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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34화 (134/206)

134화

협박이라기엔 건조했고, 농담이라기엔 음산한 말이었다. 고저 없는 목소리는 자칫 감정 없게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데베르는 지극히 클리프답게 군 것일 뿐이었다.

“데베르…?”

제 이름을 부르는 아더를 향해 기꺼이 허리를 숙여 줄 아량까지 존재할 정도로 말이다.

“그쯤 하라 했을 텐데.”

데베르의 시선이 비스듬하게 떨어졌다. 슬쩍 내리깔린 그의 시선 끝엔 여전히 어깨를 웅크린 베스가 있었다.

“내려.”

아직도 아둔하게 뻗은 손을 거두지 못한 아더를 향한 명령이자, 어디에 발을 들였는지도 모르고 순진한 체 눈만 깜빡이는 베스를 향한 명령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의 간호사와 황자의 접선 혹은 밀회.

사람 하나를 간호 숙소에 붙이고 나서 듣게 된 재밌는 소식을 막상 눈앞에서 보니 감회가 새롭긴 했다. 컴컴한 길목에서 저 아닌 다른 이를 기다리는 베스 제인스를 보고 있자, 외려 허탈한 웃음이 새 나왔을 정도로.

“데베르, 베스 양은 내게 긴히 할 말이 있어서 온 거야.”

아더는 데베르의 소유욕을 알았다.

늘 뺏기고 가지지 못한 자신과 달리, 쟁취하고 손에 쥐는 것이 삶의 방식인 데베르 클리프는 베스에 관해선 눈에 보이지 않는 비밀까지도 제가 다 틀어쥐어야 속이 후련할 것이다.

한편으론 우습기도 했다. 저렇게 날을 세운다는 건 결국 믿지 못한다는 방증이니까.

견고하지 못한 관계. 적어도 아더가 보는 둘의 관계는 그랬다.

“그리고.”

아더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미소 지었다.

소피아에게 가발을 건네줄 때 지금과 같은 얄팍한 수를 떠올리긴 했지만, 생각보다 결과가 괜찮았다.

“내가 비록 황제는 아니지만, 황족인 건 여전해. 그러니 착각하지 마. 전시상황도 아닌 지금, 내가 자네의 명령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럼, 베스 양도 이만.”

어느새 데베르의 곁에 서 있는 베스를 흘깃 본 아더는 미련 없이 핸들을 돌렸다.

점점 멀어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사이드미러로 쳐다보며 확신했다.

이번은 자신의 승리다.

데베르는 차 머리가 돌려지기 무섭게 베스의 손목을 낚아챘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베스의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새 나왔지만, 그는 귀라도 막힌 것처럼 베스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벌어진 보폭만큼이나 엇갈린 두 사람의 걸음 소리가 어지러이 텅 빈 거리에 퍼졌다.

“오해를-”

“입 다물어.”

데베르는 베스를 보지도 않고 답했다.

잔뜩 힘이 들어간 턱 근육이 움칠거릴 때마다, 짙은 잿빛 눈썹도 함께 찌푸려졌다. 바닥에 끌리는 듯한 여자의 구두 소리가 그의 예민한 성정을 더 곤두세웠다.

참다못한 베스가 매달리듯이 그의 팔을 붙잡았지만, 완력의 차이를 이길 수는 없었다.

“잠시만.”

그의 걸음이 향하는 곳이 간호 숙소라는 걸 깨달은 베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베스는 그때부터 기겁을 하며 그의 팔을 쳐댔다. 그러나 요지부동이긴 매한가지였다.

작정한 듯 숙소 문을 열고 들어가는 데베르를 막을 수 있는 건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다.

베스는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관리실을 살폈지만, 관리인은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불 꺼진 숙소 계단을 성큼성큼 오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릴수록 베스의 마음은 참담하게 구겨지고 있었다.

그의 걸음을 따르자 숙소 꼭대기 층까지도 순식간이었다.

방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베스의 몸이 물건처럼 침대 위로 던져졌다. 팔꿈치에 간신히 걸려있던 의료 가방은 방 한구석에 처박힌 채였다.

달칵. 낡은 문이 잠기는 소리였다.

“해 봐.”

커프스를 푸는 남자의 그림자가 유독 커다랗게 드리워졌다.

“변명이라도 해야지.”

엉망으로 풀어헤쳐진 머리카락 사이로 겁에 질린 여자의 눈동자가 보였다.

저기에 속아서 이 꼴이 난거지.

푸른 커프스가 아무렇게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저, 저는… 오늘 콜린스 교수님이 사고가 나서.”

더듬더듬 말을 뱉던 베스는 문득, 이 남자를 재회했던 전장의 숲길이 떠올랐다.

하릴없이 막막하고, 눈앞의 남자는 아득하게 높고, 두려움은 끝없이 범람하기만 하던 그때가.

“황궁 심부름이 있어서 갔는데… 사실 폐하가….”

“폐하가.”

“…시해당하실 뻔했어요. 그래서 제가 황자님께 알려드리려고, 제국법원은 휴정이고, 교수님도 상황이 좋지 못하셔서.”

말해선 안 되는 줄 안다. 이건 그야말로 비밀이니까.

유일하게 이 비밀을 해결할 수 있다 생각했던, 황제의 혈육인 아더조차 딴마음을 품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않았는가.

하지만 덮쳐오는 두려움 속에도 희미한 기대가 있었다. 혹시 이 남자는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 말이다.

“누군가 환각제를-”

“네가 그런 건 아니고?”

잠깐의 침묵이 맴돌았다.

베스는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네가 그런 거 아니냐고 묻잖아.”

언젠가 그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네게 장난친 적이 없다고.

그렇다면 지금 하는 말도….

“아니에요.”

당연한 말을 하는데도 목소리가 듣기 싫게 떨렸다.

“뭐,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면 그뿐이지.”

그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셔츠 단추를 풀었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베스의 몸이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래봤자 좁디좁은 침대 위에서 바르작거리는 것뿐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베르의 한쪽 입꼬리가 야살스럽게 휘어졌다.

“설마, 두려워?”

할 말을 찾지 못한 여자의 얼굴 위로 달빛이 쏟아졌다. 가릴 것 없이 감정이 드러나는 얼굴이 썩 마음에 들었다.

“왜. 사랑한다며.”

데베르는 느릿하게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낮은 침대 위에 앉은 여자의 눈과 데베르의 시선이 얼추 같은 위치에서 맞닿았다. 하지만 그게 같은 곳을 바라본다는 것은 아니었다.

“사랑하는데 어떻게 두렵지?”

그는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잔악스러운 장난이었다.

베스는 뻣뻣하게 굳어 있는 팔을 애써 움직여 그의 어깨를 밀었다. 그러나 겨우 그 정도 악력에 밀려날 남자가 아니었다.

예고 없이 남자의 몸이 제게로 기울어지자, 베스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맞닿을 뻔했던 그의 입술이 베스의 턱 언저리에서 멈추어 서자, 헛웃음 같은 약한 숨결이 귓가에 와닿았다.

“아, 두려운 게 아니라 더러운 건가.”

마디 굵은 손이 베스의 턱을 붙잡아 돌렸다. 그의 손안에 있는 가련한 여자가 떨고 있었다.

“…마세요.”

“착각하나 본데.”

데베르의 입술이 파리한 여자의 입술에 건조하게 맞닿았다 떨어졌다.

“우린 원래 이런 사이야. 네 입으로 그랬잖아. 스쳐 지나갈 욕정이라고.”

남자가 목덜미를 단단히 붙잡자 베스는 더 도망칠 곳도 없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제 몸을 눌러오는 남자의 욕정의 무게가 버거웠다.

가슴께에 달려있던 원피스 단추는 우습게 떨어져 나간 지 오래였다. 드러난 하얀 빗장뼈를 타고 남자의 입술이 끊임없이 아래로 내려가자 베스의 입술에선 울음 같은 애원이 새 나왔다.

“제발….”

작은 주먹이 그의 어깨를 때려도 이내 붙잡힐 뿐이었다.

고요한 숙소에서 누군가 깨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그 소음의 근거지가 여긴 걸 알기라도 한다면. 베스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찢겨나간 원피스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힘없는 슬립은 그의 무자비한 손 아래에서 아무렇게나 구겨졌다. 끊임없는 군사 훈련으로 단단해진 손마디가 예민한 정점을 쓸 때면 베스는 있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 남자는 여기서 끝을 보겠다고 마음먹었으니까.

예전보다 조금 더 마른 여자의 몸 위로 데베르의 몸이 겹쳤다. 목덜미의 여린 살결을 빨아들일 때마다 제 귓가에 들리는 밭은 숨이 그의 욕정을 더 부추겼다.

여자의 등허리를 은근하게 쓸던 손은 곧 슬립 끝자락 아래로 들어갔다.

“흑.”

삐걱대는 매트리스 위에서 그를 받아내던 베스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그것도 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해 끅끅 눌러 내리는 울음이었다. 적당한 쾌락과 수치심, 서운함 따위가 엉망으로 뒤섞인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데베르는 그제야 처음 전장에서 밤을 보냈을 때처럼 부드럽게 여자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러자 히끅거리던 울음도 점차 잦아들었다. 말갛게 물기 어린 눈동자는 그에겐 없는 다정함을 바라고 있었다.

그래, 넌 이런 걸 좋아했었지.

데베르의 눈동자가 깊이 저 아래 어딘가로 가라앉았다.

“네가 잘하는 말을 해 봐.”

베스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곧 제가 상처받을 거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사랑한다고. 혹시 알아? 또 속아줄지.”

한껏 열이 올라 발개진 입술이 몇 번 벙긋거렸지만, 이내 소리 없이 닫혔다.

데베르는 들려오는 목소리가 없는 그 입술을 몇 번 지분거리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차라리 말을 못 할 때가 더 나았다고 하면 어떤 얼굴을 할까. 또 지금처럼 상처받은 표정을 하겠지.

고집스럽게 입술을 깨문 여자는 그 어떤 동요도 더는 보여주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설핏 눈을 찌푸린 데베르는 주저 없이 맞닿은 아래를 쳐올렸다. 그의 허리 짓 한번엔 속절없이 무너지는 얼굴이 더없이 흡족했다.

데베르는 끈질기게 지켜봤다. 그의 그림자에 가려졌다가 하얀 달빛에 드러나기를 반복하는 베스의 얼굴을. 그리고 이 여체를 점령한 게 자신이라는 더러운 정복감을.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서늘한 밤바람도 식히지 못할 열기는 그렇게, 새벽이 깊어갈 때까지 이어졌다.

* * *

베스가 눈을 떴을 땐 이미 데베르가 사라진 뒤였다.

순간적으로 꿈이었나 싶을 만큼 간밤은 현실감이 없었다. 하지만 울혈이 낭자한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울음이며 신음을 온통 삼켜내느라 잔뜩 힘을 줬던 목구멍 또한 한없이 까칠했다.

남은 흔적을 지우고 겨우 옷을 주워 입으려는데, 갑자기 창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빨리!”

“전부 나와!”

“제국 병원 소속은 지금 당장 병원으로 와주세요!”

무슨 일인가 싶어 창문을 열자마자 보인 건 일찍이 간호사를 그만둔 딕시였다. 그녀는 누구보다 열심히 사람들을 재촉하고 있었다.

딕시가 여기에 왜.

“어?! 베스! 빨리 내려와! 급해!”

뒤늦게 베스를 발견한 딕시가 한껏 목청을 높였다.

늘 장난기로 상기돼 있던 얼굴이 오늘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지금 콜린스 교수님이 경관한테 잡혀가고 계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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