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잠시였다.
아주 찰나의 순간,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베스의 몸은 저 뒤로 나동그라져 있었다. 여전히 제 앞엔 커다란 수송 차량이 시야를 가린 상태였다.
베스의 시선이 천천히 왼편으로 향했다.
“들것을 가져와!”
“콜린스 교수님!”
“이봐, 당신 미친 거야?!”
“브, 브레이크가 대체 왜…!”
사방은 아수라장이었다.
흙바닥에 점점이 찍힌 선명한 핏자국이 상황을 설명했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베스가 볼 수 있는 건, 수송 차량과 바닥 사이에 반쯤 보이는 피 묻은 팔 뿐이었다.
“여, 여보….”
희미한 중얼거림에 뒤를 돌아보자, 몰리 부인이 베스와 똑같은 모습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베스는 그제야 차에 치이기 직전, 자신을 끌어당긴 이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부인은 들것에 실려 가는 제 남편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늘 냉철하다 싶을 정도로 강단 있던 몰리 부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무너져내린 모습이었다.
근처에 서 있던 간호사들이 얼른 부인을 부축했다.
“베스! 괜찮니?”
아이네스는 베스를 안아 일으켰다.
그 사이, 콜린스는 벌써 일꾼들이 든 들것에 실려 병원 안으로 빠르게 이송되고 있었다.
베스는 절뚝거리며 병원 안으로 들어서다 말고 뒤를 한번 돌아봤다. 좀 전의 난장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자리엔 둥그런 피 웅덩이만이 남아 있었다.
이른 아침의 평화가 깨지는 데는 단 몇 초면 충분했다.
* * *
수술실은 부인을 대신해 아이네스가 들어갔다.
베스는 병원장을 대신해 수간호사로서 남은 의료봉사단을 지휘했다. 다들 처음 하는 의료봉사도 아니었고, 오랜 시간 합을 맞춰온 바든도 콜린스를 대신해 출발할 준비를 마친 터였다.
“동요하지 마세요.”
베스는 시동이 걸린 차 앞에 섰다. 그녀가 밟고 있는 자리엔 아직 지워지지 않은 콜린스의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콜린스 교수님은 무사히 수술을 마치실 거고, 우린 우리의 일을 해야 해요. 그게, 여러분이 가슴팍에 달고 있는 넥서스 제국 병원 브로치의 무게니까요.”
나직한 베스의 목소리는 몰리 부인과는 또 다른 무게감이 있었다.
처음 이런 사고를 본 신참들의 눈엔 베스에 대한 동경이, 전장 병원을 함께 했던 이들의 눈엔 신뢰가 묻어났다.
내게 자격이 있나.
베스는 분에 넘치는 신망이 죄스러워 잠시 시선을 떨구었다.
“저는 콜린스 교수님이 따로 부탁하신 게 있어 함께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여러분들은 잘 해내시리라 믿어요.”
마지막 격려를 뱉으며 베스의 입매가 괜찮은 척, 호선을 그렸다. 마치 콜린스 교수의 핏자국을 밟고 있는 만큼 그의 책임감을 넘겨받기라도 한 것처럼.
베스는 의료진들을 태운 수송 차량이 떠나고, 마지막 짐마차가 길 너머로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콜린스는 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 뼈가 끊어지는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베스를 불렀다.
‘가, 가지 말고 여기 있….’
차마 말을 맺지도 못하고 기절했지만, 베스는 충분히 그의 말을 알아들은 터였다.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다.
전에 없는 고요가 맴도는 복도에 노란 아침 햇살이 드리워지고, 정오의 뜨거운 햇볕이 지나갈 때까지 나란히 앉은 부인과 베스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때론 침묵이 더 나은 위로를 전하기도 하는 법이다.
마침내 수술실 문이 열린 건, 느지막한 오후 무렵이었다.
“왼쪽 허벅다리부터 허리께까지가 길게 찢어져서 출혈이 심하긴 했지만, 다행히 큰 내장 손상은 없었습니다. 다리 한쪽이 바퀴에 짓뭉개지신 것 빼고는 금방 회복하실 거예요.”
“세상에.”
비틀거리는 몰리 부인을 베스가 얼른 붙잡았다.
제국 병원을 드나드는 수송 차량은 본래 군용차였다. 전시에 사용되는 군용차가 전속력으로 달려와 사람 하나를 친 것치곤 다행이라 할만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게 정말 괜찮을 리가 있을까.
그렇게 또다시 시간이 흘러갔다.
해가 질 무렵이 돼서야 콜린스는 마취에서 깨어났다. 그가 눈을 뜨자마자 찾은 건 몰리 부인이었다. 그러나 콜린스는 눈치껏 사라지려는 베스를 손짓으로 불렀다. 베스는 고개를 끄덕이곤, 몰리 부부를 위해 잠깐 병실 밖으로 나갔다.
몰리 부인은 남편의 입술 근처에 귀를 갖다 댔다. 무어라 콜린스의 입술이 달싹일수록 부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러다 화를 내는 듯이 벌떡 허리를 곧추세워 무슨 말인가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표정은 착잡하게 굳어졌다. 얼핏 베스와 눈이 마주치려는 순간, 먼저 시선을 피한 건 부인이었다.
납득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제 부인의 손을 콜린스가 몇 번 토닥이자, 결국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스. 들어가 보렴.”
병실 밖으로 나온 몰리 부인이 애써 미소 짓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어서.”
부인은 망설이는 베스를 병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주춤거리며 다가오는 베스를 향해 이번엔 콜린스가 빙긋이 웃었다.
“미리 요단강 한 번 보고 왔지 뭐냐.”
그는 농을 뱉으면서도 옆구리가 쑤신 지 콧잔등을 찌푸렸다. 붕대에 둘둘 말린 한쪽 다리는 천장에 매달린 끈에 고정되어 있었다.
“내가 널 이리 부른 건 따로 부탁할 게 있어서란다.”
갑작스러운 말에 울상이던 베스의 눈이 조금 커졌다.
콜린스는 닫힌 병실 문을 한 번 쳐다보곤 목소리를 더 낮췄다. 그의 눈빛에 돌연 진지한 기색이 비쳤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베스 넌, 내가 폐하의 비공식적인 주치의 역할을 한다는 걸 알고 있을 거다. 맞지?”
베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연찮게 하워드 백작이 폐하와 비슷한 병변을 앓고 있으니까. 의료품 수입 목록만 봐도 폐하의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건 눈치챘을 거야.”
무언은 곧 동의였다.
“원래라면 오늘 밤에도 나는 코펠에서 돌아온 즉시 황궁으로 가야 한단다. 그런데, 보다시피 이 난리가 났지 뭐냐. 하지만 오늘 반드시 폐하를 봬야 해.”
차마 간밤에 황제가 섬망에 찌들어 패악을 부리다, 남은 완화제 전부를 벽난로에 던졌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폐하의 병환이 깊어진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졌을지언정, 그분께서 섬망을 헤매신다는 것은 절대 함구해야 할 사항이다. 이 비밀을 믿고 맡길만한 사람은 너와 아이네스 둘뿐이고.”
“황궁은 저보단 아이네스가-”
“아이네스는 폐하를 뵌 적이 있어. 그게 그 아이가 갈 수 없는 이유야.”
병든 제 모습을 견디지 못해 정신까지 혼란해진 황제였다. 그런 이가, 기억 속의 귀족 영애를 간호사로 만난다면 어떤 사달이 나겠는가.
오랜 시간 웨인의 명망 있는 백작가 영애인 아이네스와 달리, 갑자기 양녀로 등장한 베스는 호이든이 제대로 알지 못했다.
베스를 이리 패처럼 쓴다는 게 영 속이 쓰렸지만, 별다른 뾰족한 수도 없었다.
어차피 단 한 번이다.
“제가 뭘 하면 되죠?”
베스는 그의 바람대로 영리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간단한 일이니 걱정 말렴.”
이어지는 콜린스의 설명이 적막한 병실을 채우기 시작했다.
베스가 병원을 나섰을 땐 이미 거리엔 완연한 어둠이 내려앉은 시각이었다.
콜린스는 반드시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 가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이렇든 저렇든 주치의가 아닌 제국 병원 인사가 황궁을 드나드는 걸 보여서 좋을 건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으니까.
베스는 부지런히 걸음을 놀렸다. 대여 마차를 타긴 했으나, 황궁 정문 앞이 아닌 근처 살롱 앞에서 내렸다. 간호복이 아닌 평범한 외출복을 입은 베스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안 됩니다.”
보초병은 허름한 가방을 옆에 멘 베스를 보자마자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더 볼 필요도 없다는 태도였다.
베스는 콜린스가 건네준 통행 증서를 내밀었다. 거기엔 황제의 직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러나 보초병은 그걸 보고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은 어떤 누구도 출입을 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통행 증서가 있더라도요.”
“폐하를.”
더 할 말을 찾지 못한 입술이 공연히 뻐끔거렸다.
‘비밀’이라는 전제 조건이 붙으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실랑이를 할수록 시간만 지체될 뿐인데. 마음이 초조해졌다.
“아마, 예외가 있을 거예요. 확인해 주세요.”
“거참, 아더 황자님의 명입니다.”
“그럼 황자님을 뵙겠습니다.”
“웃기는 아가씨네. 황족이 무슨 골목 개새끼요? 보고 싶다고 보게. 돌아가시오!”
“골목 개새끼…?”
뜻밖의 목소리는 보초병의 뒤에서 들려왔다.
시커먼 인영을 알아본 보초병이 기겁을 하며 목을 빳빳이 세웠다.
여자…? 황궁에서 나올 수 있는 여자라면….
“오랜만이네요. 하워드 양.”
라프넬은 오늘도 칼론과의 밀회를 위해 궁을 나서던 참이었다.
때마침 아더도 온종일 황궁을 비워, 좀 더 홀가분하게 나서려던 참에 이런 불청객이라니.
베스의 손에 들린 통행증과 옆에 싸맨 의료 가방을 보자 대충 감이 잡혔다.
“들여보내.”
“하지만, 아더 황자님이-”
“들여, 보내.”
방점에 실린 경고를 못 알아들을 황궁 보초병은 없었다.
베스와 라프넬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감사-”
“넌 어째 제인스일 때보다 하워드가 되고 나서 더 꼴이 말이 아니구나.”
라프넬은 제법 단단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던 베스의 입술을 일별하곤 마차에 다시 올랐다. 말발굽 소리가 멀어지자, 베스도 공주의 반대편으로 가던 길을 마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불쌍한 계집애.” 얼핏 그런 말이 들린 것도 같았다.
* * *
“으아아아악!”
황제 궁의 로비로 들어서자마자 비명이 복도를 타고 울려 퍼졌다. 뛰어가는 시종들 속엔 베스도 뒤섞여 있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괴성은 침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중이었다.
와장창. 침실 문을 열자마자, 베스의 관자놀이를 아슬아슬하게 스친 재떨이가 벽에 부딪혀 박살 났다. 크리스털이 부서지는 파열음과 함께 발작하는 황제가 보였다.
침대 위에 앉은 그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입가의 허연 포말과 까뒤집힌 눈은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양쪽을 잡아 주세요!”
“근데, 당신은 누구-”
“얼른!”
단호한 명령에 엉겁결에 시종 둘이 호이든의 양팔을 붙잡았다.
라이터를 들고 환자의 동공을 확인하던 베스의 눈이 일순 가늘어졌다. 이건 단순 섬망이 아니다. 필시 약물에 의한 반응.
호이든을 살피던 베스의 눈길이 이번엔 침대맡으로 떨어졌다. 거기엔 반쯤 비워진 주사기가 널브러져 있었다.
분명 없어야 할 완화제의 존재. 황제의 갑작스런 약물 반응과 발작. 눈에 띄게 떨어대는 주치의.
설마.
가방을 뒤져 조막만 한 시험지를 꺼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독초 성분을 확인할 수 있는 시험지였다.
똑.
주사기의 남은 한 방울이 시험지 위로 떨어졌다.
제 추측이 맞을 것이란 확신과, 맞았을 때 닥쳐올 두려움이 어지럽게 섞였다.
그리고 이내, 그 상념을 닮은 짙은 자주색이 하얀 시험지를 덮기 시작했다.
그 의미를 아는 주치의만이 힉, 숨을 들이켤 뿐이었다.
“누가….”
주위를 둘러보는 베스의 눈동자가 의구심으로 흔들렸다.
“대체 누가 여기에 불순물을 탔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