원이 아니라, 제 어머니의 목숨줄을 잡은 권력에 대한 애걸이었다.

“너도 별거 없군.”

그러나 들려오는 냉담한 목소리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더 변명을 이어갈 엄두가 생기지 않았으니까.

저를 향한 일말의 신뢰나 동정도 보이지 않는 눈동자를 마주하는 건, 생각보다 훨씬 가혹한 일이었다.

“난 첩자를 단 한 번도 살려준 적이 없어. 곱게 죽인 적도 없고.”

그는 더 이상 미약한 반항조차 보이지 않는 베스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나갔다. 전처럼 성급하게 뜯어내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서서히 절망하는 눈동자를 보고 싶어서.

잔인한 바람이었다.

“궁금하지 않아? 왜 널 아직도 죽이지 않는지.”

그가 다정하게 물었다.

그러나 베스도 이젠 그게 기만이라는 것을 알았다.

“넌 내 ‘스쳐 지나갈 욕정’을 자극하거든.”

그는 베스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있었다.

그 말과 함께 데베르는 허리춤에서 권총 하나를 꺼냈다. 그의 손보다 한참 작은 권총은 본래 그의 것이 아니었다.

철컥, 하고 돌아가는 탄창 소리에 베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걸 침대 밑에 숨기고 내 밑에서 울어대다니.”

지독하게 고집스런 잿빛 눈동자가 베스를 씹어 삼킬 듯이 응시했다.

드러난 나신엔 채 가시지 않은 그의 자국이 가득했다. 유난히 흰 살결에 흉포하게 남은 검붉은 자국들은 자칫 흉터처럼 보였다.

그러나 진짜 흉터가 아니니 곧 사라질 것이다.

언젠가 사라질 이 여자처럼.

“하지만 잠깐이야.”

열린 창밖으로 지는 노을이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안타깝게도 더 이상의 예외는 없어.”

그 빛 아래에 누운 두 사람은 한없이 비틀려 가는데도.

* * *

“누구십니까. 엇!”

늦은 밤, 낯선 인영의 정체를 확인한 보초병이 얼른 허리를 곧추세웠다.

차에서 내린 사내는 짙은 감색의 넥서스 군복을 입고 있었다. 들려오는 대답이 없어도, 그의 가슴팍에 달린 제국 문양의 브로치가 그의 존재를 대신 설명했다.

“아니, 데베르 공작?”

“데베르 공작이 왔다고?”

연이은 정무 회의로 흐려진 긴장감도 단 한 명의 등장이면 선명해지기에 충분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순식간에 장내를 메웠다.

“오늘이 총회인 줄 알고 오셨나 보군.”

“오밤중에 군복을 입은 건 대체 무슨 저의인가.”

데베르는 기다란 테이블의 양쪽으로 갈라져 앉은 대신들의 얼굴을 훑어봤다. 제게 반색하는 이들부터 탐탁잖은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치들까지.

전자는 본래부터 넥서스에 뿌리를 둔 자들이었고, 후자는 정략적인 결혼이나 사업상의 이유로 브리틴이나 간혹 코바흐에 기반을 두고 있는 자들이었다. 아더에게 줄을 선 자가 누구인지는 뻔한 얘기였다.

데베르는 가운데 상석에 앉아있는 아더를 향해 가볍게 목례했다.

“폐하를 먼저 뵙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가시겠습니까.”

황제의 대리인인 황자를 향한 지극히 신사답고 정중한 태도였다.

“그러죠.”

아더 또한 적당한 미소로 화답했다.

넥서스의 젊은 공작이자 가장 유력한 황제 후보인 두 사람이 마주 보는 순간이었다.

그들을 지켜보는 이목이 사라지고, 복도를 비치는 등불에 두 사람의 그림자만 비칠 때까지 둘은 침묵을 지켰다.

침실 문이 열리기 직전, 아더가 문고리를 잡았다.

“갑자기 무슨 군복이야.”

“내 걸 찾으려는 게 문제인가.”

“내 거라니.”

“가진 건 목숨 하난데, 요즘 하도 뺏어가려는 놈들이 많아서.”

말장난 같은 대꾸를 되묻기도 전에 데베르가 먼저 문을 밀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낮은 울림이 죽음의 그림자가 찌든 호이든의 침실을 울렸다.

“데, 데베, 데베르….”

반쯤 정신이 나간 호이든은 잠에 취한 건지, 약에 취한 건지, 아니면 그저 밀려드는 죽음에 취한 건지 구분되지 않았다.

데베르는 그대로 침대맡으로 걸어가 한쪽 무릎을 굽혔다. 황제를 향해 주저 없는 멸시를 내비치던 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의 표정은 진중했고, 둘도 없는 충신 같았다.

“자, 자네가 여길.”

호이든의 얼굴엔 데베르를 향한 경계심과,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뭐라도 붙잡고 싶은 간절함이 혼란스럽게 섞여 있었다.

뭐라 말릴 새도 없이 벌어진 일에 아더는 입술을 굳게 잠근 채 상황을 지켜봤다. 하지만, 곧 들려오는 소리에 기가 찬 웃음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군대장의 복귀를 승인해주십시오.”

인제 와서 군대장 자리에 오르겠다고?

아더의 미간이 좁아 들었다.

“데베르 공작, 폐하는 지금 병환으로 정무를 보시기 어렵습니다.”

“클리프가는 목숨을 다해 주군이신 폐하를 지키겠습니다. 넥서스의 유일한, 태양이신 폐하를요.”

순간, 호이든의 눈빛에 돌연 이지가 돌더니 곁에 선 아더를 흘깃 쳐다봤다. 갈수록 자신과 닮아가는 이복동생의 눈동자. 그 눈동자가 두려웠다.

호이든은 벌써 알고 있었다. 원래 권력이란 것은 맛을 볼수록 탐하게 되는 것이라는 걸.

“국새를… 가져오라.”

제기랄. 그 의미를 눈치챈 아더가 욕지거리를 짓씹었다.

“폐하. 지금은 상황이-”

“뭣들 해! 국새를 가져오라!”

발작 같은 고성에 누군가 급히 바깥으로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결국, 네가, 이러려고….”

아더가 낮게 뇌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만하게 내리깐 데베르의 시선 끝에 국새를 들고 오는 시종이 보였다.

그는 아더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흘리듯이 속삭였다.

“일을 제대로 하고 싶으면 콜린스보다 나를 먼저 감옥에 처넣었어야지. 내가 빌어먹을 클리프가의 운명에 순응하기 전에.”

황제의 직인인 국새가 새로운 군대장 위임서 위로 선명하게 찍혀 내려갔다.

모든 것은 처음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원치 않던 혼란이 생겨나기 전으로.

“그럼, 내일 제 결혼식에서 뵙겠습니다. 메이너 공작.”

이번엔 완벽한 데베르의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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