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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22화 (122/206)

122화

“크… 카아…시우.”

허옇게 핀 입술 새로 나오는 이름은 분명 카시우스였다. 연신 화들거리는 팔다리에서 자신이 뱉는 이름을 향한 공포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 속에 여실히 드러나는 증오.

데베르는 제 아비를 향한 낯선 여자의 증오 앞에서 흔들렸다.

일말의 정신조차 온전치 못해 제 이름 하나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여자가 기를 쓰고 카시우스를 부르고 있었다. 심지어 멀겋게 허공만 보던 눈동자에 찰나이지만 이지까지 스치면서.

데베르의 눈빛이 순간 기이하게 비틀리더니, 비쩍 마른 여자의 어깨를 붙들어 시선을 맞췄다.

“으… 으읏.”

여자는 가까이 다가오는 잿빛 눈동자가 싫은지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카시우스를 알아?”

그의 물음에서 약간의 조급함이 묻어났다. 끓는듯한 신음 외에 들려오는 소리가 없자, 그는 재차 물었다.

“카시우스를 아냐고 물었어. 카시우스 클리프.”

코펠은 버려진 곳이나 다름없었다. 후미지고 낡은 정신 병원 내지는 요양병원과 감옥만이 즐비한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하릴없이 죽음을 기다리는 여자가 카시우스를 향해 증오를 내비칠 일은 없었다. 지독히도 결벽적인 선대 클리프 공작이자, 그의 아버지가 이런 여자와 어울렸을 리는 만무하니까. 데베르가 아는 한은 그랬다.

그때, 열린 창밖에서 마차 한 대가 서는 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뜻밖의 모습을 드러낸 이는 루카였다.

데베르는 여전히 떨고 있는 여자를 돌아봤다. 분명 이 여자를 찾으러 왔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그는 아까보다 더 거세게 여자의 어깨를 붙들었다.

“말해. 베스가 누구야.”

“베, 베. 벳.”

보아하니 반응하는 단어는 카시우스와 베스뿐이었다.

데베르는 밑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눈살을 찌푸렸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나마 이 여자가 헛소리라도 하는 순간을 붙들어야 했다.

“베스가 혹시 딸이야? 카시우스는 어떻게 알지?”

“베, 베.”

여자의 관자놀이를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데베르가 여유 없는 손길로 젖혀진 커튼을 다시 닫았다. 타박거리는 구두 소리는 이제 마지막 층을 오르고 있었다.

“얼른 지껄여.”

거칠게 여자의 아래턱을 열었다.

“베스가 죽는 꼴 보고 싶어?”

습관처럼 튀어나온 협박이었다. 적군과 마주 보던 군대장 시절이 빌어먹게도 길어 나온 말일 뿐, 딱히 어떤 의미도 없었다. 하지만 때론 제대로 조준하지 않은 총알이 적군의 심장을 뚫는 것처럼, 돌연 여자의 희끄무레한 눈동자가 영민하게 번뜩였다.

곧이어 들려온 건 소름 끼칠 정도로 분명한 목소리였다.

“내 딸을 또다시 건드리면 카시우스, 네 목을 따 버릴 거야…!”

여자의 어깨를 붙들고 있던 데베르의 손이 탁 풀렸다. 베개 밑으로 푹 고개를 떨군 여자는 몇 번 부르르 몸을 떨더니 이내 정신을 잃었다.

“어디 계신 줄 아니까 확인만 하고 갈게요.”

낭랑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데베르는 여자가 누운 침대와 벽면 사이에 커튼을 단단히 치고, 그 뒤의 캐비닛 그림자에 대충 몸을 숨겼다. 다행히 멀건 커튼에 그의 그림자가 비치진 않았다.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침대와 집기가 어지러이 놓인 빈 병동은 불청객의 출입을 숨기기에도 용이했다.

“저번에 계시던 분하고 다른 분이시네요.”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죠. 전부 돈이나 벌려고 잠깐 왔다가는 뜨내기들이지.”

퉁명스러운 중년 여자는 앳된 방문객이 성가신 듯 보였다. 얼른 해치우고 내려가고 싶은지 병동 문턱에 서서 손가락으로 침대만 가리켰다.

걸음은 점점 가까워졌다. 마침내 루카와 데베르 사이엔 나풀거리는 커튼 한 장만이 놓였다.

“다행히 괜찮으신가 보네.”

아이는 이제껏 여자의 상태를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는 영 미덥지 않은 꼴이라 여긴 모습마저 괜찮은 정도라고 판단하고 있었으니까.

“그럼 전 가볼게요. 아, 참!”

“뭐요, 또?”

“이곳에 누가 왔다 가진 않았죠?”

“어이구, 별걱정을 다 하시네. 여긴 개미 새끼 하나 얼씬 안 하니까 걱정 말고 얼른 가세요.”

“제가 왔다는 것도 비밀이에요.”

“나 원 참, 물어보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서 웬 비밀 타령. 나야 다음 주 되면 다른 데로 가니까, 다음에 오는 사람하고 비밀에 부치던가.”

“대체 말을 왜 저렇게 하는 거람.”

서로의 언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연신 구시렁거리는 목소리가 복도 너머로 잦아들었다.

다시금 병동에 적막이 내려앉자, 데베르는 피곤한 듯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병원을 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여자를 살폈을 때, 그녀는 멍하니 눈을 뜨곤 있었지만 이전과 같이 초점 없는 눈동자였다. 더 이상 무언가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처음 병원을 들어왔을 때처럼 간호사들과 간병인들의 눈을 피해 밖으로 나왔다. 병원에서 얼마쯤 떨어진 곳에 세워진 차를 향해 걸어가자, 저 멀리 웨인으로 돌아가는 마차가 보였다.

‘어릴 적에 보호구역에 잠시 있었어요. 그곳에서 소위 삼촌이라 불리는 사람이 제게 어머니가 있다고 했어요. 절 낳다가 그렇게 됐다고…. 제가 간호학교에 갔단 걸 알고, 병든 어머니의 안위를 들먹이며 콜린스 공작님 몰래 가끔 돈을 요구했어요.’

이토록 맹랑한 거짓말이라니. 베스는 분명 코펠에 있는 이는 자신의 어머니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불현듯 정신을 찾은 여자는 ‘베스’를 자기 딸이라 말했으며, 카시우스를 들먹였다. 그리고 그런 여자를 찾아 하워드가의 시녀까지 왔다.

베스를 닮은 정신 나간 여자. 이미 죽어버린 카시우스. 넥서스에서 꽤 명망 있는 하워드가. 아, 검은 머리의 깡마른 여자아이를 키웠다는 번트의 주사쟁이까지.

어울리지 않는 네 개가 어지러이 섞여 그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어느새 그의 손에서 피어난 시가 연기가 자욱하게 길 위로 퍼져나갔다. 몇 대의 시가가 바닥으로 떨어질 때까지 그는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사이, 한 가지 끔찍한 전제가 새로이 떠오르긴 했다. 피식, 마른 시가 새로 웃음이 새 나왔다.

“진짜면 꽤 꼴이 우습겠어.”

차는 클리프 성으로 향했다.

갑작스런 영주의 방문에 관리인 체프가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어휴, 공작님! 미리 말씀도 없이.”

데베르는 그는 본 척도 하지 않고, 서재로 향했다. 전화를 거는 손등에 불편한 심기를 대변하듯 시퍼런 힘줄이 돋아났다.

전화교환원이 신호를 잡기까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이내 익숙한 목소리가 건너왔다.

[네, 공작님. 올리버입니다.]

“아버지에게 여자가 있었나요.”

[네?]

“카시우스 클리프 공작에게 따로 여자가 있었는지 묻습니다.”

빙빙 돌릴 여유는 없었다.

혹시. 아주 만약에. 그 정신 나간 여자가 카시우스의 정부이고, 그 딸이 베스라면. 그래서 몰래 해산한 여자가 모종의 이유로 번트 보호구역에 숨어 딸을 키웠고, 뒤늦게 하워드 백작이 그 딸만 거둔 것이라면. 그렇다면 제 생모를 못 본 척하지 못하는 베스가 루카를 통해 알음알음 정보를 통하는 것도 이해가 가는 바였다. 그리고 부득불 그와 결혼하지 않으려는 것까지.

기가 막히는 전개였지만, 모순적이게도 지금으로선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아버지가 천박하게 아래를 놀리고 다녔는지를 묻는 겁니다.”

그답지 않은 저열한 말이 기어 나왔다. 그만큼이나 우습고 꼴사나운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집사의 말에 데베르는 헛숨을 내뱉었다. 제 아버지를 향한 탄식을 대신해 나온 것이었다.

[공작님께서도 선대 클리프 공작님을 아시지 않습니까. 얼마나 적통을 중시하시는지…. 그리고 이런 말씀은 드리기 정말 외람되나… 선대 공작님은 그분보다 낮은 자와 몸 섞는 것에 치를 떠셨습니다. 의사의 치료조차 꺼리셨는걸요. 심지어….]

데베르의 목에 불툭, 핏대가 섰다.

“괜찮으니 말씀하세요.”

[클리프 부인님과의 잠자리조차 경멸하셨던 분입니다.]

카시우스에겐 제 아내조차 정략의 일부일 뿐이었다. 정통한 클리프가를 잇기 위한 수단이자, 지지 않는 클리프가의 위세를 보여줄 트로피.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가장 비참하게 시들게 만든 이가 바로 카시우스였다.

그나마 베스와 남매는 아니니 다행이라 해야 하려나.

데베르의 거친 손길에 단추 몇 개가 바닥을 굴러갔다. 하지만 숨통이 이리 막히는데 지금 이 감정을 안도라고 할 수 있을까.

[갑자기 지난 일을 물으시는 연유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혼외 자식에 관한 부분만큼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누군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던가요?]

“아닙니다. 이만-”

그때, 눈치 없는 관리인이 끼어들었다.

“공작님, 주무시고 가실 방을 준비해놓았습니다.”

그 순간, 데베르는 알았다.

가장 두려운 것을 회피하기 위해, 자신이 이리저리 길을 비틀고 있다는 것을.

뻣뻣하게 굳어 있던 입매가 천천히 벌어졌다.

“…아버지가 계실 때, 번트의 관리인 역할을 했다는 남작가. 그 남작가를 알아봐 주세요.”

결국 베스 제인스에 관한 모든 단서는 번트로 모이고 있었다.

클리프의 상징이자, 클리프의 모든 것이 있는 번트로.

“그리고.”

문득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닳을 대로 닳은 몸은 이젠 약이 없으면 금세 헐떡였고, 악몽에 시달렸다. 언제 빌어먹을 환영이 저를 잡아 삼킬지 모를 노릇이었다. 오늘은 카시우스를 만나면 또다시 총구를 들이밀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웨인 초입으로 가면 지금쯤 그 아이가 오고 있을 겁니다. 그러면….”

읊조리는 듯한 목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어느 순간 정신을 잃은 것 같기도 했다.

* * *

루카가 폴짝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꽤 오래 마차에서 궁둥이를 붙이고 있었는데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머릿속은 온통 베스 아가씨에게 전해 줄 소식으로 가득했다.

어머니가 코펠에 무사히 도착한 걸 아시면 엄청 기뻐하시겠지.

루카는 제 친언니처럼 베스를 따랐다. 오늘의 코펠 행도 누가 시킨 것이 아니었다. 요즘 들어 자주 지쳐 보이는 아가씨를 기쁘게 하기 위한 저만의 계책이었다. 새로운 소식을 핑계 삼아 병원을 들를 생각에 발걸음이 들떴다.

“맞아, 지금쯤이면 숙소에 계시겠지?”

문득 늦은 시각을 떠올리며, 장난스레 몸을 돌릴 때였다.

“엇.”

그런 루카의 앞으로 작은 그림자가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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