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베스는 낯선 길을 걷는 중이었다. 향하는 곳은 웨인의 범죄자들이 재판을 기다리며 구금되어있는 구치소였다.
그의 집무실에 또 다른 전화 한 통이 걸려 올 때까지 베스는 그 자리에 있어야만 했다. 마침내 전화벨이 울리고, 만년필을 찾았다는 소식이 도착했는지 남자가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을 잠근 것도 아니었지만, 어차피 그 남자가 허락할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것은 똑같았다.
‘대외적으론 네 시녀를 내가 선처하는 거야.’
할 수 있는 거라곤 고개를 주억이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루카에게 더 이상의 처벌은 없을 테니까. 그 정도만으로도 정말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하지만, 곧 들려오는 선고에 베스는 참았던 숨을 작게 뱉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작은 벌 정도는 받아야겠지. 어쨌건 고작 일개 시녀 따위가 공작에게 거짓말을 한 거니까. 심지어 무슨 연유로 그 밤중에 숨어들었는지도 알 수 없잖아. 안 그래?’
남자는 기어코 베스가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기다렸다. 집요한 구석이 있다는 건 이미 아는 바였다.
야트막하게 그가 웃는 순간, 베스는 어깨를 움칠했다.
‘그 애는 베스 하워드의 시녀지, 베스 클리프의 시녀는 될 수 없어.’
‘그럼… 루카는.’
‘곧 작별 인사를 해야겠네.’
그게 끝이었다.
남자는 에스코트하듯 문 바깥으로 손을 내밀었고, “보스넬 구치소로 가면 돼.”라고 친히 이정표까지 말해주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새파란 하늘이 끝을 모르고 가라앉는 마음을 더 참담하게 만들었다. 베스는 자신을 흘긋거리는 시선을 무시한 채, 보스넬 구치소를 향해 쉬지 않고 걸음을 놀렸다. 안 그래도 더운 날씨와 소진한 기력 탓에 눈앞이 울렁거리고 속이 메스꺼웠다.
구치소가 가까워질수록 북적이던 인파의 소음이 잦아들었고, 깔끔하게 닦여져 있던 거리도 점차 울퉁불퉁해졌다. 모든 것이 화려하고 북적이는 웨인에서 오직 보스넬 구치소만이 음습한 기운을 풍겼다. 마치 보호구역을 보는 것 같았다.
“베스 아가씨!”
철창 앞에 앉아있다가 냉큼 달려와 안기는 루카의 얼굴이 눈물 자국으로 엉망이었다.
“아가씨에게 큰일이 생기는 줄 알았어요.”
“…네 걱정을 했어야지….”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눌러 내리느라 베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뭐, 금방 풀려났는걸요.”
말은 그렇게 해도, 하얗게 질린 얼굴엔 미처 가시지 않은 두려움이 선명했다. 베스는 루카의 손을 꽉 잡은 채 걸어온 길을 되돌아갔다. 어색하게 팔을 비틀던 루카도, 결국엔 살며시 손을 맞잡아왔다.
원래라면 바깥에 있을 땐 적당히 루카와의 선을 지켜야 했다. 하지만 지금 베스는 모든 것이 신물 나고 지겨웠다. 고작 거짓 귀족 아가씨 행세가 뭐라고. 자신은 죄도 없는 아이를 이렇게 힘들게 만들 뿐인데.
베스의 심상찮은 눈치를 살피던 루카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저… 아가씨? 혹시 있잖아요. 공작님하고의 결혼은 꼭 하셔야 하는 거겠죠? 백작님이 시키시니까?”
뜬금없는 소리에 베스는 걸음을 멈췄다.
몇 번 입술을 곱씹던 루카는 마음을 굳혔는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사실 같이 갇혀있는 사람들이 저한테 왜 왔냐고 물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데베르 공작님하고 오해가 있어서 왔다, 나는 공작님 약혼자의 시녀다, 이러니까 다들 얼굴이 새파래져서는 그분에 관한 얘기를 막 해주더라고요. 처음엔 저도 그냥 뜬소문이겠거니 했는데, 듣자 하니 거짓말이 아니더라고요. 그분의 심기를 거스르거나 눈 밖에 날 때는 가차 없이 죽여버리신대요…!”
“루카, 그건 떠도는-”
“아니에요! 아주 예전에 그분께 접근하던 여자들이 있었는데 모두 죽었대요. 엄청 잔인하게.”
루카는 누가 들을세라 잔뜩 목소리를 낮췄다.
“가죽을 벗겨서 태우셨대요….”
‘공작은 번트의 모든 이가 볼 수 있는 언덕 꼭대기에서 하녀를 태웠어.’
남자의 목소리가 그 위로 겹쳤다.
“루카, 어젯밤에 봤다는 꼬마.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니?”
“그럼요! 키는 이만하고, 머리는 엷은 갈색빛에 앞니 하나가 빠져 있잖아요. 저는 정말 거짓말하지 않았어요.”
분명 베스가 아는 꼬마의 외양이었다.
“거짓말은 공작님이 하셨는데.”
거짓말은 공작님이…. 베스는 얼핏 스치는 아찔한 예감에 눈을 깜빡였다.
“먼저 돌아가, 루카. 난 들를 데가 있어.”
한 걸음 떼기도 힘들던 몸에 무슨 기운이 났는지 거친 길을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피오닐레 여관을 가봐야 해.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숨이 턱 끝까지 타올라도, 머릿속은 온통 번트 보호구역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꼬마에 대한 걱정으로 어지럽기만 했다.
“안 돼….”
그러나 저 멀리 피오닐레 여관의 빛바랜 문을 보는 순간,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창문은 깨지고, 문의 잠금쇠조차 어그러진 그 모습은 장사하는 곳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베스는 행인 아무나를 붙잡았다.
“혹시 저기 여관, 피오닐레 여관이 언제 사라졌는지 아세요?”
“아이고, 놀래라. 저 여관 말이오? 나야 모르지. 잔일 할 어린애를 구할 때는 언제고 하룻밤 사이에 죄다 사라졌으니까.”
“잔일 할 어린애를 구하긴 했나요…?”
“꼬마 하나가 쏘다니긴 했는데 잠깐이었수다. 여관 사라지면서 함께 사라졌으니.”
사라졌다. 모두가.
공작은 거짓말을 하고.
베스는 제 발끝을 내려다봤다. 당장이라도 두려운 무언가가 그 끝을 물 것만 같았다.
* * *
“이게 뭔가.”
콜린스는 새끼손가락보다도 작은 병 하나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보시다시피 피입니다.”
데베르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니까 내 말이. 대체 누구의 피란 말이야.”
“선황제가 서거하시기 전에, 카시우스 공작과 혈액 채취에 관한 연구를 하셨다 들었습니다. 정확히는 혈통 확인을 위한 것이었다죠.”
“아니, 어떻게….”
웬만해선 놀라는 일이 없는 콜린스의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
케케묵은 옛날얘기가 심지어 데베르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그도 그럴 게, 카시우스와 한창 이 연구를 두고 입씨름을 했을 적엔 데베르는 기껏해야 서너 살 남짓이었으니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뜻이 통하셨다고요.”
“그걸 뜻이 통했다고 할 수 있나….”
콜린스는 침음을 삼켰다.
그땐 지금보다 의료 연구에 훨씬 막대한 돈이 들던 시절이었다. 세력가인 공작 한둘쯤은 붙어야 무언가를 도모해 볼 수 있던 적이었다.
뜻이 통했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콜린스의 목적은 혈액을 체계적으로 분석해 야전병원에서 응급 수술 성공률을 높이는 것이었고, 카시우스는 피 몇 방울만으로도 친자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하지만 카시우스의 때 이른 죽음과 선황의 서거 이후, 연구는 흐지부지된 지 오래였다.
“어쨌건 그 얘긴 갑자기 왜 하는 건가.”
“친자 확인을 하고 싶습니다.”
“대체 누구를.”
데베르는 품 안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베스에게 아버지의 유품이라 천연스럽게 거짓말을 한 만년필이었다.
날렵한 펜촉이 종이 위를 여유롭게 오갔다.
[베스와 어떤 여자와 카시우스입니다]
안경을 고쳐 쓰는 콜린스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자네 지금-”
데베르는 조용히 손가락을 들어 올려 제 입술에 가져다 댔다. 어디든 쥐새끼는 있기 마련이다. 그는 이젠 작은 허점조차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 일은 은밀하게 이뤄져야 할 일이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피가 든 병을 한 번, 종이 위의 ‘어떤 여자’를 한 번 가리켰다. 병 안에 든 피가 그 여자의 것이란 뜻이었다. 그러곤 옆의 ‘카시우스’를 짚었다.
“기록. 아직 가지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콜린스는 까마득한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당최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듯 찾아온 데베르의 표정을 보자, 아득한 심정은 더 깊어지기만 했다.
베스와 카시우스의 친자 확인이라니…. 가정만으로도 저열하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소리였다.
그러나 세상사란 게 장담할 수는 없는 것이라 베스의 어미가 만난 남자가 정말 카시우스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한들 어떻게 하겠는가. 고생만 하며 살다 이제야 말문도 트이고, 대접받으며 사는 아이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대체 어디서 이런 괴소문을 주워듣고 온 건지…! 콜린스는 불쑥 화가 치밀어 언성을 높였다.
“클리프 공작이 이딴 헛소문에 귀 기울이는 줄은 몰랐군!”
“그저 확인입니다.”
데베르는 단정히 답했다. 아무리 봐도 약혼녀와 제 아버지의 혈연관계를 뒤지는 남자의 얼굴은 아니었다.
물러설 기미가 없어 보이는 데베르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콜린스는 결국 원치도 않는 말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 연구는 중단됐어. 지금으로선 혈액 채취를 통해 알 수 있는 부분도, 명확히 친자가 아닌 경우뿐이야. 애매한 경우가 훨씬 많다네. 행여 결과가 명확지 않을 때 가장 위험한 건 섣부른 오판이야.”
“그 판단은 제가 하겠습니다. 부디 부탁을 들어주세요, 콜린스 공작님.”
콜린스는 잔뜩 흥분한 상대를 보면서도, 오직 신사다운 태도로 임하는 데베르를 노려보듯 응시했다.
눈앞의 젊은 공작은 더 이상 몰리 저택의 문을 두드리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기억 속 카시우스보다는 앳된 분위기가 풍겼으나, 그 또한 클리프였다. 기어이 작정한 건 끝을 보고야 말던 그 클리프가의 유일한 후계자.
만약 자신이 이 일을 거절한다면, 데베르는 넥서스를 쥐잡듯이 뒤져서라도 대체자를 찾아낼 것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자신이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최악의 경우 데베르가 말한 추문이 사실이라면, 그저 모른 척하라는 늙은이의 첨언이라도 해야 할 테니까.
결국 콜린스는 백기를 들었다.
“지금은 여름이지 않나. 채취한 혈액이 변질되기 너무 쉬워.”
병에 담긴 혈액은 쓰지 못한다는 뜻을 담아 테이블 한쪽으로 치웠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데베르는 치워진 병을 만년필과 함께 슈트 안주머니에 넣으며 미소 지었다. 정갈하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창가로 걸어가 라이터를 긁었다. 흔들리는 작은 불빛에 비밀이 적힌 종이를 갖다 대자, 곧 재가 되어 허공에 날렸다. 하늘 아래의 모든 것이 푸르른 여름날에 시커먼 재는 분명 어울리지 않았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콜린스는 씁쓸하게 턱수염을 쓸었다.
“자네는 그의 아들이 맞는군.”
날아가는 재를 잠잠히 지켜보던 데베르는 설핏 웃었다.
“그 피가 어디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창턱을 짚은 그는 열심히 구치소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 베스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날씨가 꽤 더웠다.
“저는 죽을 때까지 클리프일 텐데요.”
끝이 개운치 않은 농이었다.
병원장실로 들어서려던 아더는 문틈 사이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선황제가 서거하시기 전에, 카시우스 공작과 혈액 채취에 관한 연구를 하셨다 들었습니다. 정확히는 혈통 확인을 위한 것이었다죠.”
데베르…?
“친자 확인을 하고 싶습니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 데베르 클리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