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칼론은 입술을 벙긋거리더니 곧 웃음을 터뜨렸다. 해봤자 얼굴을 붉히거나, 굼뜨게 자리를 피할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하게 한 방 먹은 꼴이었다.
“제가 실수했나 보군요.”
궁금했다. 타고나길 정통 있는 귀족 놈으로 태어난 것들은 어떤 것을 욕망하는지. 심지어 데베르 공작이 눈독 들이는 여자지 않은가. 그게 한철을 갈지, 두 철을 갈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칼론은 베스가 경고처럼 내리찍은 빈 잔을 제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소란스러운 좌중 속에 섞인 둘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칼론은 그 틈을 타 이젠 대놓고 베스를 훑어내리기 시작했다.
허여멀건 얼굴에 커다란 눈, 쥐면 부서질 것 같은 어깻죽지, 그리고 그 아래의….
눈을 다시 들어 올리자, 한 치의 거짓도 없이 경멸만을 담아 저를 바라보는 여자의 눈동자가 보였다. 더럽게도 새카만 눈동자가.
아, 공작은 덫에 걸린 느낌을 좋아하나.
심연같이 까만 눈동자 탓에 스친 생각이었다.
베스는 그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고 칼론을 지나쳤다. 그는 못 볼 걸 보기라도 한 사람처럼 종종걸음치는 여자의 뒤통수를 한번 돌아봤다. 비식거리는 웃음이 새 나왔다.
“겁먹었으면서.”
아닌 척 가시 세운 모양새라니.
고개를 까딱인 칼론은 베스가 남긴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워 제 입술에 갖다 댔다.
그래, 생각해 보니 공작의 눈길이 갈 법도 했다. 물론, 제 취향은 아니었지만.
* * *
베스는 하워드의 저택이 보이지 않는 거리 모퉁이로 들어서자마자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꾸만 다리가 풀려 어쩔 수 없었다. 하워드 앞에서 강한 체하는 것도, 시뻘건 제복을 마주 보며 원치도 않는 술을 들이켠 것도. 베스로서는 모두 버거운 일이었다.
어둠이 져서 다행이었다.
거리를 꾸민 가로수 뒤에 숨은 베스는 취기가 올라오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함께 따라오려는 루카를 무슨 핑계를 대며 돌려보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겨우 다시 일어난 베스는 다리에 힘을 줬다. 열기가 올라오는 눈을 몇 번 비비곤 가던 길을 마저 걸어갔다. 이미 사위는 어두워진 시각이었지만, 브리틴 사절단의 환송 행사가 계속되는 거리는 사람들로 즐비했다.
베스는 계속해서 걸어갔다.
목적지는 없었지만 가고 싶은 곳은 있었다.
이젠 시간이 많지 않았다. 흘려보내고 싶은 순간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베스는 그런 마음으로 마침내 노란 가로등 불빛 아래에 섰다. 그 남자의 회사 앞이었다.
그의 집무실은 여전히 불이 밝혀져 있었다. 그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저번처럼 아무도 없는데 불만 켜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괜찮았다.
마음이 향한 곳이 여기였기에. 그거면 기다림의 이유로 충분했다.
매끈한 가로등 등치에 기대고 있던 베스의 등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내려왔다. 결국엔 잔뜩 몸을 만 자세로 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밤바람에 섞인 초여름 냄새가 기분 좋게 그녀를 다독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깨 위로 툭 떨어지는 이상스런 온기에 베스의 어깨가 움칠했다. 감겨있던 눈이 잠시 바르작거렸지만, 이내 다시 평온해졌다. 아마 잠이 든 모양이었다.
이번엔 베스의 동그란 머리통을 누군가 톡 건드렸다. 그제야 정신이 든 베스는 간신히 눈만 깜빡였다. 쉬지 않고 울리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축제가 끝난 건가. 판단이 흐려진 베스는 일어날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여전히 제 무릎에 고개를 기대고 있었다.
그런 베스의 앞으로 까만 구두코가 들어왔다. 티끌 하나 없는 구두였다.
데베르는 일어나라는 말 대신 손을 내밀었다. 베스는 잠시 제게 내민 남자의 손을 보다가 홱 고개를 묻었다.
“일어나.”
고저 없는 목소리가 꽤나 서늘했지만, 베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안 갈래요….”
하워드의 말처럼 오늘 자신은 겁을 상실한 것일 수도 있다.
“들어가기 싫어요….”
베스는 더듬더듬 손만 올려 그의 소매 깃을 붙잡았다. 데베르는 무표정하게 그 서투른 손짓을 받아줬다.
얼마쯤 있다 가려나, 속으로 셈을 하며 위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여자는 지루하다는 듯이 몇 번 바닥에 발장난을 하더니, 이내 자세가 허물어지고 웅크린 새끼 짐승처럼 가만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데베르는 그 기다림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내려가지 않았다. 아마 얼마 전이었다면 비 맞은 개새끼처럼 그 앞을 서성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우스운 짓도 그쯤 했으면 충분했다. 데베르는 쓸모없는 짓을 하는 대신, 해야 할 일을 마저 했다. 굳이 서두르는 기색도 없었다.
바깥의 노랫소리가 멎고, 웅성거리던 인파가 해산하고, 마침내 고요한 거리에 베스 한 명만이 남을 때까지 데베르는 기다렸다.
“병원으론 가기 싫어요….”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취기가 묻어났다.
“그럼 어디로 가고 싶은데.”
잠시 숨을 고르던 베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몇 올이 하얀 뺨 위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병원 말고 어디든.”
“…누구 흉내를 내는 거야.”
그 말에 베스는 배시시 웃었다.
“기억하는구나.”
“못할 리가.”
한껏 약게 굴던 그때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여자의 손목을 잡고 조금만 힘을 주자, 금세 여린 몸뚱이가 일어섰다. 여자는 그게 못내 서운한 듯 입술을 잘근거리더니, 돌연 앞에 보이는 계단 몇 개에 성큼 올라섰다.
반짝 뒤를 돌아보는 눈에 숨기지 못하는 불안함이 비쳤다.
‘근데 이거는 꼭 삼 주 뒤에 주라고 했는데….’
여관방에 앉은 아이는 무언가 미덥지 않은지 연신 삼 주라는 말을 반복했었다.
삼 주. 만약 청혼서가 최대한 빠르게 황제의 승인을 얻는다면 결혼식까지 남은 시간이었다.
그사이에 대체 무슨 일을 할 생각이길래. 데베르는 명확히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에 목이 죄어왔다. 그에겐 흔치 않은 일이었다.
어쩌면….
예전과 똑같은 여자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안도했던 것부터가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답을 찾고 싶다면 정정해야 했다.
베스 제인스는 그때와 다르다.
“어디로 갈까.”
부드러운 목소리로 여자를 달랬다. 그래야 답을 들려줄 테니까. 그가 무르게 굴 때 그녀가 약해진다는 건 다행히도 아직 변치 않는 것이었다.
데베르는 그토록 베스가 사정한 삼 주라는 시간을 보란 듯이 짓밟아버리려 했다. 분명 그 삼 주 동안 무언가 계획이 있다는 뜻인데, 그 계획이 한 번에 어그러지면 어떤 방식으로 동요할지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또 숨어버리겠지.
데베르는 무의미한 술래 노릇이 지겨웠다.
그래서 삼 주만 봐주기로 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삼 주. 그동안 여자는 열심히 숨고, 그는 찾는.
베스와 데베르의 시선이 얼추 같은 위치에서 맞닿았다. 구두까지 신은 베스가 몇 계단 올라선 탓이었다.
베스는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리곤 그의 너른 어깨 위로 주저 없이 몸을 던졌다. 데베르는 폭격처럼 제게 쏟아지는 여자의 향과, 부드러운 몸과, 귓가에 닿는 목소리에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번트요. 우리 번트에 가요.”
마지막 술래잡기의 시작이었다.
* * *
쏟아지는 햇빛에 베스는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바스락거리는 마른 시트가 부드럽게 손가락 사이를 스쳤다.
다시금 수마에 빠지려는 베스를 깨운 건 휘파람 같은 종달새 소리였다. 한참을 휘휘 거리며 머리맡의 창가를 종종거리던 새는 기어코 베스의 머리 위에도 앉았다.
“…이러지 마….”
얼굴을 베개에 묻은 채 손만 이리저리 휘저어봤자 새는 떠날 생각이 없었다. 그때, 허공을 버둥거리는 베스의 손가락에 차가운 물줄기가 닿았다. 그 속에 섞인 미약한 온기도 함께였다.
여기가 어디지.
번뜩 든 생각에 확 이불을 젖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냉기가 흐르는 물잔이었다.
그리고 그걸 들고 있는….
“취한 척하지 말고 일어나.”
취한 척이라니. 뜻 모를 핀잔에 베스는 잠시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지나치게 맑은 머리 위로 어제의 장면이 가감 없이 스치기 시작했다. 얼른 몸을 훑었지만, 엉망으로 구겨진 어제의 차림 그대로였다.
티테이블에 기대앉은 데베르는 여상한 얼굴로 제 잔엔 뜨거운 차를 부었다.
“취한 널 어떻게 하기라도 했을까 봐?”
“실망이군.” 가볍게 일축한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막 샤워를 끝냈는지 아직 물기가 남은 몸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베스는 침대에서 무릎을 세워 창가로 다가갔다. 활짝 열린 창문으론 널따란 클리프 성의 정원이 한 폭의 그림처럼 담겨 있었다. 그때까지도 베스의 곁을 떠나지 않던 종달새가 이번엔 창턱을 짚은 그녀의 손가락 사이를 잰걸음으로 노닐었다.
“여행을 가자며.”
멍하니 새를 쓰다듬는 베스의 뒤로 데베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번트로.”
그걸 이 남자가 들어줄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여행을 가자고 편지를 보냈고, 번트를 가자며 술김에 속마음도 얘기했지만 정말 단둘이서 여행할 수 있으리라고는…. 그럼에도 먼저 휴가를 낸 건, 조금의 기대라도 갖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제껏 베스에게 기대는 사치스런 감정이었다.
“꽤 다정한 애인 노릇을 해주려 했는데 싫으면 지금이라도 돌아가고.”
“좋아요.”
냉담한 그의 목소리에 베스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 성마른 몸짓에 종달새가 파르르 몸을 떨며 정원으로 날아갔지만, 베스는 눈앞의 매정한 애인을 구슬리는 게 먼저였다.
“난 좋아요.”
저도 모르게 목소리 끝이 떨렸다.
“진심이에요. 나는 정말 좋아요.”
베스의 뒤로 더없이 환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데베르는 결국 시선을 떨구었다.
“당신하고 함께 여기 있어서.”
조금 이른, 정오의 고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