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짧은 고백이 끝난 후 저도 모르게 깨문 입술 끝이 아릿했다.
베스는 고개를 돌려 짙게 물든 발아래를 내려다봤다. 시선 끝에 저 멀리 있는 오두막이 걸렸다. 이제 그곳엔 기다리는 사람도, 기다림에 부응해 돌아올 사람도 없었다. 힘없는 기억이란 그런 것이었다.
지나간 봄을 후회하진 않았다. 미적거리며 걸음을 늦추고 못 이기는 척 그의 주위를 맴돌던 기억으로 남은 시간을 살아갈 테니까.
돌아올 대답 또한 기대하진 않았다. 하지만 굳게 잠근 입술을 기어코 열지 않는 남자를 보자 밀려드는 서운함은 어쩔 수 없었다. 자꾸만 새어 나오는 서운함을 꾹 눌러 내린 베스는 애써 밝은 척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가 훨씬 예뻐요.”
그는 여전히 베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그 끝은 정해져 있다는 듯 단호한 눈빛이었다. 그런 눈을 한 남자를 보고 있으면 자꾸만 마음이 멈칫했다.
“그러니까 흙투성이에 엉망이던 그날 대신 오늘을 기억해요, 우리.”
하늘은 부지런히도 짙어지는 중이었다. 물들다 못해 어둠에 스러지는 번트가 그들의 앞에 있었다.
“이렇게 예쁜 언덕 보면서 전장은 떠올리지 말라는 뜻이에요.”
당신의 세상에 더 이상 나쁜 기억은 끌어들이지 마요.
베스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고 있어.”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이번에도 돌아올 대답은 없으리라 생각했기에 베스의 눈이 조금 커졌다.
“덕분에.”
베스는 얼른 시선을 피했다. 마주 모은 손끝에선 아직도 사냥총의 미끈한 쇠 느낌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적당히 차갑고 매끄러운 총은 제 주인을 닮아 있었다. 하고많은 것 중 구태여 사냥총 쏘는 법을 가르쳐 달라한 것조차 베스는 후회하지 않았다.
“계획이 뭐야.”
“네?”
예상치 못한 말에 베스의 눈이 또다시 동그래졌다.
“이렇게 달게 구는 속셈이 있을 거 아냐. 적당히 눈치를 채야 나도 기대에 부응해주지.”
할 말을 찾지 못한 베스의 입술이 몇 번 벙긋거리자, 데베르는 이내 가벼운 웃음을 흩날렸다.
“홀려보기로 작정한 거 아니었어?”
남자의 말려 올라간 입꼬리에 베스의 시선이 닿았다. 갈고리처럼 휘어진 그 끝에 꼭 제 심장 한 귀퉁이가 걸린 것만 같았다.
달게 굴다니.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제 마음 가는 대로만 행동하는 중인데. 온종일 뱉고 싶은 말만 뱉고, 하고 싶은 것만 마음껏 해댔다. 때론 공작의 매력적인 연인이 아니라, 투정 부리는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그럴… 작정까지는 없었는걸요?”
지나치게 순진한 대답이었다. 목소리에 묻어나는 주저함에서 정말 그럴 생각은 없었다는 게 전해져 데베르는 조금 아찔해졌다. 이런 여자였다. 베스 제인스는.
이래야만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피어나기 시작한 의심 한 자락이 계속해서 그의 머릿속을 갉작였다.
“제일 무서운 적군이 뭔 줄 알아?”
던져진 사냥총을 짚고 일어선 데베르는 나머지 손을 내밀었다. 눈을 살짝 찌푸린 여자는 내민 손이 마치 그 물음이라도 된 것처럼 의문스럽게 쳐다봤다.
“아무 계획 없이 덤벼드는 적군이야.”
데베르는 덥석 베스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얼떨결에 함께 일어선 베스가 그를 말갛게 바라봤다.
“그런 의미에서 너는 내게 꽤 두려운 존재지.”
하얀 손끝의 거뭇한 흔적을 흘긋 쳐다본 데베르는 트렁크에 사냥총을 던져 넣었다. 장전되어 있던 총알은 그의 손안에 들어간 지 오래였다. 베스는 눈치채지도 못한 새였다.
“총이 하나고 사람이 둘이면 위험하잖아.”
그는 이번에도 장난처럼 얘기했다.
“상대가 나를 죽이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에 기대야 하니까.”
베스는 이 남자가 답지 않게 친절한 부연 설명을 덧붙일 땐 가감 없는 진실만을 말하고 있음을 이미 경험으로 알았다.
잘그락거리는 총알을 구슬처럼 가지고 놀던 손짓이 뚝 그쳤다.
“타. 아직 여행 중인데.”
언덕 너머론 벌써 희미하게 달무리가 지는 중이었다.
베스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저를 지나치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깊어질수록 눈앞의 남자는 익숙한 얼굴이 되었다. 어쩌면 그 속의 담겼던 다정함은 스쳐 지나간 착각이라 할 만큼 눈빛은 차갑기만 했다.
그의 옆좌석에 오른 베스는 몇 번인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저는 공작님을 죽이지 않아요.”
해가 저문 번트의 언덕 주위를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그 어떤 것도 영주와 그의 예비 공작부인의 앞을 가로막을 게 없었지만, 데베르는 굳이 차를 잠시 멈췄다.
여자는 덜덜 떨리는 엔진의 진동이 마치 제 떨림이라도 되는 듯 굴고 있었다. 긴장감으로 한껏 치뜬 눈에 약간의 두려움이 여과 없이 비쳤다. 그가 손수 고른 여름 원피스를 입고, 그의 곁에서 얌전히 손을 모으고, 오직 그만을 바라보는 모습은 어느 쪽으로 봐도 목숨을 위협할만한 자태는 아니었다.
그래서 위험한 것이었다.
자꾸만 그의 예외가 되려 하고 있으니까.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데베르는 다시 아무렇지 않게 운전대를 돌렸다.
클리프 성으로 향하는 길은 웨인과 달리 가로등 하나 없이 어둑하기만 했지만, 문제 되지 않았다. 번트란 데베르에게 그런 곳이었다. 너무도 지긋지긋해 눈을 감고도 길을 찾을 수 있는 곳. 길을 잃고 헤매던 곳에서 유일하게 길을 찾을 수 있다는 모순조차 이곳을 닮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베스는 번트를 닮은 여자였다. 한 번도 그리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에 와서야 그걸 깨달았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운명이라도 되는 건지….”
느릿하게 열리는 성의 철문을 보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다시 영지를 찾은 영주와 그의 손님을 위해 성은 더없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늘 죽은 듯이 잠들어있어 때론 기괴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던 지난 모습과는 판이하였다. 데베르는 그 변화를 만들어 낸 자신의 사랑스런 예외에게 손을 내밀었다.
“짧은 여행이라 아쉽네.”
망설임 없이 마주 잡아 오는 작은 손에 악력이 느껴졌다. 제법 의지가 실린 손길이었다.
“방을 준비해 뒀습니다. 영애께선 저를 따라오시죠.”
때마침 다가온 관리인이 말을 건네고 나서야 데베르는 끓어오르던 상념을 잠시 멈출 수 있었다. 데베르는 관리인을 따라가도 괜찮다는 뜻을 담아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베스는 관리인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오르다가 퍼뜩 뒤를 돌아봤다.
“가지 마세요, 공작님.”
“내가 갈 거 같아?”
“혹시나요.”
그 다정한 채근이라니. 데베르는 곤란하다는 듯이 제 눈썹을 긁적였다.
네가 어떤 얼굴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면, 그리고 내가 어떤 생각으로 그 모습을 보는지 알면 다시는 저렇게 굴지 못할 텐데.
“가지 않을게.”
제 나름의 확답을 얻고서야 뒤를 도는 고집스런 머리통을 한 번쯤은 그의 맘대로 주물러보고 싶었다.
베스는 나선형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가는 틈틈이 남자를 내려다봤지만, 그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다.
약속했으니 지키겠지.
적어도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남자이니, 가지 않겠다는 말 또한 지킬 것이다. 베스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갔다.
성의 본관은 처음이었다. 의료봉사를 왔을 땐 손님용 거처로 주로 쓰이는 동관에 묵은 데다, 그마저도 앓느라 바빠 아름다웠다는 인상 외엔 성에 대해서 크게 기억나는 게 없었다. 하지만 성의 마지막 층에 다다르자 베스는 작게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관리인은 복도 끝방 문을 열었다.
“이 방에서 묵으시면 됩니다. 목욕물과 간단한 식사를 준비해놓았으니 편히 사용하십시오. 공작님이 계실 방은 복도 반대편 끝입니다.”
“혹시 이 방이….”
“본래는 클리프 부인님의 방이죠.”
관리인은 눈치껏 끝이 희미한 베스의 물음에 답했다.
문이 닫히고 커다란 부인 침실에 저 홀로 남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베스는 조심스레 걸음을 뗐다. 지나치게 화려한 방이었다. 천장의 격자무늬 또한 그날 한참이나 악몽을 헤매다 처음 눈을 떴을 때 본 것과 똑같았다.
세월이 흘렀음에도 한 치의 빈틈도 없는 방은 선대 클리프 부인의 모습을 보여줬다. 넥서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작부인이었다는 명성에 과연 걸맞은 방이었다.
베스는 몇 번 어색하게 침대보를 쓸었다. 여러모로 제겐 어울리지 않게 느껴질 뿐이었다. 맞지 않는 구두를 신겠다 욕심내는 어린아이가 된 것만 같았으니까.
“그만.”
벌떡 일어선 베스는 곧장 욕실로 향했다. 덫처럼 저를 옭아매는 생각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그만. 그만.
뜨거운 욕조에 머리를 끝까지 담근 채 스스로를 고문하는 것처럼 한참을 있었다. 그러다 참은 숨을 토해내고, 다시 몸을 담그기를 반복했다. 온몸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내쉬는 숨에서 더운 기운이 끼칠 때에서야 지친 몸을 이끌고 나왔다.
금방이라도 잠들 것처럼 노곤했다. 열린 창밖에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지만, 베스는 미동도 없이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뚝, 뚝. 머리끝에서 꼴사납게 떨어지는 물방울이 척척한 발을 계속해서 적셨다.
순간, 베스의 벗은 몸 위로 커다란 가운이 둘렸다.
“무슨 짓이야.”
“어….”
베스는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냈다.
눈앞의 남자가 유독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저처럼 물에 흠뻑 젖은 얼굴을 하고서 서 있는 그 모습이 유난히 꿈 같았다.
“진짜 공작님이에요?”
오늘은 각성제를 먹지 않았으니 언제 잠들지 모를 노릇이었다. 어쩌면 벌써 잠들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리 생생한 꿈을 꾸는 것일지도.
“가짜이길 원한다는 소리처럼 들리네.”
데베르는 보란 듯이 테이블 위에 놓인 약 한 알을 입에 넣었다. 여자가 안정제라 눈속임하고 준 해독제였다. 약을 삼킨 걸 보고서야 조금 누그러지는 베스의 모습을 데베르는 놓치지 않았다.
“이리 와.”
제 몸보다 훨씬 큰 가운을 걸친 여자를 당겨와 침대에 앉히곤,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밤 고백도 있을 것 같아서 찾아왔어.”
까만 눈동자에 잔악스럽게 구는 남자의 얼굴이 비쳤다.
“해 봐.”
베스가 잠에서 깨어난 이후,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거듭 받아낸 그녀가 마지못해 욕실로 사라진 직후에 웨인에서 전화가 왔었다.
‘공작님, 올리버입니다.’
‘말씀하세요.’
‘루카란 아이를 찾아봤는데 딱히 연고도 없고, 이렇다 할 특이 사항은 없습니다. 다만.’
이어지는 대답을 듣던 데베르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 아이가 클리프가의 만년필을 맞춤 제작하는 장인에게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같은 촉으로 만들어진 것과, 공작님께서 쓰시는 잉크를 사서 갔고요. 물론, 그게 어떠한 걸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데베르는 제 서무 테이블에서 만년필 하나가 사라진 걸 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억이 닿는 그 순간부터 전장에서 굴러먹은 몸이 아니었던가. 강박적으로 전투 물품을 세고, 서류를 뒤적이며 기억하던 습관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서무 테이블에 가까이 올 수 있는 자는 집사와 몇몇 이사들, 그리고 베스 한 명뿐이었다.
“어서.”
데베르는 성마르게 재촉했다.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티 없는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던 여자가 발갛게 부은 입술을 달싹였다.
“…사랑해요.”
“다시.”
“사랑해요.”
거친 손가락이 스치기엔 지나치게 부드럽고 하얀 얼굴을 데베르는 가만히 쓸어내렸다.
“넌 내가 달게 굴어도 삼키지 않았지만.”
데베르의 허리가 숙어졌다.
“난 달게 굴면 삼켜.”
맞닿은 몸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