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전염병?”
아더의 손에 들린 소식지가 침대 위로 떨어졌다.
시커먼 창밖엔 잔인할 정도로 달빛 한 점 비치지 않고 있었다. 미처 벗지 못한 넥타이를 거칠게 끌어 내리는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전염병이 돌기 딱 좋은 때이긴 하지.”
소식지는 코바흐와의 접경 지역에서부터 전염병이 번지는 중이라 말하고 있었다.
전염병은 흔한 일이었다. 특히 날이 더워진 지금 같은 시기엔, 제아무리 선선한 넥서스라 해도 보호구역 같은 곳에서부터 경미한 병이 도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하필….
아더는 소식지를 다시금 들어 올렸다. 그 속엔 소식지의 단골 인사인 데베르 클리프의 이니셜이 예상대로 적혀 있었다.
“취약지역의 예방 주사 비용을 전부 부담한다니….”
이 또한 흔한 일이었다. 전염병이 발생하거나, 전란이 일어날 때 클리프가가 앞장서 기부한다는 것은 넥서스 꼬맹이도 알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시기가 문제였다. 선황이 살아계셨을 적엔 귀족들은 주삿바늘을 제 몸에 꽂아 넣는 것도 질색했었지만, 지금은 세상이 많이 바뀐 참이었다.
어쩌면. 아더는 최악의 가정을 하는 중이었다.
예방 주사라는 명목으로 적당히 눈을 가리고 라프넬의 피를 가져가려는 것은 아닐까.
자리에서 일어난 아더의 눈 밑엔 짙은 피로감이 그득했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감는 순간까지 이리떼처럼 황가를 노리는 이들과 정치질하는 건 그로서도 버거운 일이었다.
잠시 눈을 감고 숨을 내쉬다가 침대 옆 서랍 깊숙한 곳을 손으로 훑었다. 이내 손에 잡힌 작은 종이봉투는 데베르와 내통한다는 약쟁이를 짐승 잡듯이 해 얻어낸 것이었다.
데베르 공작이 두려워 아무 말 못 한다고 벌벌 떠는 이의 입을 열게 하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을 보여주는 것.
다행히 약쟁이는 나머지 팔 한쪽을 잃기 전에 아더가 원하는 바를 실토했다.
조금만 더 이치에 밝았다면 두 팔이 멀쩡했을 텐데. 아더는 짧게 혀를 찼다. 보호구역에서 자란 머저리치고 영리하긴 했지만, 거기까진 수가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멍청한 게 죄지.”
제 앞가림 하나 못하게 만드니까.
아더는 종이봉투 속의 약을 손바닥 위로 쏟아냈다. 옆에 놓인 찻잔에 한 알을 넣자마자, 알약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간 빛을 띠는 차는 엉큼하기까지 해 보였다.
‘네가 직접 증명해야겠어. 약쟁이가 아닌 내 눈엔 흔한 진통제처럼 보여서 말이야.’
‘앗, 아니. 황자님…! 읍! 읍!’
약쟁이는 황자의 사격장에서 약을 한 움큼 삼킨 채, 부러진 팔까지 벌벌 떨며 환각을 헤맸다. 곧장 데베르와의 밀담을 털어놓지 않은 대가였다.
원치 않게 데베르의 면면을 보게 되었다는 꺼림칙한 마음도 스쳤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차기 황권을 위해선 클리프가의 세력을 눌러야 했다. 데베르가 황자의 편에 서 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막상 선다 해도 아더는 제 뒤를 살펴야 하는 처지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이권 다툼이란 원래 그런 것이었다.
“만약 카시우스가 그때 죽지 않았더라면….”
소년병이자 어린 황자에 불과했던 아더의 눈에도 카시우스의 황권을 향한 혈기 오른 야망은 선명히 보였었다. 그게 얼마나 선황제의 숨통을 조였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자명했다.
다들 곧 내전이 터지리라 예측하던 때였다.
“황자님, 준비되었습니다.”
“나가지.”
아더는 적막한 복도를 거닐며 생각했다.
우린 남들보다 많은 것을 타고난 대가를 서로의 목숨으로 갚고 있다고.
꽤나 가혹한 이치일지언정 말이다.
황자궁 후원 구석엔 제국 인장이 없는 검은색 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아더가 황족임을 드러내지 않고, 일개 귀족인 것처럼 웨인을 돌아다닐 때 애용하는 차였다. 운전석엔 평소처럼 전용 운전사가 아닌, 황자의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수행인이 올라탔다. 아더의 앞에 약쟁이를 무릎 꿇린 자였다.
차는 부드럽게 황궁의 샛문으로 빠져나갔다.
창밖을 지나치는 풍경을 가만히 응시하던 아더의 눈썹이 조금 찌푸려졌다.
“오늘따라 어둡군.”
“전력 공급이 원활치 않다 들었습니다.”
수행인의 말대로 밤에도 환히 거리를 밝히던 가로등이 절반쯤은 꺼져 있었다.
“운이 좋네.”
아더는 흔치 않은 제 운에 비식거렸다. 저열한 짓거리를 하는 오늘 같은 밤, 때마침 죄책감을 자극하는 불빛까지 사라지다니. 어쩌면 가야만 하는 길을 감내하는 것이란 어쭙잖은 생각마저 들었다.
차는 웨인 번화가를 벗어나 허름한 집 앞에서 멈추어 섰다. 주변엔 볼 만한 것은 없었다. 코펠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곳이었기에, 간혹 늦은 밤에도 손님을 받는 대여 마차 몇 대가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아더는 창가 커튼 너머, 희미한 램프 불빛에 시선을 고정했다. 사람이 있단 증거였다.
똑, 똑.
“누구요?”
안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똑. 똑.
아더는 한 번 더 문을 두드렸다.
“손님인가?”
지팡이가 바닥을 찧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문짝의 낡은 이음새가 요란하게 벌어지는 틈을 타, 아더는 낮게 속삭였다.
“아더입니다.”
“뭐, 뭐?!”
문을 열던 노인은 입을 떡하니 벌린 채 허공을 더듬었다. 그의 눈은 한 치의 틈도 없이 감겨있었다. 아더는 그 손끝에 제 옷자락이 닿도록 가까이 다가갔다.
“그간 안녕하셨을까요?”
“아니, 화, 황자님.”
노인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넙죽 바닥에 엎드렸다.
아더는 웃음소리를 흘리며 노인을 안아 일으켰다.
“저에게 기별이라도 하셨으면, 몸이 더 편찮아지시기 전에 도움을 드렸을 텐데요.”
“늙으면 다 이리되는 것이죠. 제 몸이야 의사였던 제가 더 잘 압니다, 황자님.”
“콜린스 공작께서 모른 척하실 분은 아닌데….”
“아, 아닙니다! 저는 웨인에서 조용히 살다 가는 게 유일한 노년의 바람인걸요.”
아더의 한쪽 눈썹이 미약하게 들썩였다.
“‘그날’ 때문인가요.”
“그. 그건….”
잔뜩 주름진 얼굴에 수심이 깊어졌다. 속내를 눌러 내리는 입술 끝이 잘게 경련했다.
“비밀의 무게가 무겁다 보니, 자연히 사람들을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그 이후에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나요?”
“전혀 없었습니다. 이리 수십 년 만에 황자님께서 찾아오실 줄도 몰랐는걸요.”
지금은 한낱 눈먼 노인이었지만, 선황 시절엔 황가의 주치의를 했던 자였다. 황후와 후궁의 해산을 돕고 결국엔 라프넬까지 받아낸 게 그의 불행이었다는 걸, 당시 순박한 의사는 알지 못했다.
“그럼 공주가 조산아라는 건, 황궁 밖에선 오직 선생만 알고 계시는군요.”
“황자님, 말씀을 낮추십시오….”
노인은 굳게 닫힌 문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새 나가는 소리를 두려워함이 틀림없었다.
“여긴 듣는이가 둘밖에 없습니다. 선생과 나.”
라프넬이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그건 확신하지 못했다. 어쨌건 목숨을 건진 건 맞았다. 만약 임신 기간을 다 채우고 태어났다면 라프넬 모친의 외도는 드러났을 테니까.
황제는 그녀의 모친이 아이를 갖기 전, 두 달가량 정무를 핑계로 별궁에 출입하지 않았다. 모친은 황제가 산파실 문을 열기 전, 필사적으로 빌었다. 아기의 목숨만 불쌍히 여겨달라고. 그리고 그는 애처로운 간청을 모른 척하지 못했다.
마침 딸아이니, 황위 계승과도 상관없으리라 생각했겠지.
그렇게 라프넬은 조산아가 아닌 유난히 작게 태어난 공주가 되었다.
그러나 모친은 불안감을 견디지 못해, 그의 애인이었던 친위대 남자에게 이를 고백했고, 그는 이걸 빌미 삼아 호이든을 협박했다. 그리고 호이든은 시답잖은 가십을 얘기하듯이 아더에게 이 거대한 비밀을 뱉었다. 돈을 쥐여 보낸 라프넬의 생부가 도박장을 전전하다, 판 돈을 못 메꿔 목이 따였다는 소식은 덤이었다.
비밀은 결국 이 꼴밖에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싹을 잘라내고. 또 잘라내고.
결단코 아귀를 벌리지 못하게 해야만 한다.
“차를 좋아하신다고 들어 황궁에 들어오는 것을 몇 개 가져왔습니다.”
“이리 귀한 것을… 잠시만 기다리시면 제가 곧 끓여오겠습니다.”
노인은 벽을 더듬거리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곧 타닥거리는 불길 소리와 함께 물 끓는 소리가 들렸다.
아더는 찻잎 사이에 끼워 넣은 녹색 가루를 꺼냈다. 으레 전쟁 중 굶주림에 시달리던 병사들이 약초로 착각해 먹는 독초였는데, 잠들 듯이 죽는 게 특징이었다.
곱게 빻은 독초 가루가 노인의 빈 찻잔 위에 소복이 쌓였다.
“기다리시게 해 죄송합니다, 황자님.”
주전자를 든 노인의 손이 불안정하게 떨리자 아더는 자연스레 자신이 받아들었다.
뜨거운 물에선 우러난 찻잎의 씁쓸한 향이 풍겼다. 오늘 밤과 어울리는 향이었다.
“오늘은 편히 주무실 겁니다.”
아더는 차를 들이켜는 노인을 향해 넌지시 뜻 모를 말을 건넸다.
“비밀의 무게 따윈 잊으실 정도로요.”
아더는 서서히 가로 쓰러지는 노파를 침대 위에 눕혔다. 더 이상 그에겐 필요 없을 램프 불빛마저 끄자, 낡은 집은 평화에 잠겼다.
어차피 그깟 비밀 하나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 수십 년간 사람을 멀리하며 살아온 노인이다.
오히려 편안히 안식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일지도 모르지.
“지금 가셔야 합니다.”
어둠에 숨은 남자가 속삭였다.
“그래.”
아직 할 일은 남아 있었다.
간호 숙소 귀퉁이에서 작은 인영 하나가 튀어나왔다.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여체는 차 한 대가 헤드 라이터를 짧게 깜빡이자, 이내 그곳으로 달려갔다.
“어? 화, 황자님!”
뒷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아더의 얼굴에 여자는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숙였다. 노인이 그를 알아챘을 때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늦은 시간에도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 당연히 그래야죠. 제국민으로서 황자님의 부름인걸요.”
“소피아 간호사는 코바흐전 때도 전방 병원에서 본 것 같은데, 맞을까요?”
고작 가난한 평민인 자신을 제국의 황자가 기억하다니. 소피아는 뺨을 붉혔다.
“제가 이리 부른 건 은밀히 부탁할 것이 있어 그렇습니다.”
이미 웬만한 얘기는 수행인을 통해 전달한 뒤였다. 황자의 일손을 조금만 도와주면 상당한 보상을 해주겠다는 게 본론이었다.
아래로 줄줄이 동생이 딸린 가난한 푸줏간의 장녀가 이 제안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눈앞의 미려한 황자까지 보자,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친 건지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아마 콜린스 공작님이 코펠에 예방 접종을 다녀오시면, 어떤 혈액검사를 할 겁니다.”
“혈액검사요?”
“검사 결과가 나오면 데베르 공작이 올 테고요. 소피아 양이 해줘야 할 건, 그 둘의 대화를 듣고 제게 말해주는 겁니다.”
“엿들으라는 말씀이세요?”
아더는 살며시 소피아의 어깨를 붙잡아 눈을 맞췄다. 순식간에 가까이 다가온 푸른 눈동자에 소피아는 숨을 집어삼켰다.
그는 꽤 매혹적으로 미소 지었다. 오히려 이런 일은 찻잔에 독초를 섞는 것보다 쉬웠다.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나직한 음성에 소피아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 월급으로도 충당되지 않는 제 동생들의 식비며, 학비, 다가올 시린 겨울이 절로 떠올랐다.
아무렴 그저 대화일 뿐인데. 어디 콜린스 공작님이 허튼일하실 분도 아니고.
“도와줄래요?”
소피아는 조금 더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을 거절 못하는 그녀의 천성도 한몫했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는데.”
아더는 작은 상자를 건넸다.
영문도 모른 채 상자를 열어 본 소피아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렸다.
“날 만날 땐 이걸 쓰고 와요. 혹시나, 미혼인 소피아 양과 내가 함께 있는 걸 누가 보면 곤란할 테니까.”
그곳에 들어있는 건 가발이었다.
모든 비밀을 덮을 것처럼 새카만 머리색을 지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