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안다고…?”
라프넬이 멍하니 되물었다. 듣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듣고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어떻게. 네가. 그리고 황제까지.
라프넬은 제대로 뱉지 못한 물음을 대신해 눈동자만 굴렸다. 때론 조급해 보일지언정 당황하진 않던 그녀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알아.”
아더는 그리 답할 수밖에 없었다.
호이든이 아무리 제정신이 아닐지언정, 한번 뱉은 말은 기어코 이루고 볼 성정이란 것은 질리도록 체감했다. 이번에도, 결국은. 그 말도 안 되는 황명을 이룰 것이다.
“어떻게… 그건 너도 몰라야 할….”
라프넬은 넋이 나간 것 같았다. 귀족 대신들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부러 처연한 기색을 띠는 차림으로 온 것이, 정말로 그녀를 더 초라하고 남루해 보이게 만들었다. 흉내 내지 않고도 절로 파리해진 안색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언제부터 알았어?”
“선황제 폐하가 돌아가신 직후에.”
“너도 호이든이 알 때 함께 안 거니?”
“난 그보다… 이전에.”
여름인데도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맴도는 침묵을 대신해 내려앉는 바람이 무겁기만 했다.
아더는 그날을 기억했다. 어린 라프넬이 저를 지켜달라고 엉엉 울며 그의 황궁으로 찾아왔다 쫓겨난 날, 그는 데베르를 만난다는 핑계를 대고 남모르게 약을 챙겨 라프넬이 있는 별궁으로 향했다. 황궁의 외딴곳에 있는 별궁은 천한 출생의 라프넬의 모친을 숨기기 위한 적당한 방책이었다.
어린 아더는 살금살금 시종들의 눈을 피해 궁의 창문을 넘어 들어갔다. 당시엔 체구가 작고 말라 눈에 띄지 않기 쉬웠다. 별궁엔 시종이 몇 없는 덕도 있었다.
‘라프넬의 방이 어디더라.’
별궁은 호이든과 아더에겐 금기 구역과 비슷했다. 한 번도 정식으로 별궁을 둘러본 적은 없었기에 아더는 기다란 복도를 빙빙 헤매는 중이었다.
그때, 갑자기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렇게라도 봐서 다행이야.’
묵직한 남자 목소리였다.
계단참에서 숨을 죽인 아더는 조심스레 목을 뺐다.
‘당신이 없으면 난 이곳에서 숨이 막혀 죽을지도 몰라.’
라프넬의 어머니, 그리고 황제의 후궁이자 항간에선 정부란 멸칭으로 불리는 여자가 어느 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익숙한 얼굴의 남자는 라프넬과 똑 닮은 금발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친위대야.
아더는 숨을 참은 채 벽면에 고개를 바짝 기댔다. 그는 분명 아버지인 황제 폐하를 지키는 자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곧 토악질이 올라올 것만 같았다. 봐선 안 될 것을 본 기분이었다.
하지만, 설마….
어린 아더는 보고도 믿지 못할 진실을 부정하고 싶어 다시 한번 고개를 내밀었다. 시종 하나 제대로 없는 복도엔 밀회를 나누는 두 사람뿐이었다. 아니. 그곳엔 한 명이 더 있었다.
반대편 복도 끝. 아더와 같은 위치에서 똑같은 장면을 보는 라프넬이 있었다. 제 어머니의 손톱에 쓸려 생채기가 남은 하얀 뺨이 충격으로 떨리는 게 보였다. 기다란 복도 끝에 얼굴만 내민 라프넬은 작은 점 같았다. 상처받은 작은 점.
천천히 뒷걸음질 치던 작은 점은 이내 아래층으로 사라졌다.
아더는 잊지 못했다.
친위대 남자의 눈은 짙은 푸른색이었다.
“호이든은 어떻게 알아. 내겐 일말의 관심도 없었는데.”
“그 남자가 호이든을 찾아갔어. 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 비밀을 지키는 대가를 챙겨달라고.”
“당장에 나를 내칠 줄 알았는데.”
“그건….”
그땐 네가 쓸만한 패였으니까.
아더는 차마 전하지 못할 답을 혀끝에서 곱씹었다.
“알아. 폐하가 내게 공주라는 작위까지 준 이상, 일을 키우는 것보다 날 이용하는 게 낫다 여겼겠지. 내치는 건 언제라도 손쉬우니까.”
라프넬의 목소리엔 짙은 체념이 묻어났다.
피가 섞이지 않았을지언정, 이 아름답고 잔인한 황궁에서 살아남고자 평생을 서로의 목을 쥐고 살아온 시간이었다. 호이든이 라프넬을 쥔 만큼, 라프넬도 호이든을 알았다.
“우스웠겠다. 뻐꾸기 새끼가 너와 함께 자라는 걸 보는 게.”
“그렇지 않아, 라프넬.”
“유난히 날 감싸준다고 여겼는데 동정이었구나….”
그 말을 읊조리는 라프넬의 목소리엔 그 어떤 비아냥이나 노기도 없었다. 그저 미처 몰랐던 사실을 깨달은 아이처럼 고개를 작게 끄덕일 뿐이었다.
“그럼 폐하는 내가 혼인을 거절하겠다고 하면, 내 출생을 밝히겠다고 하시겠네.”
답은 뻔했다.
라프넬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흙이 묻은 치맛자락을 터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아더는 모른 척했다.
“생각할 시간을 줘. 아직 그 정도는 부탁할 수 있잖아.”
천천히 후원 그늘로 사라지는 라프넬의 그림자가 점점 짧아졌다. 항상 표독스럽게 세우던 가시가 사라진 그녀의 뒷모습은 어릴 적 아더가 기억하는 작은 점과 여전히 똑같았다.
작고, 불쌍한 나의 동생.
선황제의 애정이 떠나가고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그녀의 모친이 어린 딸을 학대하기 전엔, 아더와 라프넬은 둘도 없는 남매였다. 배가 다르다는 것 따위는 문제도 되지 않았다. 황궁 안의 외로움을 알아본 두 사람은 서로의 유일한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잔인한 비밀은, 그리고 지루한 시간은 많은 것을 변하게 했다.
바로 지금처럼.
제 궁으로 돌아온 아더는 침실이 아닌 서재로 향했다. 늘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있는 서재가 아닌, 그 옆의 창고처럼 쓰이는 옛 서재였다. 잠긴 문을 열고 들어간 그곳엔 먼지 날리는 고서들과 작은 테이블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즐비하게 투서가 쌓여 있었다.
아더는 피곤이 역력한 얼굴로 그새 새로이 더 쌓인 투서 한 장을 열었다. 판단력이 흐려진 황제의 정무 실태와 넥서스의 미래를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다음 장을 열었다.
이번엔 기울어가는 넥서스의 정세를 규탄하는 내용이었다. 결국 말하고자 하는 건, 그 중심에 있는 황제의 역량 부족이었다.
쌓이고 쌓인 투서들이 모두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넥서스가 또다시 변화하고 있다. 쌓여가는 투서는 그걸 알아본 이들이 한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였다. 누군가 제게 줄을 섰다면, 또 다른 누군가는 다른 이에게 줄을 서겠지. 팔자 좋은 황자는 황제의 재목이 안 된다 입을 떼던 이들은 그 옛날부터 있었으니. 그러다 결국 서로 칼을 겨눌 것이고 살아남는 자가 넥서스를 이어받게 될 것이다.
“하아….”
탄식 같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질끈 감았던 눈을 떠도 현실을 변하지 않았다.
일렁이는 램프 불빛에 손에 든 마지막 투서 한 장이 태워졌다. 끝이 새카맣게 그을리는 종이 끝에 ‘대의’라는 글자가 일렁였다.
* * *
나름 길었던 여름 해가 진 지 오래였지만, 클리프 군수회사의 집무실 불은 꺼지지 않았다.
“공작님, 편지입니다.”
그의 집무실 바깥에 서 있던 수행인이 편지를 가져다줬다. 이번에도 실링 된 직인은 제국 병원이었다.
[오늘은 일찍 끝날 것 같아요. -베스-]
짧은 여행이 끝났다.
웨인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서운한 얼굴을 하는 베스를 향해 데베르는 또 오면 된다는 말로 구슬렸지만, 여자는 “그래도요….”라며 아쉬움을 숨기지 못했다. 언뜻 또 올 수 있다는 그의 말을 믿지 못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도 스쳤다. 그러면서도 동그란 눈으론 연신 차창 밖의 멀어져가는 번트를 담는 게 퍽 사랑스러웠다.
베스는 찰나의 휴가 이후 더 바빠진 일상을 대신해, 틈이 나면 쪽지 같은 편지를 그에게 보내곤 했다. 그 속엔 요즘 따라 부상 환자가 잦아 병원에 일손이 부족해졌다는 얘기도 포함이었다.
데베르는 아직 단 한 번도 답신을 보낸 적이 없었다. 필요할 땐 수행인을 통해서 몇 마디 전할 뿐이었다. 늘 똑같이 핑계는 일이었다. 여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잠자코 알아볼 일이 있기도 했고, 조금 안달 난 얼굴이 보고 싶기도 했다. 그를 기다리고, 그 기다림에 지쳐 꽤나 애달파하는 얼굴이.
곧 창밖으로 병원을 향해 팔랑거리며 뛰어가는 베스의 시녀가 보였다.
‘그 아이의 부모가 브리틴에서 반역죄로 처형당했다고 합니다. 어린 딸아이 하나만 선처했고요.’
오늘 아침, 집사가 전해준 소식이었다.
고작 저 아이 하나를 뒤진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싶었지만, 데베르는 처음부터 다시 짚어볼 생각이었다.
하워드가 말한 사촌 여동생 얘기는 서류상으로도 항간의 소문으로도 모두 진실이었다. 베스가 전장에서 도망치던 날엔 실제로 배에 탔다는 승선 기록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결혼을 앞두고 소식지에 제 추문을 직접 밀고한 여자를 설명해주지는 않았다. 만년필 또한 마찬가지였다. 베스가 만년필을 가져갔다는 전제가 없으면 결국 원점이었다. 장인은 클리프가 뿐만 아니라 다른 가문의 맞춤 만년필도 제작하는 자이니, 우연히 저 아이가 제 월급으로 좋은 물건 하나를 사고 싶었을 수도 있다.
테이블 위의 놓인 손을 몇 번 두들기던 데베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답장을 보내줄 때가 됐지.”
짧은 밤을 베스를 달래며 보낼 생각은 없었다.
작은 방 안이 짐을 챙기는 세 사람의 목소리로 시끌시끌했다.
깜빡이는 노란 불빛 아래에 잔뜩 상기된 딕시의 얼굴이 비쳤다.
“내가 떼돈 벌어서 너희 호강시켜줄게.”
호기를 부리는 마른 어깨에도 들뜬 기색이 가득했다. 아이네스가 그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어깨에 힘 좀 빼. 벌써부터 그러니.”
“역시. 난 피 뽑는 것보단 돈 뽑는 게 적성에 맞는 것 같아. 결국은 이렇게 됐잖아?”
딕시는 제 아버지를 닮아 타고난 장사치였다. 굵직한 무역을 잡은 클리프가와 하워드가의 틈을 평민의 신분으로 노리기란 어려웠기에, 그녀는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린 터였다.
“곧 넥서스 곳곳에 전부 전화가 보급될 거야. 그러면 그 수많은 전화 연결은 누가 해주겠어? 당연히 통신원들이 하겠지. 계급을 막론하고 제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될 거라고.”
베스는 자꾸만 창밖을 돌아봤다. 여행 이후, 늘 밤이 새도록 밝혀져 있던 그의 집무실 불이 처음으로 꺼진 날이었다. 그런데도 돌아오는 답장은 없었다.
바쁜 거겠지. 갑작스런 여행도 했으니까.
답장하지 않는 건 데베르였지만, 스스로에게 변명하는 건 베스였다.
시무룩한 얼굴을 애써 감춘 채 딕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딕시는 사업 설명으로 시작해,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아이네스의 아이가 아들일지 딸일지까지 점치고 시작했다. 오랜만에 시시콜콜한 잡담으로 밤이 깊어가는데, 돌연 밤의 정적을 깨는 클랙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떤 정신 나간 작자가 이 밤중에!”
한 번 울리고 말 줄 알았던 클랙슨은 누군가를 부르는 것처럼 잠든 숙소를 계속해서 흔들었다.
“미친놈 얼굴이나, 엇.”
씨근덕거리며 창문을 연 딕시의 눈이 커다래졌다.
설마. 문득 스친 생각에 베스가 얼른 그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잘난 얼굴로 곱게 미치셨나?”
오직 딕시 콜먼만이 할 수 있는 공작을 향한 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