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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35화 (135/206)

135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콜린스 교수님이 경관에게 잡혀간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가슴 한구석에선 어쩌지 못하는 불안이 밀려왔다.

어젯밤 아더의 반응이 아무래도 꺼림칙했다.

베스뿐만 아니라 아직 잠이 덜 깬 간호사들도 병원장의 구금 소식에 헐레벌떡 뛰어가기 시작했다.

병원 문 앞은 이미 콜린스의 이송을 막기 위한 의료진들과, 이송을 진행하려는 경관들이 개떼처럼 뒤섞여 있었다.

“상황을 정확히 설명하세요!”

“아니, 부인께서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로비로 뛰어가자마자 마주한 건, 콜린스가 누운 침대를 끌고 가는 경관 무리와 그 앞을 막은 몰리 부인이었다.

베스는 몸을 비집고 소란의 중심으로 들어섰다. 어렴풋하게 들려오던 말싸움은 점점 고성으로 번져가는 중이었다.

“우린 황궁의 명령을 받들 뿐입니다. 공작님이 몰래 폐하의 약에 불순물을 탔다잖아요. 난들 압니까?”

“저이는 어제 수술받았어요. 황궁 근처엔 갈 수도 없었단 말이에요. 이게 말이나 되는 상황인가요? 명확한 소환장 없이는 한 걸음도 이 병원 밖으로 나갈 수 없어요. 제 남편이라서가 아니라, 제국 병원의 환자이기 때문이에요. 제겐 제 환자를 보호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진짜 돌겠네.”

중년의 경관이 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명망 있는 공작을 아침 댓바람부터 잡아가려니 고역이 따로 없었다.

“제기랄. 증인이 있다잖아요.”

경관은 황궁의 전화 내용을 되짚었다.

“그, 무슨 간호사가 왔다던데. 그 간호사가 약이 이상한 걸 발견했다고?”

그때까지만 해도 잠자코 상황을 관망하기만 하던 콜린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일이 이렇게 되는 건가. 참을 수 없는 침음이 흘러나왔다.

“소환 명을 따르겠소.”

“어유, 공작님. 그래 주시면 저희야 감사하지요.”

“여보…!”

“안 돼요!”

이번에 튀어나온 건 베스였다.

베스는 단단히 침대 헤드를 붙잡은 채 말했다.

“제가 그 간호사예요. 폐하의 약에 섞인 불순물도 직접 확인했고요. 콜린스 공작님은 절대 범인일 수 없습니다. 소환장을 보내려면 주치의에게 먼저 보내셨어야죠.”

잔뜩 쉰 목소리가 간절하게 이어졌다.

“제가 도착했을 땐 이미 반쯤 약이 투여된 뒤였고, 그 주사기를 제일 먼저 만진 건 주치의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것도 제 눈으로 봤고요. 증인이 더 필요하시면 함께 있던 시종들을 부르세요.”

“아니, 그 약 자체가 여기서 나왔는데 무슨.”

“소환장을 가져오세요!”, “이건 제국법에도 위촉될 겁니다.”, “문 막아!” 덩달아 옆에 있던 의료진들까지 끼어들어 로비는 또다시 아수라장이 됐다.

그 모든 소란을 일순간에 잠재운 건 콜린스의 호통이었다.

“그만!”

콜린스는 전에 없이 엄한 얼굴로 대거리를 하는 병원 식구들을 돌아봤다.

“여기 환자가 나뿐인가! 다들 제 환자는 어디다 내팽개쳐두고 여기서 난리야. 쌓아놓은 제국 병원의 명예를 무너뜨릴 참인가.”

까칠한 턱수염이 얼굴을 덮은 그는 오늘따라 노쇠해 보였다.

“죄가 없다면 풀려날 일이니 다들 요란 떨지 말고 해산하도록.”

콜린스는 경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제 남편이 평소엔 유해도, 한 번 마음 먹으면 쇠고집이란 걸 아는 몰리 부인도 한 걸음 물러섰다. 물러나지 못하는 이는 오직 베스뿐이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제 몸무게를 실어 침대 헤드를 잡아당기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베스.”

콜린스는 어젯밤 베스를 황궁으로 보낸 실수를 통감했다.

“싫어요.”

어린아이처럼 떼쓰는 베스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럼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저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 용의자겠네요.”

“…베스 제인스!”

슬슬 흩어지던 무리가 벼락같은 음성에 다시 모여들었다.

“나설 때가 있고 나서지 말아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부인, 베스를 데려가세요.”

“싫습니다. 따라가겠습니다.”

이건 모함이다.

‘덕분에 진실을 알았으니 범인을 찾는 데 총력을 다할 수 있겠네요. 감히, 넥서스의 현 황제에 대한 시해 혐의라니. 잡히면 빠져나가기 어려울 겁니다.’

황자는 진실을 밝힐 생각도, 범인을 찾을 생각도 없는 게 분명하다.

잡히면 빠져나가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리란 생각이 스쳤다.

“네가 한 번만 더 병원장의 권한을 무시한다면, 난 널 해임할 수밖에 없다. 다신 병원에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할 거야. 병원의 기강을 흐트러트리는 간호사 따위 필요 없으니까.”

콜린스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뱉고 나서야, 베스는 쥐고 있던 침대 끝을 놓았다. 허옇게 질린 손바닥이 얼마나 그녀가 절박했는지를 말해줬다.

“방법을 찾자.”

다가온 아이네스가 베스의 손을 쥐었다.

콜린스는 벌써 저만치 병원 밖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 * *

탄원서는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의료진뿐만 아니라, 아이네스와 딕시는 제 부모들까지 동원해 탄원서를 써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이미 예상한 일이긴 했다. 죄명이 다른 것도 아니고 황족 시해 혐의였으니까.

그나마 다행은 하루에 두 번뿐이지만 면회가 허락된다는 것이었다.

몰리 부인이 면회하러 간 사이, 병원장실에 모여 앉은 얼굴들엔 근심이 떠나질 않았다.

“내가 황제라면 그냥 한번 봐줄 텐데.”

하도 답답하니 나오는 헛소리였다.

말이 혐의지, 실상 분위기는 범인을 확정지은 분위기였다. 하물며 지나가던 사람조차 병원에 얼굴을 들이밀고 “공작님이 그러신 거 맞아요?”라고 물을 정도니, 상황은 알만했다.

들려오는 소식도 아직 혐의를 밝히고 있다는 지지부진한 얘기와, 그날 밤의 발작 이후 황제의 상태가 더 악화되었다는 악보뿐이었다.

“뇌물이라도 왕창 먹여버리고 싶은데 하필 상대가 황궁이라니.”

딕시도 갑갑하긴 매한가지였다.

“그러게. 돈 주고 사면권은 못 사나.”

오가는 탄식 사이, 누군가 툭 던진 말이었다.

그 말에 베스의 눈이 번뜩 뜨였다.

혹시 사면권이 있으면 조금이나마 상황이 달라지지 않을까.

“사면권이 무슨 연극 표에요? 황제랑 군대장밖에 없는 권력을 돈 주고 살 수 있게?”

“거참, 병원장님이 걱정스러워서 한 얘기 가지고 핀잔은.”

“말 같지도 않은 얘기로 사람 속을 더 뒤집으니깐 하는 얘기죠.”

황제의 권한은 지금 아더에게 갔다. 그는 제 사면권을 절대 콜린스에게 쓸 리가 없다.

그렇다면 나머지 사면권은….

예전 코바흐전에서 군대장이 사령관의 구금형을 사면권을 써서 풀어준 전적이 있었는데.

기억을 더듬을수록 희미하던 장면이 점점 생생해졌다.

“베스, 어디가?”

베스는 그대로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 * *

“오, 소피아가 왔구나.”

콜린스는 신음을 삼키며 누인 몸을 일으켰다. 사실 몸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고개만 겨우 벽에 기댄 것이었다. 마감도 안 된 차가운 구치소 바닥은 환자에겐 조악하기만 했다.

“원래 베스가 오기로 돼 있었는데, 갑자기 사라져서요.”

철창 밖의 면회인은 뜻밖에도 소피아였다.

“여기 있으면 누가 오든 반갑지.”

콜린스는 허허 웃으며 대꾸했다. 마침 데베르에게 전해야 할 말도 있는 참인데, 베스가 아니라니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 본론부터 말하마.”

콜린스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데베르 공작에게 가서 ‘아니다’ 이 한마디만 전하렴.”

“아니다, 요?”

“그래. 이러니저러니 할 것 없이 딱 ‘아니다’, 이 한마디면 된다.”

맥락 없는 부탁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소피아는 엉겁결에 고개를 주억였다. 그 말을 하는 콜린스의 표정이 너무도 비장한 탓이었다.

“지금 바로 가서 전해야 한다.”

수술에서 깨어난 직후, 콜린스는 몰리 부인부터 불렀었다.

그가 직접 코펠에 가지 않아도, 데베르가 미리 심어 놓은 그곳의 간호사가 의료봉사단 무리에 섞여 필요한 혈액을 채취한 뒤였다. 이제 남은 건 혈액 검사를 해 줄 사람이었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 연구의 공동 연구자는 그의 부인뿐이었으니까.

‘데베르도 당신도 미친 건가요?’

그녀는 대번에 거절했었다. 사실 이유는 콜린스와 비슷했다.

만약 둘의 피가 섞였다고 한들 이제 와 어떡하겠다는 건가. 모르는 게 더 나은 것도 있는 법이다. 본인은 베스가 더 힘든 것은 볼 수 없다. 결과가 모호하다면 자신은 차라리 거짓말을 하겠다.

결국은 베스도 데베르도 지키고 싶다는 같은 마음이었다.

‘아니에요.’

일찍이 면회를 온 몰리 부인이 한 첫마디였다.

재차 제게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며 되물었지만, 부인의 대답은 일관됐다. 창살 밖에서 펼친 시험 결과지를 보고서야 콜린스는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내가 얼마나 심장 떨렸는지 알아요?! 다시는 이따위 부탁 하지 마세요.’

감옥에 갇혀 누워있는 주제에 아니라는 소식에 벙긋거리는 제 남편을 보자, 부인은 혀를 찼더랬다.

‘편안히 누워서 소식 들어 좋겠네요. 정말 천운일 따름이죠. 수많은 결과 중에, 확실히 불일치 하는 몇 안 되는 부류에 속했으니까.’

하지만 데베르에게 소식을 전해달란 얘기를 하기도 전에 짧은 면회 시간은 끝나버렸다. 예외 없이 가림막으로 가려지는 창살 너머로 더 부탁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면회 시간 끝났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교도관이 가림막을 끌고 왔다.

“부탁하마!”

콜린스는 마지막으로 외쳤다.

* * *

베스는 계단을 오르다 말고 주위를 다시 한번 둘러봤다.

이 커다란 저택에, 그것도 대낮에 사용인 하나 보이지 않는다니. 심지어 늘 로비를 지키던 집사도 없다는 게 이상스러웠다.

그러나 이내, 이곳을 날이 밝을 때 온 것 자체가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쁘다.”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감탄사였다.

늘 어둠에 잠겨 있던 클리프 정원은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를 지나는 중이었다. 푸른 잎사귀와 본 적 없는 꽃들이 어우러진 그곳은 베스에겐 낯선 아름다움이었다.

자신은 생각보다 그 남자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 꼭 이 저택뿐만이 아니더라도.

하지만 잠시 들떴던 마음은 굳게 닫힌 남자의 집무실 문을 보자 한없이 가라앉았다.

조심스레 문을 열자 즐비하게 쌓인 서류를 넘기는 남자가 보였다.

“공작님.”

초조해진 베스는 딱 반걸음,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부탁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어제는 변명. 오늘은 부탁. 내일은 뭐야, 사정?”

그는 여전히 베스를 보지 않은 채, 다정한 목소리로 잔인하게 힐난했다.

그래도 베스는 부탁해야 했다. 필요하다면 사정할 수도 있었다.

“콜린스 공작님이 누명으로 보스넬 구치소에 계세요. 시해 혐의라 탄원서도 소용없고, 법원은 휴정 상태고, 도움을 청할 곳이라곤-”

“내가 무슨 수로.”

“혹시… 군대장의 사면권을….”

데베르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살랑이는 커튼이 서무 테이블을 쓸고 지나가자, 베일에 가려져 있던 여자의 얼굴이 비로소 선명하게 보였다.

모든 건 처음과 비슷했다.

무릎을 덮는 하늘색 간호복, 화장기 없는 얼굴, 새카만 머리카락, 천천히 다가갈수록 짙게 풍겨오는 저 여자의 향.

빌어먹게도 저를 미치게 했던 그 향.

고작 이딴 거에 속아서.

“거래가 공정하지 못하네.”

베스의 앞에 선 데베르는 불현듯 여자의 목을 콱 쥐었다.

“첩자가 그런 눈을 하면 반칙이지.”

간밤의 정염을 씻어낸 눈동자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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