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아더는 조용히 벽에 붙어섰다. 병원장실 문에 난 작은 창으론 바깥 복도 벽에 붙은 불청객은 보이지 않았다.
“혈통 확인… 친자….”
갑자기 친자 확인이라고? 대체 누구를?
귀를 기울였지만, 희미하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대화를 멈춘 것 같기도 했다.
아더가 알기론 데베르는 제국 병원에 출입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를 황자의 지지 세력 아니면 예비 정적으로 생각하는 지금, 굳이 콜린스 공작을 만날만한 일은 없었다.
“기록. 아직 가지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다시금 들려오는 소리에 아더는 턱을 더욱 바짝 당겼다.
누구의 기록인 걸까. 의문은 쉼 없이 피어났다.
“클리프 공작이 이딴 헛소문에 귀 기울이는 줄은 몰랐군!”
“그저 확인입니다.”
친자 확인과 헛소문이라는 단 두 마디만으로도 머릿속은 어지러워지기 충분했다. 흔치 않은 콜린스의 고성이 불을 지핀 것이기도 했다. 생각할 틈도 없이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라프넬의 얼굴이었다.
호이든은 터지기 직전의 폭탄이었다. 황제를 찾는 귀족 대신들의 발걸음이 잦아질수록, 짙어지는 섬망과 함께 라프넬과의 결혼에 대한 집착도 커져만 갔다. 아더는 언제라도 그 버석한 입술이 라프넬의 출생을 들먹일 수 있다는 것이 미치도록 불안했다. 예정된 국혼 발표를 하루도 미룰 수 없는 이유 또한 이 때문이었다.
그토록 이복동생들을 업신여겨놓고, 뜯어먹으려는 짐승들이 득실댈 때는 그래도 가족이라 믿는 건지. 그 추태가 역겹기만 했다.
사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건 애매한 의문이 아니었다. 저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희뿌연 불안이었다. 혹시 데베르가 라프넬의 비밀을 아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그 끔찍한 불안….
잠깐 혼란스러운 상념에 빠진 사이, 뚜벅거리는 구두 소리가 가까워졌다. 아더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병원장실 옆의 몰리 부인 방으로 들어섰다. 이미 부인은 맨 아래층에 있는 것을 보고 온 터였다. 데베르만큼이나 군인으로 굴러먹은 시간이 긴 아더였기에 숨는 것쯤은 별일 아니었다.
아더는 눈을 감고 가만히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데베르의 걸음이 멀어지고 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병원장실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오, 아더! 아니, 메이너 공작님 아니신가!”
“의료품 수입 승인서를 전달해드리려고 왔습니다.”
“사람을 보내면 될 것을. 그런데 뺨에 이 상처는 뭔가?”
“아, 이건. 간밤에….”
“쯧. 폐하께서 지난밤에도 발작하셨는가 보군.”
“늘 그렇죠.”
아더는 가볍게 웃으며 눈에 익은 병원장실을 둘러봤다.
“혹시 앞에 손님이 왔다 갔나요? 타는 냄새가 나네요.”
“그런가? 내가 시가를 태우다 진료서도 함께 태워 먹어 그런가 보오. 나 원, 다이애나가 보면 경을 칠 일이지.”
자연스레 답을 피하는 콜린스를 보며 아더는 쓴입을 다셨다. 막연히 알고는 있었다. 콜린스 공작이 제법 각별하게 데베르를 비호한다는 것은.
“허허, 늙은이를 찾아오는 건 아더 자네뿐이지.”
“하하….”
눈앞의 거짓말을 목도하는 심정은 늘 참담했다.
혈액. 친자 확인. 헛소문. 기록. 아더는 몇 가지 단서를 떠올리며 제국 최고의 의사이자 세력가인 콜린스 공작을 바라봤다. 그는 선황 때부터 비공식적인 주치의였다. 황가에 대한 비밀을 굳게 지키는 자이니, 때론 주치의보다도 황제의 병환을 더 잘 알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호이든이 아더 외에 유일하게 병환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이가 콜린스였다. 그건, 살고 싶단 집념이 몰리 공작가에 대한 견제를 넘어섰단 증거였다.
만약 데베르가 말한 기록이란 게 선황에 관한 것이고, 친자 확인이 라프넬을 얘기하는 것이라면….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더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물은 것을 후회할 수도 있다. 아니. 아마 후회할 것이다. 그래도 확인하고 싶었다.
“콜린스 공은 넥서스의 대를 위해 소를 얼마나 희생하실 수 있죠.”
“그게 무슨 말인가.”
푸른 눈동자에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아시다시피 섭정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결국 황제의 대리일 뿐이니까요. 제아무리 견고한 황위도 섭정이 지속되면 약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넥서스는, 지금 그 기로에 서 있고요.”
“아더.”
“선황이 서거하셨을 때, 급히 현 황제를 즉위시킨 이유도 넥서스의 승전 기세를 이어가기 위해서였단 건 알고 있습니다. 때마침 계속되던 전쟁이 폐하에겐 아마 큰 행운이었을 겁니다. 꽤 위협이 될만한 이복동생과 클리프 공작이 바깥으로만 돌고 있었으니 속으로 웃고 있었다 해도 이해하는 바입니다”
“아더…!”
웃지 않는 황자는 세간에서 말하는 사랑스러운 황자답지 않았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이 모습이 가장 그다운 모습이었다.
“지금과는 상황이 많이 다르죠. 빌어먹을 전쟁도 없어 온갖 넥서스 치들의 눈이 황궁 안으로만 쏠리는 상황에, 클리프 공작은 황제의 소환도 못 본 척하고 있으니까요. 아, 폐하의 대리인인 제가 보낸 것이니 제 부름을 무시하는 것일 수도 있겠네요.”
“메이너 공작, 섭정의 중압감이 크다는 건 충분히 이해-”
“전 힘이 필요합니다.”
지독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아더는 자신이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지를 잘 알았다.
“만약… 넥서스를 위해, 이제껏 지켜온 제국의 안위를 위해 제가 손을 내민다면, 잡으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기어코 남은 말을 뱉는 입술 끝이 가늘게 떨렸다.
“혹시라도… 아주 만일… 호이든의 생명을 연장하려는 아저씨의 노력이 넥서스를 망하게 하는 길이라면, 멈추실 생각도 있으십니까.”
“아더!”
벼락같은 고함이 복도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러나 금색 안경테 안의 눈동자는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대의를 위해서라면요.”
“자네가 지금 하는 말은-”
“알고 있습니다. 반역죄에 해당하죠.”
아더는 이젠 떨림 없이 답했다.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면 평화가 지속될 겁니다.”
콜린스는 긴 침묵으로 그 답을 대신했다.
허수아비여도 황제는 황제라 이건가. 그러나 지극히 그다운 선택이었기에 놀랍진 않았다.
“공의 뜻은 잘 알았습니다.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누구나 한 번쯤은 무서운 생각을 할 때가 있잖아요.”
지웠던 미소를 다시 입꼬리에 걸쳤지만, 이번엔 콜린스도 속지 않았다. 딱딱한 표정의 콜린스를 보며 아더는 작게 실소했다. 고작 싱글거리는 미소 몇 번으로 참 많은 이들을 속여먹었다 싶어져 나온 헛웃음이었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건 하나입니다.”
아더는 흔치 않게 진심만을 꾹꾹 눌러내려 입을 열었다.
“앞으로 어떤 비밀을 알게 되시더라도 끝까지 지켜주세요. 세상엔 드러나지 않는 게 더 좋은 것들도 있을 테니까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병원장실을 나섰다.
바깥에서 저를 기다리는 차에 올라타기 전, 오랜만에 온 제국 병원을 다시 한번 눈에 담았다.
아마 앞으로는 이곳에 걸음 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스쳤다.
* * *
“공주님, 아더 황자님 오셨습니다.”
라프넬은 테이블 위의 편지를 급히 테이블보 아래로 떨어뜨렸다. 구두 끝으로 편지지를 물어와 기다란 드레스 자락에 감추곤, 어깨 위의 화려한 숄도 창밖으로 집어 던졌다.
하늘거리는 어깨끈 아래의 도드라진 뼈와 유독 멀건 얼굴이, 누가 봐도 안쓰러울 만치 근신하는 공주의 모습을 완성했다.
“들어와.”
아더는 부쩍 수척해진 라프넬의 얼굴을 훑었다. 식음을 전폐했다는 시종들의 전언이 거짓은 아닌 듯했다.
라프넬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앞에 놓인 자수를 집어 들었다.
“여긴 무슨 일이야.”
아더가 아는 라프넬이라면 몇 번이고 그를 쫓아왔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호이든이 제 출생을 안다는 사실을 들은 이후부터 오직 별궁 안에서 칩거하는 중이었다.
라프넬은 갑자기 찾아와서는 텅 빈 시선으로 자신을 지켜보기만 하는 아더를 노려봤다.
“또 무슨 얘기가 하고 싶어서 온 거야.”
“온실 정원을 수리한 걸 이제야 봤어. 예쁘더라, 라프넬.”
“…그곳은 내가 누구와 결혼하든 상관없이 내 것이니까.”
“그래, 여기 네 것도 하나쯤은 있어야지. 그리 오래 인형 노릇을 했는데.”
평소와 달리 날 선 아더의 읊조림에 라프넬의 눈가가 설핏 접혔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른 시가를 하나 꺼내 물었다. 이것도 평소 라프넬의 방 안에선 하지 않던 짓이었다. 불은 붙이지 않은 채 공연히 까딱거리며 장난질만 하다가 툭, 건성으로 말을 던졌다.
“곧 죽어도 호이든과 결혼은 싫어? 그저 정치적인 동맹일 뿐일지라도?”
그의 시선은 이젠 시가 끝을 향해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아더의 등이 구부정해졌다. 반듯하게 넘겨졌던 앞머리도 몇 가닥 앞으로 흘러내렸다. 모든 것이 조금씩 흐트러지는 모양새였다.
“내겐 황궁을 나갈 선택권 따윈 없잖아. 말로는 넥서스의 황후라도 되게 하라 지껄였지만 거짓말이었어. 난 늘 황궁을 나가고 싶었거든. 황궁 밖의 가장 높은 여자가 되고 싶었다면 믿겠어? 그래서 데베르 클리프에게 목맸던 건데….”
라프넬은 자조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거짓을 섞은 진심을 말하다니. 스스로가 우스웠다.
“웃기지 않아? 황궁의 피는 하나도 없는 계집애가 평생토록 여기에 매여 산다는 게?”
“…….”
입술 끝에 애처로이 매달려있던 시가가 뚝 떨어졌다.
“넌 내 죄책감을 자극하는 재주가 있어.”
무덤덤한 음성이었지만, 일말의 연민조차 섞이지 않아 더욱 차갑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가끔. 아주 가끔은 제 목을 옥죄는 라프넬의 숨통을 끊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와 닮은 얼굴을 하고서, 계속해서 죄책감을 부어주는 그 약은 혀를 뽑아버리고 싶다고.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라프넬은 그에게 남은 단 하나의 가족이었으니까.
서로의 유일한 도피처이던 순간을 잊지는 못했다.
“난 가끔 ‘그날’을 생각해. 네 어머니가 너를 초주검으로 만들고, 그런 너를 내가 어쩌다 발견하고, 다시 끌려가는 널 못 본 척한 그날을. 아버지가 라프넬이 왜 저 꼴이냐 물어봤을 때 내가 거짓말을 했잖아. 네가 황자궁의 물건을 훔쳐서 매질 당했다고. 아버지의 사랑이 너무도 고파서… 고작 그 이유였어. 별궁에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알면 아버지가 미워할까 봐. 어렸지. 어리석었고. 그 하루의 실수가 평생을 갉아먹을 줄 모르고.”
“…후회하니?”
“내가 널 내치치 못한다는 걸 알면서 이리 영악하게 굴 땐 좀 후회해.”
잔뜩 혈기 오른 눈을 눌러 내리던 아더는 불현듯 벌떡 일어서 제 궁으로 향했다. 무언가 작정한 듯 푸른 눈동자에 이채가 번뜩였다.
평소와 다른 기세로 들이닥치는 황자를 향해 시종들이 붙었지만, 그는 뒤를 따르는 수행인 중 그림자 같은 이 하나만을 허락했다.
쾅, 거칠게 문을 닫자마자 전축의 소리를 최대한으로 높였다. 이내 응접실이 요란스러운 현악단의 선율로 가득 차자, 아더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잘 들어.”
그리고 그 아름답고 광활한 선율 속에 저열한 계획을 흘려냈다.
“데베르와 내통한다는 약쟁이를 데려와. 먹는다는 약까지 함께 챙겨서.”
언제까지 상대가 내 편이리라는 막연한 바람과 믿음에 기댈 수는 없었다.
상대가 누구든,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남으려면 먼저 패를 쥐어야만 한다.
아더는 지금이 그때라고 직감했다.
“황명이야.”
넥서스의 섭정이 뜻을 바꾼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