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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18화 (118/206)

118화

“어서 빨리 콜린스 공작을…!”

“이 일을 어쩐다. 다들 조용히 움직여!”

고요한 소란이었다.

“황제의 주치의란 자가 상태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대체 뭘 했단 말인가.”

어느 백작의 노기 어린 음성이 아더의 귓가에 꽂혔다.

허둥지둥 다들 제 할 일을 하느라 바빴다. 그 중엔 병든 황제를 살려보려 애쓰는 이들도 더러 있었지만, 제 몫은 그저 혀를 차는 것뿐인 듯 구는 귀족 치들 또한 있었다. 모두 황제와의 정무를 빙자해 아더를 문 바깥에 세워놓던 이들이었다.

“놔라! 이 천한 것!”

호이든이 제 팔뚝에 꽂히려는 주사기를 집어 던졌다.

미루고 미루던 병문안을 오늘로 잡은 건, 더 미룰 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갈수록 깊어지는 병색에 연신 공식 석상을 비우는 황제를 더 이상 모른 척하기도 무리였다.

하지만 운이 좋지 않았다. 하필이면 지금.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브리틴 사절단이 도착했을 때만 해도 약간 차도를 보이는 것 같던 호이든의 병세는 축제가 진행될수록 나빠졌고, 귀족 대신들이 찾아온 지금은 급작스럽게 악화되었다. 기어코 그들 앞에서 섬망 증세까지 보이고 말았으니까.

얼마나 우스운 꼴인가. 그토록 눈을 가려보겠노라 연극을 해댔는데. 입을 다문 아더는 눈앞의 아둔한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호이든은 발작하듯 몸을 떨고 있었다. 제아무리 넥서스의 황제라 한들, 결국은 죽어가는 모습조차 아랫것들에게 숨김없이 보여야 하는 운명이었다.

“폐, 폐하. 정신을 차리십시오. 아직 마무리 짓지 못한 협약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폐하. 코바흐와의 시가 협상이 교착 상태입니다.”

겉으론 황제를 걱정하는 척 위선을 떨었지만, 속뜻은 결국 다 제 잇속 챙기는 얘기였다. 주고받는 눈짓엔 언제 죽을지 모르는 황제를 향한 불신과 조금이라도 제 연줄이 떨어질까 전전긍긍하는 불안이 선명하게 보였다.

결국, 그중 가장 애가 달은 치 하나가 병상 옆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위중하신 때일수록 급한 일부터 하셔야 합니다. 황후 자리를 이대로 비워놓으셔서는 안 됩니다.”

황후라는 말에 불현듯 호이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갑자기 정신이 돌아오기라도 한 사람처럼 독기 어린 눈이 그 말을 뱉는 입술을 향해 스르륵 돌아갔다. 벌겋게 충혈된 흰자가 섬뜩할 지경이었다.

그 혈기에 문득 겁을 집어먹은 중년의 사내가 더듬더듬 같은 얘기를 반복했다. 혼기가 찬 그의 딸이 다른 귀족 영식들의 청혼을 물리는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건 호이든을 몰라서 하는 부질없는 짓이었다.

“콜린스 공작님께서 오셨습니다!”

시종의 급한 목소리와 함께 머리가 희끗한 콜린스가 뛰어 들어왔다. 긴장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콜린스 공, 아니. 라프넬 너….”

콜린스에게 다가가던 아더는 뒤따라 들어온 라프넬을 보고 잠시 말을 멈췄다. 평소의 화려한 모습은 어디 가고 수척한 모습으로 나타난 라프넬의 안색이 파리했다.

“폐하께선 괜찮으신가요.”

걱정이 담뿍 묻어나는 물음에 아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 연기겠지. 늘 그러했듯이.

“이제 모두 나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폐하께서 안정을 취하셔야 하니까요.”

아더는 부드럽게 대신들에게 일렀다.

나직한 일침에도 미처 얻지 못한 확답을 받고자 고개를 기웃거리는 꼴들이 한심했다. 아더는 그런 치들의 어깨를 지그시 눌러 내렸다. 그건 끓어오르는 탐욕을 눌러 내리는 황자의 손길이었다. 약하게 실린 악력만으로도 전쟁이라곤 모르고 호의호식한 말랑한 귀족들을 누르기엔 충분했다.

“모두 나가 있거라.”

호이든의 쇳소리를 듣고 나서야 꾸물거리던 발걸음들이 멀어졌다.

황제의 상태를 면밀히 살피던 콜린스는 침실의 문이 닫히고, 시종들이 멀어지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그는 유일하게 이해 관계없이 충정을 지키는 자였다.

“선 황후 폐하와 같은 병세입니다.”

침통한 목소리 끝이 떨렸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었다. 호이든의 끝이 머지않았음은.

하지만 얼마나 더 끌지가 문제였다. 이대로 한 달을 갈지, 일 년을 갈지, 십 년을 갈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선 황후는 삼 년을 갔으니, 그보다 젊은 호이든은 어쩌면 꽤 긴 세월을 허수아비 황제로 지내야 할지도 몰랐다.

“라프넬….”

마른 손이 까딱까딱 움직였다.

대신들이 나가고 나자 전에 없이 차가운 표정을 한 라프넬이 느리게 그 부름에 다가갔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미약한 두려움은 아더만이 알아볼 수 있었다.

“라프넬….”

혼탁한 눈이 라프넬을 훑었다.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는 눈빛이었다.

“네가 나와 혼인해야겠다.”

“네?”

“폐하.”

라프넬의 얼굴에 경악과 경멸이 동시에 스쳤다. 아더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아더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잔뜩 미간을 찌푸린 그는 흔치 않게 제 형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체 그게 무슨-”

“다들 넥서스를 삼키려는 것들뿐이야!”

호이든은 고성을 내질렀다.

갑작스런 선황의 서거 탓에 얼결에 오른 황제 자리였다. 선황의 서거 직전엔 다들 여자에 눈이 먼 황제가 황위 계승자를 아더로 바꿀 것이라는 소문 또한 암암리에 성행했으니, 그 불안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호이든은 병적이었다. 강박적으로 배다른 형제들을 압박했으며, 혼인을 여태 미룬 이유 또한 그와 비슷했다. 선황의 신임이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을 아는 아더가 질리도록 제 형을 설득해도 변하는 건 없었다.

“다른 귀족의 여식과 국혼하게 되면 필시 나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그 가문의 어느 덜떨어진 놈 하나가 제국을 쥐겠지. 바로 여기에, 정통한 피가 있는데…!”

변명이었다. 호이든은 넥서스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제 편이 아닌 자를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라프넬의 손을 잡아 쥐었다. 라프넬이 뿌리치려 해도 질긴 손은 기어코 그녀를 붙잡았다. 살아보려는 발악이었다.

“이상한 것 없지. 원래 황족이며 왕족들은 그렇게 혈통을 이어가는 거다. 잘된 일이야. 데베르 그놈도 필요 없어. 라프넬, 네가 이토록 내게 도움이 될 줄이야. 한시 빨리 준비해야겠다. 내가 조금이라도 정신이 들 때 황명을 내려야겠어. 내가 앓아눕기만 기다리는 짐승 놈들이 이곳, 황궁엔 득실거리니. 아더, 네가 나 대신 일을 진행해주렴.”

숫제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호이든의 눈이 광기로 번뜩였다. 콜린스와 눈이 마주친 아더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폐하.”

잠자코 답하는 아더의 옷깃을 라프넬이 급하게 잡았다. 아더는 그런 라프넬의 손을 호이든이 보지 못하게 뒤로 잡아 감췄다.

“우선 건강부터 회복하시는 게 우선입니다. 그동안의 일은 제가 진행하겠습니다.”

나와. 아더는 입 모양으로 라프넬을 불렀다. 아연한 표정의 공주는 가장 먼저 침실을 뛰쳐나갔다.

침실 문을 닫고 아더와 콜린스는 나란히 복도를 걸어갔다. 밤이 깊은 황궁의 복도는 적막하기만 했다.

“회복은 어렵겠죠.”

“아시잖습니까.”

콜린스도 더 할 말은 없었다.

브리틴 왕족의 유전병은 약이 없었다. 그저 최대한 늦게 발병해주기를 바라다, 발병 이후엔 고통 없이 가장 빠르게 죽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지독한 저주였다.

한쪽 다리가 마르는 것을 시작으로, 점차 근육이 사라지고, 마침내 감각마저 사라져 서서히 온몸이 굳어지는 병이었다. 항간엔 다리를 절지 않는 브리틴 왕족은 사생아라는 더러운 소문마저 돌 정도였으니까.

“부탁드립니다.”

맥없는 인사로 콜린스를 마중한 아더는 라프넬이 있을 곳을 향해 걸어갔다.

“라프넬.”

후원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은 라프넬이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유일한 구원자를 찾은 것처럼 굴고 있었다.

“아더, 그렇게 두지 않을 거지…?”

오만한 공주답지 않은 목소리였다. 아니. 라프넬의 목소리이긴 했다. 꼭 어릴 적과 같은.

“난 그렇게 못해. 호이든과 국혼이라니. 차라리 죽어버릴래. 넌 내가 죽길 원해? 네 눈앞에서?”

제 목숨을 협박처럼 흔드는 말에 울음기가 묻어났다.

“정신 나가서 하는 헛소리잖아. 어떻게 배다른 여동생이랑 국혼을 해? 미쳤어? 아더 너도 호이든처럼 미친 거야?”

아더는 침묵했다. 그 모습을 보는 라프넬의 눈에 점점 노기가 서렸다. 죽일 듯이 아더를 노려보는 눈에 물기 어린 속눈썹이 가시처럼 반짝였다.

“또 모른 척할 거니? 어릴 때처럼? 내가 어머니에게 학대받는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던 그때처럼? 도와달라는 그 처절한 부름을 듣고도 도망치던 네 뒷모습이 아직도 기억나. 절뚝거리면서 네 궁 앞에 도착했는데 다들 날 막았어. 우리 어머닌 최소한 네 어머니처럼 한미한 귀족조차 아니었으니까.”

“라프넬.”

“멍청한 어머닐 보며 배웠어. 황궁 안의 시들어가는 꽃이 얼마나 비참한지. 난 죽어도 그 꼴은 못 해. 차라리 넥서스 바깥의 아무것도 없는 놈이랑 결혼할지언정, 곧 죽어버릴 호이든 옆의 껍데기는 할 수 없어.”

라프넬은 제 두 손으로 아더의 손을 꽉 잡아 쥐었다. 기도하듯 제 목 근처에 함께 쥔 손을 갖다 대자 팔딱거리는 불안한 숨이 아더에게 여과 없이 전해졌다.

문득 라프넬의 얼굴이 서늘해졌다. 이제 정신이 나간 건 호이든이 아니라 라프넬 같았다.

“차라리 호이든을 죽여.”

“뭐?”

“죽여줘. 저 정신 나간 국혼을 진행하기 전에. 어차피 죽을 목숨이잖아. 고통 없이 죽게 해준다는데 뭐가 문제야.”

“라프넬! 누가 듣기라도 하면-”

“제발! 그놈의 누가 듣기라도 하면! 누가 보기라도 하면! 넌 단 한 번도 내 얘기는 들어준 적도 없고, 봐준 적도 없잖아!”

새된 목소리가 비명같이 후원을 울렸다.

라프넬은 거의 헐떡이고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는 가릴 것 없이 무너져내리는 중이었다.

“내 가족은 이제 너뿐이야. 내 세상에 나를 이해해줄 사람은 오직 너 하나뿐이야. 제발 나를 모른 척하지 마, 아더.”

“라프넬 제발….”

아더의 무릎도 함께 무너졌다. 아득한 표정을 감추기엔 그의 손이 턱없이 작았다.

숨을 몇 번 거칠게 들이켜던 아더는 결심한 듯 천천히 입술을 뗐다.

“…호이든은 알고 있어.”

떨리는 목소리가 후원 바닥을 기어 라프넬에게 건너왔다.

“뭐…?”

푸른 두 쌍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심연 같은 두 쌍의 눈은 꼭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엔 죽을 때까지 드러나선 안 되는 비밀이 섞여 있었다.

“네가 선황의 피가 아니란 걸.”

그건 치명적인 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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