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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20화 (120/206)

120화

베스는 창턱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입꼬리가 간지러웠다. 그녀를 보자 클랙슨에서 손을 떼는 기다란 실루엣은 분명 데베르 공작이었다.

그 순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자신은 저 미친 남자의 정신 나간 짓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먼저 가볼게.”

뛰어 내려가는 계단의 쿵쿵거리는 소리보다 심장께에서 울리는 고동 소리가 조금 더 빨랐다. 베스는 자신이 꽤 맹목적으로 데베르 클리프란 남자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저 남자가 그녀를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말이다.

만약 데베르가 낡은 오두막에서 만난 첫 친구가 아니었더라도, 채 익어보지 못한 첫사랑이 아니었을지라도 변하는 건 없었을 것이다. 시간을 돌이켜 행여 전장에서의 그 숲길이 첫 만남이었다 해도 분명.

“답장해주러 왔어.”

또다시 사랑하겠지.

눈앞의 남자는 베스에게 그런 존재였다.

“오실 줄은 몰랐어요.”

“꽤 노골적으로 적어 보냈던데. 내가 틀렸나 봐?”

“오늘은 일찍 끝난다고… 그 뜻이 전부였는데.”

“그 뜻이 전부가 아니면, 어떤 뜻이 더 있는데.”

남자의 목소리에 희미한 웃음기가 묻어났다.

“아니. 제 말은.”

허둥지둥 무슨 말인가를 하는 여자의 뺨이 발그레했다. 잠자코 그 변명을 들어주던 데베르는 시선을 내리떴다.

닳는 구석이 없는 여자였다. 그게 자신이 답을 찾지 못하게 하는 덫이란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타. 구경꾼들이 많은 것 같으니까.”

밤이 깊은 웨인의 거리를 달리는 차는 몇 되지 않았다. 클리프가로 이어지는 길목부턴 오직 공작의 차만이 헤드 라이터 불빛을 밝히고 있었다.

베스는 흐릿한 빛에 용기를 내 그의 옆모습을 훔쳐봤다. 도둑고양이처럼 저를 힐끔거리는 시선을 얼마간 모른 척하던 데베르는 창턱에 올린 손으로 제 입가를 가렸다.

“왜 웃으세요?”

눈치 또한 그리 빠른 여자가 아니었다.

야트막한 그의 볼우물은 갈수록 깊게 패어갔지만 돌아오는 답이 없자, 베스는 금세 고개를 휙 돌렸다. 제법 토라진 티를 내는 것이었다.

데베르는 운전대를 쥔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함께한 마지막 겨울의 베스 제인스는 지금보다 조금 더 정적이고 감정을 숨기려는 편이었다. 그마저도 능숙하게 굴지는 못했지만, 지금과는 약간 달랐다.

하지만 데베르는 지금의 베스에게서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꼭, 비슷했던 때가 있었던 것만 같은….

그러나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되는 이 찰나의 순간이 나쁘지 않았다. 어떤 모양의 베스이건 제 곁에 있으면 그뿐이었으니까.

“답장이 뭐예요…?”

슬그머니 그에게로 돌아오는 말간 눈동자를 보면 누군들 그럴 것이었다.

“답장은 데리러 온 거로 된 거 아닌가.”

아, 베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가까워져 오는 클리프 저택을 바라봤다. 데베르는 애써 감추는 여자의 서운함을 모르지 않았다. 어쩌면 꽤 순진하게 그의 짧은 답장을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같은 촉으로 만들어진 것과, 공작님께서 쓰시는 잉크를 사서 갔고요.’

하지만 만일. 정말 만일 곁에 있는 이 여자가 만년필을 가져간 게 맞다면. 그리고 루카란 아이가 클리프를 흉내 낼 수 있는 만년필을 굳이 찾아낸 거라면.

답장은 보내선 안 되는 것이었다.

어쭙잖은 감상에 젖어 이용해 먹을 거리를 던져주는 멍청이가 어디 있을까.

목적한 바를 위해 목을 내주는 척은 할 수 있지만, 진짜 목줄을 내어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악조차도 목적의 수단일 뿐이라 말했는데, 고작 위선쯤이야. 차에서 내린 데베르는 흠잡을 데 없는 태도로 베스를 에스코트했다.

로비엔 집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계실 방은 준비해 놓았습니다.”

“먼저 올라가 있어.”

베스는 저도 모르게 데베르의 소매 끄트머리를 붙잡았다.

“어디 안 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손에 쥔 옷을 천천히 놓을 수 있었다. 뒤늦게 집사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랐지만, 이번엔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곳입니다.”

얼마 전, 번트에서의 기억이 아직 선명했기에 집사가 안내하는 방 또한 공작부인의 방일 것임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커다란 방 안에 또다시 저 홀로 덩그러니 남겨지자 어쩔 수 없이 자꾸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차라리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방이었으면 더 편했을 텐데.

그 남자의 세상은 온통 검은색이었다. 쥐고 있던 총도, 새카맣게만 보이던 짙은 감색의 군복도, 어둠이 지면 유난히 다정해지던 것까지. 그런데 푸른색이라니. 마치 언제라도 도착할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것만 같은 엷은 물빛의 공작부인 방은 베스를 짓눌렀다.

가만히 숨을 죽이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달칵,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약간의 놀라움이 담긴 눈이 침대 곁의 문을 한번, 그 문 새로 나타난 데베르를 한번 쳐다봤다. 그러나 시선은 곧 바닥으로 떨어졌다.

맞은편 소파에 기대앉은 데베르는 고개를 뒤로 뉘었다. 한 줌도 되지 않는 여자의 뒷모습은 문을 열던 그 순간부터 거슬렸었다.

“그러고 있으니까 꼭 그때 같네.”

새하얗기만 한 천장을 훑은 잿빛 눈동자가 스르르 침대맡으로 향했다.

“말 못했을 때.”

안 그래도 모아 쥔 여자의 손이 한층 더 깊숙이 오그라드는 게 보였다. 꼭 그 안에 감추는 것이라도 있는 것처럼.

“오늘은 여기서 자. 아침 일찍 차를 대기시켜놓을 테니까 병원은 걱정하지 말고.”

와중에도 결국 이 방에 베스 제인스를 들였구나, 하는 미미한 승리감이 밀려들었다.

“잠든 새에 내빼지 말라는 뜻이야. 같이 있자고 날 불렀잖아?”

마지막 말을 하며 가볍게 웃었다.

베스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같은 말을 해도 낯 뜨겁게 하는 재주가 있는 남자였다.

“왜 그렇게 봐.”

“신기해서요.”

“내가?”

“장난을 쳐도 장난스럽지 않으시잖아요.”

베스다운 말이었다. 적당히 엉뚱하고, 꾹꾹 제 진심만을 묻어내는 이 여자만의 말. 그녀는 별것 아닌 것으로도 그를 즐겁게 했다.

“그야, 난 네게 장난친 적이 없으니까.”

데베르는 테이블 위의 약통을 손에 쥐었다. 겉에 붙은 라벨지엔 제국 병원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어서 자. 약혼자와 사라진 영애가 다음날 졸고 있으면 구경꾼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어.”

잔뜩 눈에 힘을 준 여자를 향해 어깨를 으쓱한 그는 약 한 알을 입안에 밀어 넣었다. 들어올 때와 같은 문으로 나갈 때까지만 해도 옅게 웃던 그는, 등 뒤의 문을 닫자마자 곧 지독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아직 모양을 갖춘 약이 혀끝에서 재떨이 위로 뱉어졌다.

이젠 시간이 가길 기다릴 차례였다.

약쟁이 노릇을 청산하려 해독제까지 먹은 불쌍한 환자가 몽유병으로 헤맬법한 시간이 오길 말이다.

데베르의 걸음이 공작부인의 침실을 향했다. 캄캄한 사위를 밝히는 건 침대맡의 작은 램프 불빛이 전부였다.

“베스.”

그 불빛 아래 얌전히 눈을 감은 여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머리칼을 지나자 곧 동그란 어깨가 손에 닿았다.

“베스.”

나직한 부름에 천천히 몸을 일으키던 여자의 손이 그의 뺨을 향했다. 깜빡이는 눈에 잠기운은 없었다. 꼭 이 시간을 기다린 남자처럼, 여자 또한 지금을 기다린 것만 같았다.

약을 먹는 걸 눈앞에서 봤으니 몽유 증세 또한 예상했을 것이다. 데베르는 제가 제정신이 아닐 때, 유독 이 여자가 약해진다는 걸 알았다.

청혼서를 보내기로 결심하기 전날 밤에도 그랬다. 왜 책을 낭독하냐는 질문에 다시 말하지 못할까 두려워 그런다는, 결코 해 주지 않을 대답까지 들려줬으니까.

느릿하게 숨을 내쉬던 데베르는 여자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의 품보다 훨씬 작은 여자의 품속에 커다란 제 몸을 욱여넣고 한껏 약한 체를 했다. 그런 남자의 머리를 영악한 짐승의 머리통인 줄도 모르고 여자는 안쓰럽게 쓰다듬었다.

데베르는 저를 쓰다듬는 손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어울리지 않게 흉이 진 손끝에 입을 맞췄다. 그의 예상대로 베스는 피하지 않았다.

“…왜 없던 상처가 생겼어.”

흘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내 흉터는 전부 알잖아.”

바닥에 무릎 꿇은 채 올려다보는 그와 캐노피가 드리워진 침대에 앉은 여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하지만 베스는 이내 잡힌 손을 비틀어 뺐다. 어두운 그림자 속에 여자의 손이 숨어들었다.

“다쳤어요. 자수를 배우다가….”

“정말?”

여자의 무릎에 입술을 묻은 그의 목소리가 잔뜩 뭉개졌다.

“…정말.”

“거짓말.”

“정말로요.”

뻔한 거짓말을 뱉으면서도 저를 안아오는 작은 품에 데베르는 망설임 없이 파고들었다. 떨리는 숨으로 애정을 갈구하는 어린아이를 연기했지만, 눈동자 속의 혈기는 그 어느 때보다 짙게 가라앉고 있었다.

이젠 확신해야만 했다.

“그래, 믿을게. 네 말대로. 정말.”

더 이상 믿을 수 없구나. 이 여자의 말도. 행동도.

별 거 아니었다. 모른 척하던 답을 이제야 직시하게 된 것뿐이었다.

* * *

온통 금빛으로 가득한 복도를 내지르는 구두 소리가 정갈했다.

아더는 평소처럼 가벼운 차림이 아닌 정적인 슈트 차림이었다. 빗어넘긴 앞머리 아래로 여실히 빛나는 푸른 눈은 부정할 수 없는 황가의 상징이었다.

“아더 공작님 들어오십니다.”

시종의 말에 자리에 앉아 있던 귀족 대신들이 슈트 단추를 채우며 일어났다. 그 끝엔 이런 자리엔 웬만해선 나오지 않는 콜린스 공작 또한 있었다.

아더는 적당한 미소와 함께 정무실로 들어섰다.

“앉으시죠.”

공식적인 섭정의 첫날이었다.

기다란 테이블에 앉은 대신들의 표정은 예상한 대로였다. 섭정을 핑계로 상석에 앉은 황자를 향해 적당한 호감을 보이는 이 반,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는 이가 반이었다.

모른 척, 못 본 척. 아더는 몸에 익은 제 가면을 뒤집어썼다. 하지만 오래갈 수는 없었다.

“섭정이 시작되면 폐하만큼이나 넥서스의 정치와 군사를 잘 아는 자들이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서거하신 선황 곁의 유수한 가문들이 큰 공을 세웠듯이요.”

뾰족한 만년필 끝이 대신들은 보지 못할 서류철 안을 쿡쿡 찍었다. 고루한 치들의 말이 길게 이어질수록, 아더의 눈에 미약하게 남아있던 웃음기도 점차 지워졌다.

그 말이 뜻하는 바와 찾는 이가 누구인지는 너무도 쉬웠으니까.

“클리프 가를 더 이상 정무 회의에서 배제해서는 안 됩니다.”

쿡. 아더의 손짓이 멈췄다.

서류철에 가려진 새하얀 청혼서 위로 시커먼 잉크가 번져갔다.

“…다들 앞으로의 섭정에 대해 걱정이 많으시군요.”

꼭 더러운 물이 들어가는 제 마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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