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후들대는 다리를 옮겨 금고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철컥. 아귀가 맞은 열쇠가 옆으로 돌아가자마자, 급히 시계부터 확인했다.
남은 시간은 십 오 분. 뒷정리까지 하려면 실제론 십 분 남짓.
베스의 손이 조급해졌다.
금고 안엔 하워드 가문의 갖은 무역증서와 계약서 따위가 들어 있었다. 합법적인 것들은 베스가 찾는 것이 아니었다.
분명 있을 거야. 뻗어 넣은 손이 길쭉한 금고 안을 훑을 때였다. 사면이 매끈한 철제로 덮여 있는 금고 천장에서 이질적인 촉감이 전해졌다. 손톱을 세워 천장의 거칠한 가장자리를 뜯자, 얇은 서류 봉투 한 장이 떨어졌다.
봉투를 뒤집어 털기가 무섭게 브리틴어로 쓰인 계약서들이 우수수 바닥으로 흩어졌다. 쿵쿵거리는 심장 고동은 어느새 턱 끝까지 와 있었다.
코바흐를 통해 들어온 밀수품 목록, 개발 중인 각종 무기류, 브리틴 비밀 계좌 등…. 하워드의 더러운 이면이 담긴 증거들은 넘쳐났다.
베스는 얼핏 서재 한구석에 놓인 타자기를 쳐다봤다. 사본을 타이핑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시간이 없었다. 잠깐의 고민을 거듭하던 베스는 결심한 듯 테이블 위의 빈 종이 몇 장을 가져와 봉투에 채워 넣었다.
기회를 잡았을 때 놓쳐서는 안 된다. 어차피 곧 모든 게 끝날 텐데.
하워드의 서류는 의료 가방 속, 따로 가죽을 뜯어내 만든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다 오늘을 위한 준비였다. 자꾸만 손이 미끄러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젠 육 분.
등줄기에도 차가운 땀 줄기가 흘러내렸다.
다행히 의자 위에 쓰러지듯 잠든 하워드는 미동도 없었다.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봉투를 들어 올리는데, 실수로 봉하지 않은 봉투 입구에서 작은 종이 하나가 떨어졌다. 반으로 접힌 종이는 다른 계약서 종이들보다 확연히 작았고, 세월도 오래됐는지 누렇게 변질되어 있었다.
편지인가.
무시하고 지나쳐도 될 그 낡은 종이를 펼쳐본 건, 어떠한 직감이었다.
자신이 모르는 어떤 비밀이 있을 것만 같다는 그런 불길한 직감.
[아이가 있다.]
온통 브리틴어 뿐인 하워드의 밀서 속에서 유일한 넥서스어라니. 불안스레 밑으로 내려가던 베스의 눈동자가 한 곳에서 멈추었다. 작게 내쉬던 숨도 함께였다.
“클….”
익숙한 필체의 서명이 낙인처럼 심장에 박혔다.
“으윽… 무슨, 흐윽.”
하워드의 뜻 모를 중얼거림에 베스는 퍼뜩 뒤를 돌아봤다. 약효가 떨어지고 있단 방증이었다.
누가 볼세라 편지는 황급히 구겨 제 가슴께에 욱여넣었다. 얼른 서류를 봉해 금고 천장에 붙이고, 책장을 정리했다. 의식 없이 침대 위에 뻗어 있는 하워드 부인의 목걸이에도 열쇠를 다시 집어넣고, 목 끝까지 단추를 잠갔다.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땀에 젖은 이마를 쓸어내린 베스는 얌전히 하워드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가방 안주머니의 해독제를 꺼내는 손이 또다시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
해독제를 하워드의 팔에 찔러 넣으며, 베스는 입버릇처럼 속삭였다.
이십 분을 다 채우기엔 위험 요소가 크다. 최악의 경우, 환각제에 내성이 없는 하워드가 깨어나 토악질이라도 하면 일이 틀어지는 건 순식간이니까.
“으윽.”
“정신이 드세요?”
그래서 선수를 칠 요량이었다.
“많이 피로하셨는지, 잠시 경미한 쇼크가 온 것 같아요.”
혼란스런 머릿속과 달리 입 밖으로 나오는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태연한 척 숨을 골라도 편지가 닿는 심장께는 거세게 뜀박질하고 있었다.
벌건 하워드의 눈동자가 의뭉스럽게 베스를 곁눈질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의료 가방을 정리했다. 빈 약병을 챙기는 척 무심하게 가죽 덮개까지 덮자, 살짝 보이던 밀서 끄트머리도 완벽하게 가려졌다.
“폐하…께서도 같은 증상을 겪으신다고 들었습니다. 완화제가 치료제는 아니다 보니 부작용이 생긴 것이라고 콜린스 교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거짓말이었다.
콜린스는 황제의 병환에 대해선 입도 뻥긋한 적이 없었다. 다만, 수간호사인 베스와 아이네스만이 요즘 들어 방문 간호가 잦아진 콜린스를 보며, 남몰래 황궁으로 가겠거니 짐작할 뿐이었다.
어쨌건 황제와 콜린스를 들먹이자 하워드의 기세도 제법 누그러졌다.
“내일 아침에 코펠로 의료봉사를 떠나야 해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역병 핑계로 어미를 봐서 좋겠군.”
차라리 묻고 싶었다.
어째서 클리프 공작의 편지가 당신에게 있는지.
아이가 있다는 말이, 혹시 베스 자신을 말하는 것인지.
그렇다면 그녀의 어미를 저렇게 만든 이는 브리틴뿐만이 아니란 말인데, 제 끔찍한 추측이 맞는지.
“…제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잖아요.”
카시우스 클리프. 아직도 그를 떠올리면 비릿한 쇳내가 맡아졌다. 그건 피 냄새였다.
제 자식마저 짐승 새끼처럼 보호구역으로 끌고 들어온 잔혹한 소문의 공작. 그 고압적이고 날 선 눈동자가 눈에 선했다.
만약 그런 남자가 올리비아의 정체를 알았다면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데베르 공작도 그리 말하지 않았는가. 제 아버지는 첩자인 하녀를 모두가 볼 수 있게 번트의 언덕에서 태웠다고.
게다가 보호구역에 들어가기 전, 남작가에 살던 어린 베스의 기억 속에 카시우스는 없었다.
“결혼식이 얼마 안 남았더구나.”
대체 누가, 누구의 편인 거지.
베일이 벗겨질수록 드러나는 건 희미하기만 했다.
“우리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당장 이 서재라도 벗어나고 싶어 등을 돌리려는 찰나. 하워드의 경고가 그녀를 붙잡았다.
“조심해라.”
늘 날 서 있는 백작의 음성 같지 않았다.
베스는 뒤돌지 않은 채, 이어지는 그의 말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클리프 놈들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독종이야.”
그답지 않게 전해지는 망설임이 베스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짐승은 아직 배가 부를 땐 사냥감을 죽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냥감과 놀지.”
자리에서 일어난 하워드가 테이블 서랍을 열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려 퍼졌다.
“행여 공작이 너와 사랑놀음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속아선 안 돼. 그놈은 너의 존재를 알아채더라도 바로 죽이지 않을 거다.”
베스는 제 뒤로 다가오는 절뚝거리는 발걸음 소리에 숨을 죽였다.
하워드의 얼굴보다 먼저 그녀에게 고개를 들이민 건 차가운 총부리였다. 한 손에도 넉넉히 들어올 만큼 작은 권총은 단거리용이었다.
이젠 정말. 끝이 보였다.
“네 절망을 기어코 봐야 할 테니까.”
* * *
아더가 차에 올라탐과 동시에, 후원 구석의 작은 그림자 또한 재빠르게 어딘가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림자는 라프넬이 있는 별궁으로 향했다. 아더의 궁에서 별궁까지 대번에 가로지르는 게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그림자가 별궁 안으로 들어서자, 하녀들이 쓰는 흰 머리쓰개가 불빛에 드러났다.
그녀는 익숙하게 라프넬의 침실 문을 두드렸다.
“벨입니다.”
“들어와.”
문이 열린 곳엔 거적때기 같은 로브를 뒤집어쓴 라프넬이 앉아있었다.
“황자님께선 방금 황궁을 비우셨습니다.”
“다행이네.”
밤낮없이 바쁜 아더의 행방이 라프넬에겐 큰 행운이었다. 더불어 벨이 알아서 라프넬이 빠져나갈 길목에 있는 하녀들을 치운 덕분에, 공주의 밀회를 목격할 사람도 없었다.
라프넬은 미리 준비된 짐마차를 타고 황궁을 벗어났다. 오늘만큼은 황제의 병환에 근신한다는 이유로 온통 불이 꺼진 제 정원이 기껍기만 했다.
“서둘러.”
짐마차는 부지런히 웨인의 외곽을 향해 달려갔다. 웨인의 화려한 밤 풍경이 사그라들수록, 라프넬은 미묘한 긴장감에 얼굴을 굳혔다. 그러나 마침내 마차가 멈추어 서고 그 앞에 있는 허름한 여관을 보자, 반사적으로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습관적인 행위였지만 로브에 가려져 있다는 게 아까울 만큼 해사한 미소였다.
말없이 여관으로 들어서는 라프넬을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실제로 그 안엔 그 어떤 사람의 기척도 없었다.
라프넬은 더욱 깊숙이 들어갔다.
그리고 곧 짐승의 배 속 같은 어둠 속에서 커다란 손이 훅 튀어나왔다.
“읏.”
그 손은 당연하다는 듯이 라프넬의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숫제 사냥감의 목덜미를 잡아채는 손길이었다.
“오늘도 예쁘네, 라프넬.”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며 나타난 칼론이 한쪽 입꼬리를 길게 올렸다.
“몸이 달아 죽는 줄 알았어.”
“잠깐.”
자연스레 로브를 벗기는 우악스런 손을 라프넬이 붙잡았다. 칼론보다 한참 작았지만, 쏘아보는 눈길은 표독스럽기 그지없었다.
“편지 속의 말. 믿을만하니.”
“무슨 말? 내가 네게 반했다는 말?”
능글맞게 구는 칼론의 대꾸에 라프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건방 떨지 말라고 했을 텐데.”
“왜 이렇게 쌀쌀맞게 굴어. 서운하게.”
잠시 눈썹을 일그러뜨린 칼론은 무슨 그런 소릴 하냐는 듯 야살스럽게 고개를 비틀었다.
어둠 속에서도 짙은 적안의 안광이 형형했다.
“내겐 중요해. 넥서스에 다시 전쟁이 일어날지, 말지는. 그게 아니라면 너 따위와 마주 볼 이유는 없어.”
“믿지 못하겠나 봐?”
칼론은 라프넬의 입술을 벌렸다.
붉고 작은 입속을 훑는 눈이 정염으로 번들거렸다. 그러다, 제가 뭐라도 되는 듯이 오만한 얼굴을 한 공주를 보곤 피식 웃었다.
“넌 내 옆에만 있으면 넥서스에서 가장 높은 여자가 될 거야. 장담해.”
“…그 말. 지켜야 할 거야.”
“아무렴. 공주님께 하는 말인데.”
거친 손이 라프넬의 금발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제국의 장미라 불리는 여자가 지금은 그의 손길 아래에 있다는 게 못 견디게 흡족했다.
뻣뻣하리만치 곧기만 하던 공작의 여자보다는 이쪽이 훨씬 구미에 당기는 걸 어쩌겠는가. 발밑을 기는 척하다 목줄을 쥐는 것도 재밌는 노릇일 것이다. 그럼, 저 새파란 눈동자는 겁에 질려 울겠지.
후미진 여관에 발을 들인 그녀는 밤에 핀 황금빛 장미 같았다. 얼마든지 꺾어버릴 수 있지만, 막상 꺾자니 조금은 아까운 그런 장미 말이다.
칼론은 지금을 즐기기로 했다.
“브리틴의 군대장은 한 번 정한 주군을 배신하진 않지.”
“날 배신하지 않는다는 건-”
“곧 있을 전쟁에서 내가 승전해야만 한다는 뜻이고.”
밀어를 속삭이듯 라프넬의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난, 실패하지 않을 거거든.”
어울리지 않는 두 그림자가 한 몸으로 겹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