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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27화 (127/206)

127화

집사 올리버는 오늘도 어김없이 트레이 위에 가주를 위한 의문의 약과 즐비한 투서들을 담은 채 서재로 들어섰다. 베스가 전해준 약통은 구석에 놓여 먼지가 쌓여간 지 오래였다.

“확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손님을 받지 않는 데베르의 응접실 문턱이라도 밟아보고자, 공작을 향한 투서는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도착했다. 우편을 막아버리자, 때론 공작가로 들어오는 고깃덩이 사이에도 투서가 끼어 있었다. 데베르는 그 꼴을 보고도 “애가 타나 보군요.”라는 말로 일축할 뿐이었다.

“바깥이 시끄럽습니다.”

“늘 시끄러웠습니다. 고작 황제 하나가 병이 도지기 전부터요.”

“공작님.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잖습니까.”

“아버지처럼 황위라도 노려야 한다는 뜻인가요.”

“공작님…!”

집사는 대경실색하며 바깥의 아무도 없는 복도를 한번 돌아봤다.

“선대 클리프 공작처럼 일찍 죽어버렸으면, 황권 다툼 따위 관망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그런 말씀은-”

“이쯤 되면 넥서스의 온갖 구정물은 다 튀어 오를 테니 그건 기대가 되는 바입니다. 마침 찾는 것도 있고.”

데베르는 서슬 시퍼렇게 황제의 목을 겨누던 카시우스와는 달랐다. 하지만 집사는 그가 카시우스와 분명 같은 결을 가지고 있다고 직감했다. 집요하게 베스 양의 뒤를 캐 나가는 걸 볼 때면, 그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젊은 카시우스의 환영이었다.

“부탁한 거는 찾으셨겠죠.”

데베르는 건성으로 투서를 열어보며 물었다. 투서 속의 아우성은 모두 뻔했다. 현 황권을 욕보이며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겠다는 더러운 연서. 양쪽을 재다가 제게 숙이고 들어오는 치들은 그에게 너무도 익숙했다.

“선대 클리프 공작님께서 계실 당시, 이름만 남은 남작가에서 번트의 관리인 역할을 하긴 했습니다. 저 또한 아는 바이고요.”

집사는 데베르가 번트의 관리인을 했다는 남작가와 정신 병원의 여자를 연관 짓는 걸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중간이 빈 퍼즐을 이리 맞추면 되리라는 확신은, 목숨을 전제로 전장을 뒹군 자만이 얻을 수 있는 훈장 중 하나였다. 데베르는 이 끔찍한 훈장 덕분에 거듭되는 전쟁에서 살아남았고, 그만큼 제 목을 겨누었던 이들을 죽일 수 있었다.

제게는 훈장이었으나, 적에겐 저주일 뿐인 이 직감을 데베르는 의심치 않았다.

“아내가 있었겠군요.”

“예. 당연히 아내가 있긴 했지만 실제로 보진 못했습니다.”

“실존했으면 번트에 있는 이 중 한 명 정도는 봤겠죠.”

“안 그래도 지금쯤 도착했을 겁니다.”

집사의 말이 거짓은 아닌 듯 곧 시종의 안내를 받은 부인 하나가 쭈뼛거리며 들어섰다. 농작 일을 하는 집안인 듯 그녀의 손톱 밑은 곡물 찌꺼기로 시커멨다.

“아이고. 고, 고, 공작님….”

중년의 부인은 데베르를 보자마자 파들거리며 허리를 굽혔다.

기억 속 카시우스에 대한 두려움의 증거였다. 카시우스와 너무도 닮은 그를 보자마자, 끔찍했던 번트의 언덕 사건이 절로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공작, 공작님을 뵙습니다….”

“번트 관리직을 했던 남작가를 기억하는가.”

데베르는 덤덤하게 물었다. 새파랗게 질린 부인의 얼굴과 대조적이었다.

“예, 예. 그렇습죠. 집사님께 얘기를 이미 듣고 왔습니다. 젊은 남작 부부가 꽤 오래 관리직을 맡았는데 저희와도 잘 지냈어요. 싹싹하고 부지런해서.”

“아이는.”

아이라는 소리에 부인의 얼굴에 대번에 안타까운 기색이 스쳤다.

“어유, 희한하게 그 집에 아이가 없었습니다. 부부가 금실은 좋은 것 같았는데… 번트가 신기하리만치 애들 소리가 안 들리는 곳이라. 어머, 내 정신 좀 봐. 물론 데베르 소공작님을 빼면요.”

묻지도 않은 말까지 주절거리던 부인은 급하게 제 입을 싸맸다.

데베르의 눈썹이 가볍게 들썩였다. 타인의 입에서 나오는 ‘소공작’ 소리가 안 그래도 예민한 그의 분위기를 더 날 서게 했다. 그럴 만도 했다. 데베르 소공작에게 번트란 카시우스의 체벌을 기다리던 장소일 뿐이었으니까.

“임신했다는 소식도 끝까지 들은 적이 없고.”

“그 부인이 원체 비쩍 마른 데다 몸이 안 좋다는 이유로 바깥출입도 잘 안 했어요. 그러다 몇 년 지나고 나서 조금씩 사람들하고 왕래한 거지, 임신은커녕 전쟁통에 남편 보내고 나서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습니다.”

“남편 소식은. 금실이 좋았으면 번트로 돌아왔을 텐데.”

“그게… 세상에, 무슨 그런 봉변이 있는지…. 다리도 저는 양반이 보병으로 징발되었더라고요. 실수가 생긴 것 같긴 한데 그때는 뭐, 어쩌겠습니까. 그대로 나갔고, 듣자 하니 선봉대에 이름이 올라가고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답디다.”

“선봉대면….”

선봉대는 필시 카시우스 군하의 1군일 텐데.

데베르의 얼굴에 의문이 피어오르자, 부인이 조심스레 덧붙였다.

“예. 카시우스… 공작님 관할이었죠.”

잠시 생각에 잠겼던 데베르는 여상한 얼굴로 부인을 불렀다.

“지금이라도 그 아내를 보면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까.”

“아마도요. 원체 미모가 뛰어난 여자여서 세월이 흘렀어도 알아볼 겁니다. 이름이 올리비아인가 그랬던 것 같은데.”

“올리비아….”

데베르는 가보란 뜻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아직 뜯지 않은 투서들을 편지칼로 대충 그어댔다. 더 이상 볼 가치가 없는 것들이었다.

“공작님, 저자를 코펠로 데려가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무슨 뜻이죠.”

“지난번, 혈액을 채취하실 때는 인적이 거의 없어 아무도 모르게 숨어드는 게 가능했지만, 요즘 들리는 소리가 이상합니다.”

집사가 은밀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코펠 주변을 서성거리는 치들이 늘었다고 합니다.”

“훔칠 것도 없는 코펠에 서성거리는 치들이라.”

데베르는 테이블 위의 만년필을 고이 제 품 안에 집어넣었다.

“여름은 전염병이 돌기 쉬운 계절입니다. 공작가 하나쯤이 기부를 빌미 삼아 제국 병원의 뒷배가 되어도 이상치 않을 때죠.”

실로 오랜만에 집사를 향해 짓는 미소였다.

그러나 가주를 마주 보는 집사의 표정엔 짙은 근심이 서려 있었다. 그는 결국 주제넘은 질문을 뱉기로 했다.

“어째서 이토록 베스 양을 쫓으시는 겁니까. 그분은 이미 공작님의 약혼녀이고, 이젠 결혼식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 데베르는 어딘가 비틀린 사람처럼 베스의 뒤를 캐고 있었다. 종전 이후 처음으로 베스가 사라졌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란 것은, 데베르를 어릴 적부터 봐온 집사 올리버만이 눈치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소식지에 왜 그런 추문을 보내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혼을 앞둔 젊은 영애들이 간혹 막연한 두려움으로 결혼을 회피한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오랜 시간 평민으로 어려운 시간을 보낸 분께는, 클리프가라는 커다란 가문이 부담될 수도 있고요. 제국에서 가장 큰 가문과 결혼하게 되시는 거니까요. 날 때부터 클리프이신 공작님께선 이해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간청하듯 말하는 집사의 얼굴엔 책망은 없었다. 그저 안타까움만이 들어있을 뿐이었다.

“행여 그분께 어떤 비밀이 있다고 한들, 공작님께선 그 모두를 샅샅이 찾아내셔야지만 만족하시겠습니까. 제가 짧게나마 봐온 베스 양은 헛된 거짓말을 하실 분은 아닌 듯 보였습니다.”

“몇 번 보지도 않았는데 쉽게 믿으시는군요.”

데베르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제자리로 내려왔다.

그게 문제였다. 베스 제인스란 여자는 타인에게 믿음을 주는 데 지나친 재주가 있다는 점이.

“저는 데베르 공작님께선 선대 공작님과 달리 안온한 결혼생활을 하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공작님과 베스 양을 닮은 아이도 낳고, 서로를 사랑으로 보듬을 수 있는 그런 평범한 결혼이요. 몰리 공작 내외께서 좋은 선례를 보여주고 계시듯이 말입니다.”

“목숨을 담보로 한 결혼이더라도 말입니까.”

툭 튀어나온 데베르의 한마디에 집사의 눈이 커졌다. 이마에 팬 주름이 더욱 깊어지는 게 자신이 들을 말을 의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무슨-”

“전 지금 공작부인의 자질 따위를 품평하기 위해 이 짓을 하는 게 아닙니다. 차라리 그런 문제였으면 좋겠네요. 전 그 여자가 보호구역에서 구르다 왔다 해도 상관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보호구역에서 구른다는 말의 의미를 깨달은 집사는 고개를 떨구었다.

데베르는 조금씩 실망으로 점철되는 집사를 담담히 지켜봤다.

“…베스 제인스가 첩자라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꽤 오랜 시간 클리프 공작부인을 기다려온 이에겐 잔인한 선고이리라.

“베스란 이름은 종전 이후 쥐잡듯이 다 뒤졌다고 생각했는데, 브리틴의 몰락 가문까진 미치지 못한 게 패착이었습니다.”

“대체 무슨 말씀을….”

노년의 집사는 아연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로 서류 뭉치 하나가 떨어졌다. 끝이 누렇게 오그라든 종이 뭉치 맨 위 장엔 브리틴어가 쓰여 있었다.

“아시잖습니까, 브리틴어.”

웬만해선 평정을 잃지 않는 집사의 눈에 전에 없던 혼란이 감돌았다.

데베르가 펼친 면의 상단엔 반역죄로 처형당한 릴리아드 가문의 구성원들과 처형 날짜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 가문에 여식은 존재치 않았다. 심지어 날짜조차 베스와 연관 짓기엔 너무 먼 시간이었다.

이번엔 다른 종이 한 장이 그 위로 올라왔다. 앞선 것보다 훨씬 오래돼 잉크마저 흐릿한 출생 신고서였다. 하지만 공들여 쓰인 ‘베스 릴리아드’란 이름까지는 지우지 못했다.

“출생한 아이는 있는데, 처형당한 아이는 없습니다. 처형 당시엔 이미 아이가 아니라 성인이었을 텐데요.”

“설마… 베스 릴리아드가 병동의 그 여인이라 생각하십니까.”

“루카라는 아이가 쓸만한 실마리였더군요. 부모는 처형당했는데, 본인만 선처받아 하워드의 시녀가 됐다는 그 아이요.”

데베르는 바짝 마른 시가를 입술에 물었다. 움찔거리는 턱 근육 사이로 불현듯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눌러 내리는 게 전해졌다.

“…어쩌면 선대부터 시작된 일인지도 모르죠.”

데베르 자신이 카시우스의 과업을 물려받았듯, 베스도 선대 베스의 일을 물려받은 것이리라는 더러운 확신이 들었다.

“흔해 빠진 제인스란 성은 갖다 붙일 생각을 했으면서, 제 어머니의 이름은 왜 그대로 쓰고 있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들키지 않을 거라는 건방인가.”

“만에 하나, 공작님께서 의심하시는 게 진실이라면….”

집사는 알 수 있었다. 데베르 공작은 베스 양을 특별히 여긴다고. 어쩌면 다른 결말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런 집사의 생각을 비웃듯이 데베르는 시가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매캐한 연기 사이로 소문의 클리프 얼굴이 스쳤다.

“전, 단 한 번도. 첩자를 살려둔 적이 없습니다.”

카시우스의 망령.

그 멸칭과 지독히 닮은 사내가 집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의심이 현실이 된다면….”

그는 짧은 고민을 곱씹으며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찰나였다.

“어디에 모가지를 들이밀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 품 안에서 놀아난 대가는 치러야죠.”

잿빛 눈동자는 어느 순간, 베스 제인스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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