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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31화 (131/206)

131화

이제 겨우 여명의 끄트머리가 보이는 무렵. 클리프 저택 응접실엔 초대받지 않은 손님 하나가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봤는데 인사라도 해 줘 봐.”

아더는 태연자약하게 걸어오는 데베르를 향해 장난스레 농을 던졌지만,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어차피 기대한 바도 아니었다.

“불청객이군.”

데베르는 대수롭지 않게 맞은편 소파에 걸터앉았다. 굳은 표정에서 피로감이 언뜻 보이긴 했지만, 기민한 눈동자는 느슨해지는 기색이 없었다.

“남의 사유지에 함부로 발을 들이면 제국법에 위배될 텐데.”

“황제의 소환에 불응하는 것도 제국법에 위배되는 건 마찬가지지.”

아더는 매끄럽게 응수했다.

어찌 보면 데베르 클리프를 가장 오래 옆에서 봐온 이가 바로 아더 메이너였다. 이런 상황에서의 적당한 능글거림은 이미 익숙했다.

“자네가 나를 친우로 반기지 않는다면, 나는 황제의 대리인으로서 충성 맹세에 저촉한 공작을 잡으러 왔다고 하겠어.”

“군대장을 사임하면 맹세 조약은 자연히 소멸한단 걸 모를 줄이야.”

“아직 넥서스의 군대장이 없는 상황에선, 전 군대장에게 미약한 책임 요소가 남는다는 사실을 네가 모르는 거겠지.”

꼬리를 잡는 말장난에 데베르가 설핏 인상을 찌푸리자, 아더는 어깨를 으쓱했다.

“일종의 ‘잔흔’ 같은 거랄까.”

“…잔흔이라. 그럴듯하네.”

군대장은 데베르의 정체성이나 마찬가지였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를 위해 길러졌고, 훈련받았고, 맹목적으로 생사의 바닥을 뒹굴었다.

그 견고한 틀을 깨부순 건 생각보다 작은 틈이었다. 정확히는 그 틈을 파고든 베스 제인스였고.

처음 맛보는 사탕에 넋이 나간 아이처럼 데베르는 자신이 잠시간 눈이 멀었음을 인정했다. 그 결과, 봐야 할 걸 보지 못했고, 믿지 않아야 할 걸 믿었다.

모두 제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의 대가는 혼란이었다.

모든 혼란이 잠잠해지고 숨겨졌던 진실이 뚜렷해지는 지금에서야, 그는 본래의 데베르 클리프로 돌아가고 있었다.

모두가 아는 그 클리프 공작으로.

“황제의 대리인으로서 물을 테니 똑바로 답해줬으면 해.”

아더의 얼굴에 그때까지만 해도 희미하게 남아 있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젠 확인해야 했다.

데베르 클리프는 양날의 검인지, 아니면 한 곳만을 겨누는 단일한 검인지.

“자넬, 믿어도 되나.”

아더는 사령관 노릇을 할 때처럼 침착하게 상대를 살폈다. 비록 그 상대가 속을 알 수 없는 데베르라 할지라도 말이다.

데베르는 의연하게 답했다.

“내게 전 군대장의 잔흔이 남아 있다면, 다 죽어가는 호이든을 향한 충성은 믿음 정도론 부족하지. 충성 맹세는 목숨을 담보로 한 거니까.”

“그렇다면.”

한 음절씩 끊듯이 말하는 아더의 턱 근육이 미세하게 솟아올랐다.

“차기 황위 계승자로서 묻지.”

푸른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내가 널, 믿어도 될까.”

잠깐의 침묵이 테이블 위로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내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의 질문이었다.

“아더 메이너가 차기 황제란 뜻인가.”

“…….”

통창 너머의 새벽빛이 데베르의 얼굴 위로도 내려앉았다. 그 탓에 안 그래도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의 얼굴이 한층 더 서늘하게 드러났다.

“호이든처럼 날로 먹겠다는 소리로 들리네.”

그 말을 뱉으며 미미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섬뜩했다. 의중을 알 수 없어 더욱 그랬다.

팔걸이를 쥔 아더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데베르는 차기 황제를 탐하는 잘난 황자이자, 동시에 저를 경계하는 아더를 가만히 응시했다.

‘얼마 전부터 자정쯤이 되면 간호 숙소에서 검은 머리칼을 가진 간호사 한 명이 아더 황자님과 접선을 하고 있습니다.’

‘얼굴은.’

‘요즘 전력 공급이 원활치 못해 가로등이 꺼져서 얼굴은….’

“접선일지 밀회일지는 모르는 일이지….”

데베르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제 입술을 쓸었다.

사람을 앞에 두고 대놓고 딴생각하는 듯한 그의 태도에, 아더의 얼굴엔 약한 모멸감이 스쳤다.

하지만 데베르는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아더 메이너만을 떠올리며 그의 정치적인 가치를 뜯어보는 중이었다.

아더 메이너의 지지 세력은 당연히 브리틴일 것이다. 무능한 호이든 탓에 지난 시간 별다른 이득을 취하지 못한 브리틴의 야심이 아더를 향했으리란 건 불 보듯 뻔했다. 한미한 귀족일지언정, 브리틴 출신인 그의 어머니가 꽤 괜찮은 명분이 되어주었겠지.

브리틴….

첩자인 베스 제인스가 적을 두고 있는 곳.

데베르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클리프가는 넥서스의 법도를 따른다.’ 단지 그뿐, 이제껏 다른 저의는 없었어. 그런 의미에서 아더 네 질문엔 오류가 있지.”

해가 점점 밝아오고 있었다.

응접실 깊숙이 들어오는 빛 한줄기가 꼭 칼날처럼 두 사람의 사이를 베었다.

“클리프는 황제에게 충성하지, 황제가 되고 싶은 자에게 충성하지 않아.”

삐뚜름한 데베르의 비소를 따라, 아더의 얼굴에도 더는 감추지 못할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 충성이 필요하면 황제가 되면 돼. 명료하지 않나?”

“데베르.”

“그것 하나 제힘으로 하지 못해, 이것저것 끄나풀을 모으고 싶은 거라면…. 글쎄. 자격이 없는 거겠지.”

“말조심해, 클리프 공작.”

“차기 황제를 노린다면 자네도 처신 똑바로 해.”

잿빛 눈동자가 더없이 차갑게 번뜩였다.

처음으로 드러난 감정이었다.

“남의 약혼녀에게 눈독 들이는 천박한 짓 그만하고.”

“…뭐?”

“알고도 모른 척하다 지금에서야 말한다는 건, 거슬린다는 의미겠지. 내가.”

흔들리는 아더의 눈빛을 보자, 데베르는 이 꼴같잖은 상황이 더욱 아득하게 느껴졌다.

더럽게 붙어먹는 브리틴 놈들이라니.

“베스 제인스든, 베스 하워드든, 하물며 베스 클리프까지. 거기에 네 몫은 없어.”

데베르가 쐐기를 박자, 아더는 헛웃음을 지었다.

“하. 기가 막히는군.”

눈독, 눈독이라. 저조차도 정의하지 못한 감정이 겨우 눈독이었다니.

애매한 선을 넘지 않기 위해 제 나름대로 한참을 궁리하고, 망설였던 날들이 우스워지는 순간이었다.

“약속이 얼마나 무의미한 건지는 데베르 네가 가장 잘 알 텐데. 그 여잔 네 곁엔 있겠다 해놓고도 도망갔었잖아?”

반격은 공격에 대한 본능이었다.

방금, 무너진 품위의 대가로 데베르의 약점을 얻었다. 막연히 그가 베스에게 약하다고 생각했을 때와 지금은 미묘하게 달랐다.

현재, 베스는 데베르의 역린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데베르 클리프가 제 편이 아니라면, 망설일 것 없이 흔들어야만 했다. 그게 살아남는 길이라고 아더는 자위했다.

“그래서 꽤 뼈를 치며 통감하는 중이야. 그때 날개를 잘라버렸어야 했다고 자책하면서.”

데베르는 가볍게 대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그는 이른 새벽부터 완벽한 정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이만 일어나지. 내가 일찍부터 선약이 있어서.”

아더는 먼저 응접실을 나선 데베르가 반대편 복도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봤다.

오랜 친우가 등을 돌린 순간이었다. 동시에 아더 자신도 등을 돌린 순간이었다.

* * *

커튼 없는 창을 타고 푸르스름한 여명이 새들어왔다.

베스는 생명 없는 조각상처럼 침대맡에 앉아 있었다. 한쪽 손엔 카시우스의 편지가, 반대편엔 하워드가 준 권총이 들려 있는 모양새는 어딘지 기묘했다.

카시우스의 필체는 데베르와 거의 흡사했으나, 마지막 글자의 삐침이 조금 달랐다. 오랜 시간 색이 바랜 종이 위에 문신처럼 스며든 잉크는 제아무리 쓸만한 필체 흉내쟁이가 온다 해도 따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고로, 이 편지는 카시우스가 하워드에게 보낸 것이 맞다.

이 짧은 결론을 가지고, 베스는 밤새 고민했다.

이제껏 베스의 적은 분명했다. 올리비아를 그렇게 만든 범인이 확실했으니까.

그래서 오히려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하워드와 그 세력만 껴안고 나락으로 떨어지면 될 일이었다. 이기적일지언정 데베르와의 남은 시간은 저 홀로라도 사랑으로만 쌓고 끝맺으려 했다.

그런데, 왜 하워드의 곁에서 그 남자의 가문이 나온 걸까.

베스는 창문에 희끄무레하게 비치는 제 얼굴을 쳐다봤다. 첩자라기엔 멍청하지만, 순수한 약혼녀라기엔 영악한 얼굴.

‘행여 공작이 너와 사랑놀음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속아선 안 돼.’

이 얼굴을 보고도 과연 그 남자가 속았을까.

“베스, 일어났니? 곧 출발이야.”

아이네스가 닫힌 문을 두드렸다.

베스는 대답 대신, 근처 손 닿는 곳에 튀어나온 나무 골조를 탁탁 쳤다. 말을 하지 못할 때 하던 버릇이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와 놀라기도 잠시, 아이네스의 대답이 들려왔다.

“삼십 분밖에 안 남았어. 먼저 내려가 있을게.”

아이네스는 문 너머로 건너오는 무언의 대답을 잘 알아들었다.

바깥은 벌써부터 도착한 수송 차량과 짐마차로 소란스러웠다. 부지런히 계단을 내려가는 간호사들의 발소리가 이른 아침을 깨웠다.

본래라면 베스도 코펠 의료봉사단에 합류할 예정이었다. 그것도 432-19에 있는 정신 요양병원으로.

하지만, 베스는 불현듯 스친 생각에 급히 간호복을 벗었다.

지금은 가선 안 돼.

루카가 갑자기 그 사달이 난 것도 제 아가씨를 위해 코펠에 남몰래 갔다 온 밤이 시작이었다. 뜻 모를 번트의 첩자 얘기를 하던 데베르도, 심지어 이 의료봉사를 지원하는 게 그 남자라는 것도, 오늘만큼은 꺼림칙했다.

제 정체를 들키는 건 두렵지 않았다.

베스가 두려워하는 건, 올리비아의 과거 정체를 들키는 것이었다.

넥서스는 첩자를 처벌하는 데엔 공소시효가 없다. 그 말인즉슨 언제라도 첩자였단 사실이 밝혀지면 사형을 면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럴 순 없어….”

인제 와서 불쌍한 제 어머니를 사형이나 당하게 하려고 그 지난한 세월을 버틴 게 아니었다.

“재판을 당겨야 해.”

카시우스의 편지가 불안의 촉매제가 되어 가슴을 두방망이질했다.

꼬마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금, 소식지로 추문을 일으키고 이목을 모을 시간 따윈 없었다. 올리비아와 베스의 혈연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건 베스 자신과 하워드의 기억 외엔 어떤 것도 없으니, 누가 되었건 올리비아의 정체를 알게 되기 전에 이 일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베스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밀서가 든 가방을 들쳐메고 숙소를 뛰쳐나갔다.

“콜린-”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콜린스에게 의료봉사를 함께 갈 수 없겠다고 말하려는 순간.

“꺄악!”

“멈춰! 멈추라고!”

폭발하는 듯한 파열음과 함께 시야가 새카맣게 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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