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때마침 부는 바람에 낯선 이의 땀에 젖은 체취가 풍겨왔다. 역겹긴. 데베르는 한쪽 눈을 미약하게 찌푸렸다.
“큭.”
가볍게 나부끼는 붉은 머리카락 아래, 반쯤 드러난 적안에 혈기가 넘실거렸다. 방아쇠에 올린 손가락에 데베르의 시선이 닿았다.
“천하의 넥서스 군대장도 이곳에선 속수무책이네요.”
능글거리는 목소리와 달리, 사냥감을 향해 우뚝 멈춘 눈동자엔 미묘한 광기도 실려 있었다.
아주 재밌는 걸 발견했다는 눈빛.
데베르는 그 눈빛을 잘 알았다.
“죽여.”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였다.
“죽이는 게 목표는 아닐 것 같지만.”
죽이면 재밌는 게 사라지니까. 데베르의 송곳니가 슬쩍 드러났다. 얼핏 보이는 웃는 듯한 모양새에 칼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섣부른 확신이시군요.”
브리틴의 군대장이라고 했던가. 데베르는 황제 곁에 서서 무슨 말인가를 연신 지껄이던 칼론의 얼굴을 떠올렸다. 꽤 말끔한 척 차려입고 온 모양새였지만, 문신처럼 새겨진 체취까지는 숨기지 못했던 게 기억났다.
피식 웃는 데베르의 얼굴에 상대를 향한 경멸이 스쳤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함께 씩 웃는 칼론의 이마에 시퍼런 힘줄 하나가 툭 불거졌다.
“제가-”
그 순간 찰칵, 하는 부드러운 탄창 소리가 칼론의 말을 끊었다.
“내려.”
이번엔 붉은 머리통 뒤에 넥서스의 인장이 쿡, 닿았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 사이에 닿는 서늘한 총구는 그 누군들 소름 끼칠 만했다.
“…아군이 있으셨군요.”
턱을 살짝 치켜든 칼론의 눈이 다시 데베르를 향했다. 지나치게 여유로운 사냥감은 뭐라도 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나도 몰랐던 아군이군.”
칼론은 가슴께에 들어 올리고 있던 총을 그대로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이미 널브러져 있던 데베르의 총과 칼론의 총이 맞부딪혔다.
그제야 칼론의 머리통에서도 미지근해진 총구가 멀어졌다.
“무슨 짓이지, 칼론 대령.”
그놈의 대령 타령. 저번엔 공주였는데 이번엔 황자까지 자신을 무시하다니. 칼론은 짧게 실소했다. 그들은 고작 호칭 하나만으로도 상대의 자존심을 짓밟는 데는 도가 튼 뼛속부터 황족이었다. 사람들은 이 남매를 사랑스런 황가의 핏줄이라고 한다지.
칼론은 눈썹을 긁적였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들의 말대로 ‘아직은’ 대령이니까.
“제 장난이 지나쳤습니다.”
“지금 이게 장난이라 생각하나.”
“…제가 자란 곳에선 이렇게 친해졌습니다.”
칼론은 등 뒤의 아더를 한번 보곤, 제 앞에 있는 데베르를 돌아봤다. 앞뒤로 넥서스의 군대장과 사령관을 둔 꼴이 어째 덫에 잡힌 건 저였다.
“고아원은 작은 전쟁터거든요. 끝없는 서열질을 멈추고 싶으면 한 번쯤은 대들어야 하죠. 그래야 친구가 될 테니까요. 사령관님과 군대장님처럼요.”
어느덧 그들의 머리 위의 하늘은 붉게 물들고 있었다. 열기로 후끈거리던 몸도 아직은 꽤 시원한 바람에 빠르게 식어가는 중이었다.
데베르는 나뭇더미 위에 던진 총을 손에 들었다. 셋 중 제일 먼저 걸음을 뗀 그는 무언가 잊었다는 듯 뒤를 돌아봤다. 손안에 대충 든 총구 끝이 칼론의 가슴팍을 향했다.
“이곳은 넥서스야.”
짧은 경고였다. 이곳은 감히 비교되지 못할 계급 의식으로 점철된 제국이니, 기어오를 생각하지 말라는 경고.
데베르는 딱 그다운 경고를 던지고 숲을 걸어 나갔다.
* * *
“사냥감을 키워서 잡아 오는 거야?”
관중석에 앉은 영애 중 하나가 채신머리없이 투덜거렸다. 한 시간이란 규칙이 무색하게 시간은 벌써 두 시간을 넘어 해가 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돌아오지 않는 장정들에 여인들의 고개가 연신 숲을 향해 기웃거렸다. 하지만 관중석에서 보이는 건 기껏해야 후원 오솔길 정도였다.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아이네스도 피어나는 걱정을 어쩌지 못하고 시계만 연신 들여다봤다. 이제 곧 병원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짙어지던 붉은 노을빛도 어느새 푸르스름해져 가고 있었다.
왜 오지 않지. 설마 다친 어깨 때문인가. 베스는 경기 중 칼론의 몸통에 거세게 부딪힌 데베르를 떠올렸다. 제아무리 데베르라 해도, 들이받다시피 들어오는 덩치를 그대로 받아친 여파가 있을 게 분명했다.
초조해진 베스가 결국 일어나려는데 아이네스가 조금 더 빨랐다.
“베스, 가야 해. 여기서 더 지체하면 지각이야.”
단호하게 말한 아이네스는 자신을 기다리는 마차로 걸어가면서도 어쩔 수 없이 뒤를 돌아봤다. 베스의 행동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애타게 기다리는 얼굴들은 끝까지 보이지 않았다.
“아둔하긴.”
라프넬은 제 친구와 탐탁잖은 양녀의 뒤를 시선으로 쫓았다. 입으로는 바쁘다 말하면서도 느릿하게 움직이는 꼴이 여간 미련이 남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게일과 데베르? 겨우 그치들이 뭐라고. 라프넬은 무심한 얼굴로 멍청한 놈 중 그나마 제일 빠른 놈이 들어오길 간절히 기다렸다.
“어? 오십니다!”
시종 하나가 큰 소리로 외치며 깃발을 흔들었다. 누군가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덧 완연한 어둠이 내린 후원 오솔길은 오늘의 승자를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누구지?”
“공작님인가요?”
“엇. 아니에요. 저분은.”
점점 가까워지는 말발굽 소리는 라프넬의 앞에서 탁 멈췄다. 그와 동시에 승자의 이름을 외치는 우렁찬 목소리가 어둑한 경기장을 울렸다.
“브리틴 승!”
어둠 속에서도 붉은 눈동자는 선명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직 사냥의 여운이 남은 듯한 눈동자에 라프넬의 싸늘한 얼굴이 담겼다.
그녀는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제가 앉은 관중석 저 아래에 던져진 사슴 한 마리를 쳐다봤다.
“무슨 벌을 주실지 궁금해서요.”
시종이 등불을 들고 다가오자, 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이 더 뚜렷하게 보였다.
“그걸 고민하다 보니 조금 늦었습니다.”
가무잡잡한 피부와 어울리지 않게 유난히 흰 이빨이었다.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는 그 모습은 마치….
“…불을 삼킨 것 같네.”
길었던 친선 경기를 마무리 짓는 공주의 감상이었다.
* * *
“먼저 옷 갈아입고 올게.”
도착한 병원의 로비에선 게일의 시종이 아이네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를 타고 온 그녀보다 조금 더 일찍 도착한 시종은 게일의 소식을 전해줬다. 대번에 얼굴에 화색이 도는 친구를 보던 베스가 먼저 탈의실로 들어갈 때였다. 문고리를 돌리는 순간, 돌연 턱 막히는 목구멍에 베스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하아. 끅….”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문고리를 꽉 쥔 채, 쇳소리만 나오는 목을 억지로 비틀었다. 검게 흉이 진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제발. 제발, 목소리만큼은.
몇 분이나 지났을까. 뻐끔거리는 입 속에서 맴돌기만 하던 숨이 왈칵 토해져 나왔다. 단말마 같은 탄식도 함께였다.
“헉, 헉….”
베스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쳐다봤다. 적당히 구불거리는 새카만 머리카락을 가슴께까지 늘어뜨린 그 모습은 기억 속 어머니, 올리비아를 닮아 있었다.
지난밤, 날이 새도록 올리비아가 누운 침대 발치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곁에 함께 누워보지도 못하는 건 죄책감 때문이었다.
내가 당신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순간의 실수로 당신을 영영 잠들지도 못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번트를 사랑한 당신을 이곳까지 불러왔다는 죄책감.
“내가 할 수 있는 것….”
어둠 속에서 마른 나뭇가지 같은 올리비아의 발을 붙들고 쉴새 없이 중얼거렸던 말이었다.
옷을 하나둘씩 벗던 베스는 낡은 캐비닛 안에 담긴 값비싼 옷을 멀거니 바라봤다. 그리고 불과 일 년 전과 너무도 달라진 자신을 다시 한번 천천히 뜯어봤다.
하워드가 치장한 껍데기를 벗기면 비로소 보이는 바짝 마른 뱃가죽과 튀어나온 뼈들은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그러나 하워드의 양녀라는 허울 좋은 껍데기만 씌우면 모든 것은 너무도 달라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베스 제인스와 베스 하워드는 가진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달랐다.
목을 만지작거리던 베스는 불현듯 몸을 홱 돌려 벗은 옷을 다시 주워 입었다. 마침 탈의실로 들어오던 아이네스가 판돈이 어떻게 됐는지 알려주겠다고 했지만, 베스는 홀린 사람처럼 고개를 휘젓곤 약제실로 뛰어갔다.
거칠게 문을 잠근 베스는 진열장에서 각성제를 꺼냈다. 물도 없이 흰 알약을 입에 넣곤 몇 번 가슴께를 두드렸다.
잠들어선 안 돼.
하워드가 질리도록 먹인 수면제의 부작용인지 갑자기 몸에 힘이 풀리면서 잠드는 순간이 점점 잦아졌다. 하지만 베스는 그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아직까진 다른 사람들 앞에선 추한 꼴을 보이지 않은 덕도 있었다.
각성제 몇 알을 더 꺼내 주머니에 집어넣은 베스는 이번엔 붕대와 통증 완화제를 성급하게 집어 들었다. 소견서 없이는 그 누구도 약을 가져가선 안 됐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유 따위 없었다.
약을 모두 챙기자마자 숙소를 향해 내달렸다.
“딕시!”
숙소 문을 열자마자 딕시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엔 불안감이 묻어났다.
“딕시 콜먼!”
“뭔 일이야?”
소리를 지르기는커녕 웬만해선 입도 잘 안 떼는 베스의 외침에 당황한 건 딕시였다. 눈을 둥그렇게 뜬 그녀를 보자 베스는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답지 않은 제 모습에 놀랐을 친구를 위한 작은 연기였다.
“도와줘. 아이네스 혼자 나이트 근무 중이야.”
“아아. 대타해달라고?”
“아니.”
희미한 웃음이 지워진 얼굴엔 짙은 그림자만 남았다. 자연히 함께 낮아진 목소리는 오직 딕시만이 들을 수 있었다.
“내 이름으로 일해줘. 내일 아침, 다른 사람들이 보면 내가 병원에 있었다고 믿게끔.”
“뭐?”
“아이네스는 눈감아 줄 거야.”
가끔은 아이네스보다 더하다 싶을 정도로 융통성 없이 구는 베스 아니었던가. 딕시는 눈을 껌뻑이며 제 등을 미는 베스를 돌아봤다.
“어디 가는데?”
베스의 입술이 멈칫했다. 미미하게 움찔거리던 입술이 이내 분명하게 움직였다.
“…애인.”
입을 떡 벌린 딕시가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라면 소식지를 웨인에서 가장 먼저 보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반드시 이 비밀 업무를 수행하겠다 다짐하는 딕시를 뒤로하고 베스는 숙소를 나섰다. 아직 남아있는 대여 마차에 올라타자, 그제야 제가 땀으로 범벅이란 것을 알아챘다. 미끈거리는 손에 잡히는 각성제 한 알을 더 입에 집어넣었다.
정신 차려. 베스 제인스.
씁쓸한 약이 혀끝에서 사라질 무렵, 마차는 익숙한 길로 접어들었다.
“누구시오.”
문을 지키고 선 보초에게 얼굴을 보이자, 이내 베스를 알아봤는지 거대한 철문이 느릿하게 열렸다.
갑작스런 손님을 맞으러 오는 이는 없었다. 잠긴 저택의 문을 몇 번 흔들던 베스는 유일하게 불이 밝혀져 있는 공작의 침실을 올려다봤다. 영영 열리지 않을 기세로 닫힌 창문을 잠시 보다가 발치의 돌을 들어 올렸다.
닿을 수 있을까.
찰나 불안감이 스쳤지만,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늘 그래왔듯.
탁.
작은 돌멩이는 사 층까지 닿지도 못하고 외벽에 부딪혀 떨어졌다. 베스는 몇 걸음 더 뒤로 물러섰다. 더 무게 있는 돌을 골라 있는 힘껏 던졌다.
타탁.
이번엔 닿을 뻔했지만 아쉽게 빗나갔다.
결국 주머니에 담긴 새 연고 통을 꺼내 들었다. 꽤 묵직한 유리통은 작은 손안에 알맞게 들어왔다. 그걸 던지려 힘껏 팔을 드는 순간.
“...”
창이 열렸다.
그리고 그곳엔 기다리던 남자가 서 있었다.
허공에 멈춘 베스의 팔이 뚝 떨궈지고, 마주 보는 두 사람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맴돌았다. 남자는 저와 어울리는 곳에 있었다. 높고, 견고하고, 함부로 닿을 수 없는 그런 곳에.
떨리는 시선을 잠시 아래로 숨긴 베스는 조금씩 데베르를 향해 다가갔다. 흉진 손끝에 차가운 외벽이 닿을 때에서야 고개를 들어 올릴 수 있었다. 문득 기억 속 겨울이 떠올랐다.
낡은 전방 병원 아래에서 저 남자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더라.
“올라가기엔 좀 높아요.”
아마 꽤 애틋한 표정이었겠지.
“내려와 줘요.”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내려갈 수밖에 없었으니까.