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넌 누구니?”
루카의 앞을 막은 건 작은 꼬마 하나였다. 땡그란 눈을 치켜뜬 아이는 제법 단호하게 루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길을 막은 건 꼬마인데, 어째 당황한 건 루카였다. 슬쩍 비켜서려 한 발을 오른편으로 내밀자, 그에 맞춰 아이는 제 왼편으로 발을 내밀었다.
“부탁 좀 들어줘.”
아이가 불쑥 내민 건 웬 브로치였다. 루카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 이거 모양이….
“이거 제국 병원 인장 아니야? 잠시만. 근데 이 이니셜….”
모양만 눈에 익었다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 가운데 적힌 티끌만 한 이니셜 또한 낯익은 거였다.
“이거 우리 아가씨 건데?!”
루카가 저도 모르게 손을 확 뻗자, 꼬마는 얼른 등 뒤로 브로치를 감췄다.
“도둑이야? 남의 걸 막 뺏게?”
“이거 우리 베스 아가씨 거야. 얘가 어디서 이걸 주워서는. 이리 내!”
“아니야! 나도 선물 받은 거야. 번트에서.”
감춘 브로치를 뺏으려 아등바등하던 루카의 손이 번트라는 말에 딱 멈췄다.
“의료봉사단이 도착했을 때 우연히 선물 받았다고. 이 괴팍한 마귀할멈아.”
“정말…?”
하긴. 베스 아가씨라면 그러고도 남을 성싶었다. 그래도 루카는 의문스러운 눈길을 거두지 않은 채 팔짱을 꼈다.
“번트에서 아가씨를 봤다면서 왜 지금은 웨인에 있는 거야? 너 같이 어린애가 그 먼 거리를 쏘다닌다고? 설마 우리 아가씨에게 빌붙을 생각은 아니겠지?”
“그럼 넌 웨인에서 산다고 웨인에만 있어? 금방 외곽에서 도착하는 대여 마차에서 내렸잖아. 그리고 덜 자라긴 너도 마찬가지거든.”
“크흠.”
꽤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됐고. 나 한 번만 도와줘. 이걸 저 회사 안에 있는 공작님께 드려야 잔금을 받을 수 있는데, 나는 못 들어가게 해.”
잔뜩 귀찮은 얼굴로 아이가 손을 뻗은 곳은 클리프 군수회사였다.
“저기 공작님이…?”
“장터에 팔려고 갔더니 어떤 공작님이 이걸 사시겠다고 하셨어. 다만 값을 다 치르지 못하셔서 다음날 회사로 오면 잔금과 브로치를 바꾸기로 했다고. 근데 시커먼 아저씨들이 못 들어가게 막잖아.”
여전히 시건방진 말투긴 했지만, 아이의 얼굴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나는 그 돈으로 여관비도 내야 한다고. 안 그럼 또다시 보호구역 골목에서 자야 한단 말이야.”
보호구역이란 말에 루카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러고 보니 아이의 옷은 여름옷이라기보단 겨울옷이 낡아서 얇아진 것 같았다.
자꾸 마음 약해지게. 몇 번 고민하던 루카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줘. 나는 몇 번 로비에 간 적이 있어서 봐줄 거야.”
브로치를 넘겨준 아이는 그제야 쭈뼛거리며 루카의 눈치를 살폈다.
인제 와서 믿을만한지 고민하는 건가. 루카는 기가 막혀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잔금 받으면 전해줘야 하니까.”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었다.
예정에 없는 클리프 군수회사를 가는 게 영 내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 밤중에 잔금을 받아야 한다고 길을 헤매는 아이에게 매몰차게 굴 수도 없었다. 터벅터벅 걸어가면서도 서늘한 공작의 얼굴을 떠올렸다.
“정말 아가씨를 좋아하나? 이런 브로치까지 눈에 보이면 사들이게.”
몇 번 아가씨의 뒤를 몰래 밟으며 공작도 함께 보긴 했지만, 노상 찜찜하기만 했다. 제아무리 잘생겨도 그리 차가운 얼굴이라니. 하지만 아가씨는 그 무감한 눈동자를 마주하면서도 애틋해 보였더랬다.
하워드가 베스 아가씨를 이용해 먹는 못돼먹은 놈인 건 알고 있지만, 공작님을 좋아하면 결혼은 오히려 잘된 일이 아닌가? 아니지, 아니야. 루카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베스 아가씨 혼자만 좋아하는 모습은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계세요?”
평소와 달리 불이 꺼진 로비는 텅 비어있었다. 평소보다 더 깊숙이 들어가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언뜻 군수회사의 맨 위층만 불이 밝혀져 있던 게 기억났다. 거기에 계시나. 루카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랐다. 안 그래도 밤이라 음산한 기운이 뻗치는 건물엔 저 혼자 있는 것 같았다.
“저기, 공작님.”
집무실 문을 몇 번 두드려도 돌아오는 소리는 없었다. 애꿎은 노크 소리가 몇 번 더 이어졌다.
“진짜 신경 쓰이게.”
결국 루카는 문고리를 느릿하게 잡아 돌렸다. 그냥 가야겠다 싶어도 거리에서 자신을 기다릴 아이의 얼굴이 떠올라 어쩔 수 없었다.
잔뜩 긴장한 채로 빼꼼 문틈을 들여다봤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용기를 얻어 활짝 문을 젖히자 적막한 집무실 내부가 훤히 들어왔다.
“불만 켜놓고 어디 가셨담.”
만지작거리던 브로치를 테이블 위에 얌전히 놓았다. 돌아오시면 아이에게 잔금을 전달하시겠지. 루카는 제 할 도리는 다했다고 생각하며 홀가분하게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바깥에 있어야 할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루카의 고개가 이리저리 돌아갔다. 어디에도 밤톨만 한 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얘!”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몰랐다.
루카는 그렇게 한참을 보이지 않는 아이를 찾아 거리를 헤맸다.
* * *
베스는 훤히 드러난 목 언저리를 어색하게 매만졌다. 순백의 드레스가 조명을 받아 반짝이자, 새하얀 얼굴이 유난히 돋보였다.
“와, 베스 너무 예쁘다.”
“이야, 데베르 공작님도 이 정도면 침을 줄줄 흘리겠는데?!”
“딕시, 제발.”
아이네스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선 딕시를 잡아끌었다.
둘은 어쩌다 보니 가장 먼저 결혼식을 올리게 된 베스의 드레스를 봐주러 온 거였다.
“하워드 부인께서 편찮으신 건 마음이 안 좋지만, 덕분에 마담 보뜨네 드레스 구경도 하고!”
들뜬 마음을 감출 생각이 없는 딕시는 쉬지 않고 쫑알거렸다.
본래라면 진즉 문을 닫았어야 할 의상실이었지만, 예약된 손님이 예비 클리프 부인인 이상 밤이 새도록 불을 끌 생각이 없었다. 재단사 보뜨네가 새침한 얼굴로 베스의 드레스 매무새를 가다듬어 주었다.
“그래, 공작님도 궁금해하시겠다.”
뒤이어 결혼을 앞둔 아이네스가 제 일처럼 수줍게 말했다. 넥서스에선 결혼식 전까지 결혼 상대에게 드레스 입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 전례이기에 하는 얘기였다.
베스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직은 아이와 약속한 삼 주가 지나지 않았다. 그사이에 마음껏 설렘을 느끼는 자신이 한심했지만, 한편으로 이 시간이 영원하길 바랐다. 바보 같은 바람일 뿐이겠지만.
“…잘 모르겠어.”
생각해 보면 그 남자는 아무것도 없고, 심지어 말조차 못 하던 제게 청혼을 말했었다. 참 무모한 남자였다.
“공작님 눈에도 예쁠까?”
툭 튀어나온 순진한 물음에 아이네스와 딕시는 물론, 좀처럼 표정 변화가 없는 마담까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보뜨네는 데베르 공작이 베스를 데려온 날을 기억했다. 잔뜩 가시를 세운 채, 그를 거부하던 그녀의 모습 또한 눈에 선했다. 하지만 보뜨네는 어렴풋이 이날이 올 줄 알았다. 그 옛날, 카시우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데려온 여자도 이 여자와 생긴 게 비슷했으니까. 보뜨네는 비밀을 지킬 줄 아는 자였다.
“그러실 겁니다.”
깔깔한 목소리가 베스를 다독였다. 예사로운 말투였지만, 거울에 비친 베스의 머리카락이며 액세서리를 세심하게 만지는 손길에서 서툰 신부를 향한 다정함이 묻어났다.
“데베르 공작님은 미감이 좋은 편이라서요. 그분께서 선택하신 것들은 틀린 적이 없죠.”
그분이 선택하신 것은 틀린 적이 없다. 그 말이 베스의 가슴에 돌덩어리처럼 얹혔다. 자신은 이제 곧 그의 유일한 오점이 될 텐데.
베스는 서둘러 단상에서 내려왔다.
“가봐야겠어. 내일 새벽부터 회진도 있잖아.”
쫓기는 사람처럼 의상실을 벗어난 베스는 서둘러 작별 인사를 했다.
미끈한 목덜미를 훑는 손이 축축했다. 날씨 탓이 아니었다. 요사이 잠들지 못하는 날은 늘어만 갔다. 잠들지 말아야 할 때는 잠들고, 잠들고 싶을 때는 잠들지 못하고. 베스는 이런 순간이면 그 남자가 보고 싶었다.
홀로 걷는 길이 유독 멀게만 느껴졌다.
“베스.”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베스.”
다시 걸음을 떼려는 베스를 붙잡은 건, 아까보다 선명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베스는 저 앞에서 다가오는 데베르를 얼떨떨하게 바라봤다.
꿈이라도 꾸는 건가.
요즘은 저를 둘러싼 모든 것이 하도 달기만 해서 현실 같지 않았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겨울을 닮은 그의 향이 실려 오고 나서야 베스는 미소 지었다.
“번트에 다녀오느라 늦었어.”
그가 내민 손은 여름밤인데도 차가웠다. 늘 따뜻하기만 하던 예전과는 달랐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네가 좋은 기억으로 덮으라던 언덕이 보고 싶었거든. 원래는 꽤 끔찍한 기억이 자리하고 있던 터라….”
휘어지는 입매 옆에 희미하게 볼우물이 패는 것 또한 못 견디게 좋았다.
“우리가 언덕에 간 날, 왜 아무도 그곳에 없었는지 궁금하지 않아?”
뜻밖의 얘기였지만,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유독 다정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얘기든 그의 목소리로 듣고 싶었다.
데베르는 여자의 속도에 맞춰 걸음을 늦췄다.
“거긴 카시우스 공작의 처형장이었으니까.”
그러나 느릿할지언정 멈추진 않았다.
그는 천천히 목표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아주 어릴 때, 성에 첩자가 들어온 적이 있었어. 하녀로 위장해서 들어온 거였는데 안타깝게도 공작에게 들켰지.”
마주 잡은 손에 약간의 힘이 들어갔다. 누가 힘을 준 건지는 불분명했다. 틈 없이 마주 잡은 손 사이로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비집고 들어갔다는 사실만이 분명했다.
“그래서 공작은 번트의 모든 이가 볼 수 있는 언덕 꼭대기에서 하녀를 태웠어. 마침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라 연기는 성까지 흘러들었고. 그게 내가 태어나 처음 맡은 시체 냄새야.”
숙소의 붉은 담장 아래에서 마침내 둘은 멈추어 섰다.
“본보기. 번트의 언덕은 배신의 본보기야. 하지만 이젠 내겐 아니지.”
데베르는 베스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미처 의상실에서 다 빼지 못한 머리 장식 하나가 그의 손에 걸렸다. 눈이 내린 겨울 꽃가지를 본뜬 장식이었다.
“…네가 그 기억 속으로 끼어들었잖아.”
잠시간 서로 눈이 마주쳤지만, 둘 중 누구도 먼저 입을 떼지 않았다.
“내일 봐.”
마지막 인사와 함께 데베르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베스는 무슨 약속인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그는 이미 등을 돌린 뒤였다.
갑자기 홀로 번트라니. 석연찮은 마음을 안은 채 숙소로 들어섰다. 그래도 오늘은 오랜만에 그를 봤으니 편안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달콤한 꿈을 꾸는 지금만큼은 많은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베스 얼른 일어나! 네 쥐방울이 지금 난리가 났다고!”
멍한 베스를 흔들어 깨운 건 딕시의 새된 목소리였다. 선잠이라도 들었던 걸까. 쨍한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귓가로 꽂혔다.
대체 무슨 소리지. 딕시는 숙소를 나갔는데….
병적으로 밀려드는 수마에 베스는 비척거렸다.
그 순간, 부정할 수 없이 선명한 목소리가 그녀의 심장을 흔들었다.
“루카한테 지금 난리가 났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