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아더는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는 수십 개의 눈을 응시했다.
그러겠노라는 대답 외에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자신은 병든 군주의 강력하지 못한 대리인일 뿐, 언성을 높이며 그에 반하겠다는 뜻을 가감 없이 내비치는 귀족 대신들을 내칠 힘은 아직 없었다.
그래, 아직. 아직은.
“원하시는 게 데베르 공작입니까.”
순간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잔뜩 가벼이 입을 놀릴 때는 언제고 이젠 다들 침통한 얼굴로 서로의 눈치를 볼 뿐이었다.
애매할 것이다. 누구에게 줄을 서야 할지 미처 확신이 서지 않을 테니. 정해진 깃대를 이어받는 것처럼 나타난 황자를 견제하기도 해야 하지만, 막상 척질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새로운 군주는 언제나 양날의 검이었다. 자신의 검이 된다면 그보다 강력한 것이 없을 테지만, 상대의 검이 된다면 그만한 낭패도 없다.
전쟁으로 세워지고, 그 전쟁으로 부강해진 넥서스의 패착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정통 따위 상관없이, 가장 막강한 세력이 뒷받침하는 자만이 황제가 될 수 있다는 것. 초대 황제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만약 웨인 클리프가 작정하고 초대 황제를 쳤다면, 어쩌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데베르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선황의 갑작스런 서거 덕분에 급작스럽게 황위에 오른 호이든은 아직 민심을 얻지 못한 터였다. 그렇다 해서 호이든에 반하는 이 모두가 아더를 지지하는 것도 아니었다. 황후의 소생도 아닌, 브리틴의 한미한 귀족 여식의 소생인 아더를 차기 황제로 탐탁지 않아 하는 이들 또한 넘쳐났으니까.
아더는 자신을 둘러싼 기막힌 우연과 운을 모르지 않았다.
“배제라니요. 말씀을 똑바로 하시지요. 데베르 공작은 제 발로 나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폐하께서 편찮으신 지금, 괜한 말로 분란 일으키지 마십시오.”
이들처럼 아더 메이너에게 기대를 거는 순진한 자들 또한 있지 않은가.
아더는 잠시간의 여유를 더 갖춰보기로 했다. 적당한 웃음과 농담으로 날 선 분위기를 죽이고, 중도를 지향하는 말로 양쪽 그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다. 그저 견뎌보려는, 또 살아남아 보려는 방책 중 하나였다.
지루한 시간이 지나가고 시끌하던 사위가 고요해지고 나서야 아더는 서류철에 숨겨진 청혼서로 시선을 떨구었다.
데베르 클리프. 그 옆에 나란히 적힌 이름, 베스 하워드.
둘의 이름 사이엔 황제의 승인을 기다리는 단 하나의 빈칸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엔 아더의 상념을 담은 잉크 얼룩 하나가 번져가는 중이었다.
“메이너 공작님.”
불시에 들려온 목소리에 급하게 서류철을 덮었다.
“아, 콜린스 공작님께서 아직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생각이 많아 보이셔서 잠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콜린스는 예의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그에게 다가왔다. 아더는 아무렇지 않게 서류철을 테이블 한구석으로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란히 창밖을 보는 두 사람의 앞으로 그 어느 때보다 싱그러운 황궁의 여름 전경이 펼쳐졌다.
“쉽지 않군요.”
먼저 입을 뗀 건 아더였다.
“저도 마찬가집니다. 골방의 의사 흉내나 내다가 갑자기 황궁으로 오니 많은 것이 어색하네요.”
“절 위로하려고 기다리신 겁니까?”
아더는 씩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능글맞게 굴며 눈까지 샐쭉이 접으면 콜린스는 노상 그렇듯 껄껄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릴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는 맞장구를 치는 대신 정갈하게 고개를 숙였다. 평소와 다른 그의 행동에 아더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황제 폐하의 전갈을 받고 왔습니다.”
“….”
짧은 침묵 뒤로 콜린스가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 라프넬 공주님과의 혼사를 대신들에게 전하라는 황명을 받았고요….”
담담한 척 구는 아더의 얼굴 위로 실금 같은 균열이 갔다.
“후처는 그 이후에 정하시겠다고,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후처는 없을 것이다. 그저 달아오른 치들의 불만을 잠식시키려는 핑계일 뿐.
“…아저씨는 폐하의 명을 지키시겠죠.”
의미 없는 물음이었다. 그는 콜린스 몰리였다. 언제고 같은 태도로 넥서스의 충신 역할을 한 공작이었다. 사사건건 카시우스와 맞붙었을 때도, 황제가 전쟁을 결정하면 그 즉시 입을 다물고 묵묵히 야전 병원 짐을 꾸렸던 자였다. 현 황제가 호이든이 아니라면 모를까, 아무리 정신 나간 황제일지언정 황명인 이상 지킬 게 자명했다.
“황명이잖습니까.”
잔뜩 고통스럽게 주름진 얼굴과 달리, 흘러나온 대답이 너무도 단호해 아더는 쓴웃음이 올라왔다.
“조금만… 아주 잠시만 시간을 주세요. 그 정도는 부탁드릴 수 있겠죠?”
시간을 조금만 더 달라. 결국 라프넬과 똑같은 말을 뱉었다. 아, 그 아이도 이런 기분이었으려나. 가라앉는 마음을 애써 추켜 올렸다.
“보셨다시피 지금은 분위기가 어지러워요. 섭정에 입을 떼는 자도 많고요. 굳이 결혼 소식까지 전해 기름 부을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라프넬과의 국혼은 진행될 것이고, 저 또한… 콜린스 공작님과 같은 황명을 받았으니까요.”
“신하의 도리죠.” 그리 말하며 아더는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제야 희미한 웃음을 띠는 콜린스를 보며, 그는 슈트 단추를 틈 없이 마저 채웠다.
“먼저 가보세요. 저는 못다 한 일을 마무리 짓고 가겠습니다.”
아더는 멀어지는 콜린스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뻣뻣하게 굳은 다리를 마침내 움직였을 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푸르던 황궁 정원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걸 보고서야 제법 시간이 흘렀겠거니 생각할 뿐이었다.
“아무도 뒤따르지 마라.”
서늘한 음성으로 뒤따르는 시종들을 물렸다.
그의 걸음은 어릴 적 라프넬과 지겹도록 쏘다니던 후원 오솔길로 향했다. 한때는 별궁으로 향하는 제일 빠른 길을 발견했다며 그녀와 신나게 뛰어다니던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추악한 비밀을 본 이후, 단 한 번도 걸음 하지 않은 길이었다.
“라프넬에게 내가 왔다고 알려.”
“이미 알고 있어. 네가 후원 오솔길에서 오는 걸 봤어.”
그 사이 생기를 잃은 것만 같은 궁 안에서, 그만큼이나 파리한 안색의 라프넬이 나왔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새파란 눈동자만 유난히 도드라졌다.
침실 문이 닫히고 마주 본 찻잔 사이에서 김이 흘러나왔지만,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테이블보에 가려진 라프넬의 무릎 위엔 편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찻잔의 김이 모두 식을 무렵, 그녀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편지를 거세게 쥐었다.
“아더, 차라리-”
“콜린스 공작도 알고 있어.”
하지만 아더가 보지 못한 편지는 이내 맥없이 그녀의 무릎 위로 다시금 떨어졌다.
“호이든이 콜린스에게 너와의 국혼을 알렸어. 대신들에게 전하라고.”
“…빌어먹을 영악한 새끼….”
대번에 라프넬의 잇새로 욕이 기어 나왔다.
호이든은 이번에도 아더를 온전히 믿지 않았다. 라프넬과 둘이서 어떤 작당을 꾸밀지 모른다 판단했으니 콜린스를 부른 것이었다. 콜린스 몰리라면 이변 없이 그의 일을 해낼 테니까.
“아더, 그래도 설마 나를-”
“버텨.”
아더는 선명한 목소리로 똑같은 말을 곱씹었다. 그건 자신에게 하는 말과도 비슷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어. 버텨. 견뎌.”
식어버린 두 사람의 찻잔 사이로 청혼서 한 장이 툭 던져졌다. 겉면의 클리프 인장을 라프넬이 모를 순 없었다.
“데베르는 베스와 결혼해. 난 황제의 대리인으로서 이 청혼서를 승인했고.”
아더는 라프넬의 어깨를 붙잡았다. 빗나가는 시선을 기어코 제게 맞추며 잔인할 만큼 냉정하게 말했다.
“지금 넥서스는 혼란스러워. 데베르라는 패까지 사라졌는데 이리저리 귀족 놈들에게 팔려 가다시피 품평 당하며 험한 꼴 보고 싶어? 그럴 바엔 차라리 호이든의 곁이 나아. 서거 후엔 재혼할 수도 있고.”
“재혼…?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이니? 한 번 황후가 됐는데 대체 어디로. 누구에게. 난 호이든이 죽고 나면 그저 산 송장으로 살아야 하는 운명이야. 그걸 몰라?!”
황위가 위태로운 지금, 권력에 눈이 먼 치들이 노리는 것은 호이든의 곁만이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노골적으로 라프넬의 곁을 노리는 이들 또한 아더의 눈에 띄었다.
“내 말 들어. 그게 가장 안전하게 널 지키는 길이니까.”
“…네가 생각하는 너만의 길이겠지.”
라프넬의 손 아래에서 편지 귀퉁이가 거칠게 구겨졌다.
“데베르 클리프만 원하는 모든 걸 얻는구나. 넌 이번에도 최선이란 변명으로 자신을 속이고.”
물기 어린 눈동자에 표독스런 기운이 뻗쳤다. 그러나 테이블 위의 청혼서를 노려보는 눈길에 찰나의 쓸쓸함이 스쳤다.
“모두를 지킬 수는 없어. 만약 지켰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네 착각이야.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너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하는 거짓말.”
라프넬은 저와 쌍둥이처럼 닮은 아더를 쳐다봤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그를 닮아 한때는 너무 기뻤고, 한때는 안도했으며, 지금은 한없이 미웠다.
“넌 처음부터 그 누구도 지킬 생각이 없었던 거야.”
* * *
데베르는 웨인의 흔한 수행인들이 입을 법한 밋밋한 슈트를 걸치고 있었다. 몰고 있는 차 머리의 클리프 문장은 저택의 정문을 나서자마자 떼버린 지 오래였다. 데베르 공작이 몇 날 며칠을 수상한 것에 취해 저택에 칩거한다는 소식지 속 얘기와는 판이한 모습이었다.
코펠 432-19. 전장에서 숨어버린 베스를 뒤쫓던 지리한 나날 중, 정신 병원으로 향한 날을 기억했다. 거기서 스스로를 베스라 하는 미친 여자를 만났지만, 그때는 시커먼 머리카락 말고는 그 여자와 베스 사이의 어떤 실마리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찾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삶의 유일한 빛인 베스 제인스를 섣부른 의심으로 더럽히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건 베스를 위한 것이 아닌, 데베르 자신을 위한 욕심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베스가 스스로 보호구역 출신임을 소식지에 밀고한 순간부터 희미하기만 하던 의심은 어떠한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 여자의 유일한 사망금 수취인인 엘리젯 바머는 번트 보호구역에서 평생을 썩었으며, 똑같은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채 자신을 베스라 칭하는 여자는 번트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자, 넥서스에서도 손꼽히게 인적이 드문 코펠에 있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일까. 그 모든 게 클리프라는 울타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차는 정확히 코펠 432-19에서 멈췄다. 역시나. 이전에 왔던 병원과 같은 곳이란 걸 알자 헛웃음이 나왔다.
데베르는 조용히 계단을 올랐다. 타성에 젖은 간호사들의 눈을 피하기란 쉬웠다.
맨 꼭대기 층. 가장 끝 침대. 커튼에 가려진 그곳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뗐다. 태양 빛이 뜨거운 여름날임에도 희멀건 커튼을 젖히는 손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오랜만이군.”
살아있긴 한 건가. 여자의 까맣게 죽어버린 듯한 눈동자는 여전히 허공을 향해있었고, 그 사이 병이 더 깊어진 건지 이젠 베스라는 헛소리조차 하지 않았다.
거친 손끝이 여자의 턱을 그의 쪽으로 가볍게 돌렸다. 그러자 멈춘 것 같던 눈동자가 스르르 옆으로 미끄러졌다.
“날 봐.”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찰나, 별안간 여자가 온몸을 벌벌 떨더니 고개를 휙휙 내젓기 시작했다.
“크… 크아….”
데베르가 무언가 더 물을 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의 턱을 억세게 쥐었다.
“닥치고 내 말 들어. 베스를-”
하지만 그 물음은 끝맺지 못했다.
“크아… 카아… 시.”
“뭐…?”
“카…카시…우…… 스.”
카시우스.
두려움에 잠식된 새카만 눈동자는, 그를 보며 그의 아버지를 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